ⓒ 주호민 인스타그램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했었다. 평소 유튜브를 통해 팬이 된 인기 웹툰 작가 주호민 작가가 K리그 팬이 되기로 선언했다는 말은 너무 반가웠다. 그는 지난 달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축구 관련 주제가 나오자 “거주지와 인접한 성남의 팬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성남FC가 직접 유니폼을 선물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러자 주호민 작가는 자신의 SNS에 성남 유니폼 착용 사진과 함께 "성남FC 응원합니다"라는 글을 썼다.

이틀 만에 성남팬 선언 철회, 주호민 작가에겐 무슨 일이?

마치 뮬리치를 연상시키는 그의 모습은 그가 성남FC를 응원하길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는 주호민 작가와 탄천종합운동장에서 만나 인터뷰하는 걸 상상했다. 재미있게 말하고 재미있게 그림을 그리는 그와 유쾌하게 K리그 이야기를 하는 날이 머지 않아 오리라고 기대했다. 지난 5일 주호민 작가의 SNS 응원글을 보고 7일 출근하면 일단 전화 인터뷰부터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떤 ‘드립’으로 그와 대화를 할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주호민 작가는 성남 팬 선언 이틀 만에 축구팬에서 은퇴(?)했다. 성남이 6일 전북현대를 상대로 1-5 대패를 당하자 주호민 작가의 SNS로 달려가 “너 때문에 성남이 졌다”는 식의 욕설과 모욕이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주호민 작가는 '파괴왕'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만화를 연재한 곳이나 방문한 장소가 연거푸 망해버리는 것에서 유래했다. 일종의 ‘밈’이었지만 일부 축구팬들은 도를 넘었다. 성남 팬이 된지 이제 이틀이 된 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주호민 작가는 SNS에 올렸던 성남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삭제했고 그날 저녁 개인 방송에서 시청자들과 소통 중 "오늘부로 축구팬 그만 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는 “난 이 세계의 히스토리를 잘 모른다. 그런데 상대팀 욕을 나에게 쓰더라. 그 팀 이름을 비하적으로 바꿔서 부르는 것을 내게 쓴다. 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니까 그런 것 보내봤자 모른다. 이 문화와 좀 안 맞는 것 같다. 거칠다. 거칠면서 재미있으면 괜찮은데 거칠기만 하다”고 말했다.

밈도 적당히 즐겨야지…과몰입한 사람들

한 명의 팬이 아쉬운 시점에서, 그것도 이렇게 영향력 있는 이가 팬을 자처한다는데 우리는 그를 받아주지 못했다. 그 실체도 없는 미신에 불과한 ‘파괴 어쩌고’라는 이유로 주호민 작가는 테러 수준의 반응에 휘말려야 했다. 우리는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연고 지역에 살면서 관심을 좀 가지려고 하는 이 분위기 하나도 이끌어주질 못했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새로운 팬 유입이 과연 잘 이뤄질 수 있을까. ‘과몰입’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재미있게 우리와 축구를 즐길 사람 한 명을 잃었다.

‘밈’도 적당하게 즐겨야 한다. 성남이 전북현대에 대패한 건 선수들과 김남일 감독이 못해서이지 그 시간에 장모님 생신이라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던 주호민 작가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파괴왕’이라는 웃고 즐길 캐릭터에 과몰입해 무슨 주호민 작가가 주술을 걸어 성남FC를 파괴한다고 소설 쓰지 말자. ‘파괴왕’ 캐릭터의 웹툰 작가가 축구팀 응원을 시작한지 이틀 만에 그 팀이 대패했고 팬들의 거친 비방 메시지를 받은 이 웹툰 작가가 지지를 철회했다는 건 마치 해외토픽에 나올 만한 소식이다.

요즘 나에게도 한 가지 별명이 붙었다. ‘코난’이다. 내가 취재하러 가는 경기장마다 사고가 터진다면서 내가 코난이란다. 처음에는 이런 캐릭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하나의 스토리 정도로 받아들였다. 내가 갔던 경기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한 글도 봤다. 웃으며 넘길 수준이었는데 요즘 들어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미리 취재 일정을 공지하면 해당팀 팬들이 “우리 경기장에 오지말라”고 한다. SNS를 메시지를 통해서는 더 심한 욕설도 있다. 내가 경기장에 오면 일이 터지니 다른 팀 경기장으로 가라는 것이다. 내 돈과 내 시간을 투자해 일하러 가는 건데도 환영은커녕 따가운 눈초리를 느껴야 한다.

이날 성남은 전북에 1-5 대패를 당했다. ⓒ프로축구연맹

승부의 세계, 이해할 수 있는 ‘미신 문화’

‘코난’이라는 별명이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내가 가는 경기장마다 우연찮게 내 앞에서 사고가 터지는 게 아니라 발품을 팔면서 돌아다니다보니 취재할 이슈를 많이 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과몰입한 이들은 “김현회가 오면 사건이 터지니 오지 말라”는 말을 진지하게 한다. 누구보다 주호민 작가의 사례가 안타깝고 심정이 이해가 된다. 일이 터지면 누군가에게 원망을 보낸다고 해서 그게 해결책은 아닌데 사람들은 이상한 미신을 믿고 있다. 정말 주호민 작가가 응원을 시작해서 성남이 대패했나. 정말 내가 경기장에 가서 리얼돌이 등장했나.

이 유치한 일을 사람들은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승부의 세계에서 오래 머문 이들은 작은 일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때가 많다. 오랜 만에 경기장에서 만난 감독은 경기 전 “김기자가 왔으니 우리가 이기겠네”라는 말을 거의 무슨 주문처럼 한다. 승부를 앞두고 사소한 일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승부의 세계가 힘들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구단 직원들도 “스포츠니어스가 오면 우리가 안 지는데 오늘도 그렇겠네요”라고 인사치레 겸 정신승리를 한다.

이런 경기에서 홈 팀이 패하고 다음 홈 경기에 가면 이들은 또 “김기자가 왔으니 우리가 이기겠네”, “스포츠니어스가 오면 우리가 안 지는데 오늘도 그렇겠네요”라고 한다. 그러면 또 지난 홈 경기는 싹 잊고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러게요”라고 화답한다. 이 정도는 좋다. 미신이지만 그 누구도 기분 나쁠 게 없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징크스에까지 기대는 모습은 짠하면서도 흥미롭다. 나는 이런 징크스에서는 언제든 내가 소재로 쓰여도 좋다.

제발 현실에 살자

그런데 ‘파괴왕’이나 ‘코난’에 과몰입해 현실에 없는 세계에서 사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제발 현실을 살았으면 한다. 좋은 마음으로 연고지 팀을 응원하기로 했고 순수하게 SNS에 응원 글까지 올린 이가 이틀 동안 벌어진 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몰입해 SNS로 욕설을 퍼붓는 이들을 보면서 축구팬 전부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창피하고 부끄럽다. 내가 K리그 대표의 자격을 얻을 순 없지만 나라도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성남FC 대표 만화가가 샤다라빠에서 주호민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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