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남해=조성룡 기자] 애증의 골키퍼. 유현.

유현이라는 선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누군가는 최고의 골키퍼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누군가는 한 물 갔다며 악평을 쏟아낸다.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데뷔해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했던 유현은 강원FC와 인천유나이티드를 거치며 자신의 경기력을 확실히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FC서울로 이적한 그는 과거와 달라진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 유현은 점점 경기장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그의 소식이 들린 것은 2019시즌 직전이었다. 유현은 갑작스럽게 일본 J2리그 소속의 도치기SC로 이적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1년 뒤 유현은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섰다. 바로 K리그2의 수원FC로 이적한 것이다. 유현은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K리그2 도전에 나선다.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 같은 유현을 <스포츠니어스>가 만나봤다.

만나서 반갑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본에 있을 때 부상을 당했다. 재활을 이제 마치고 계속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기회를 주신 수원FC에 감사하다. 김호곤 단장님과 김도균 감독님이 기회를 주셨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부상 중이어도 기대감을 계속 가지고 계시더라.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다. 하하.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런가.

일본 생활은 1년이었지만 경기장에서 못본 기간이 오래되서 그런 것 같다.

맞다. FC서울에서 나는 참 힘들었다. 경기에도 많이 나서지 못했고 실수도 많이 했다. 딱히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항상 팀에서 에이스 골키퍼 노릇을 하다가 서울에 가서도 무언가 잘해야겠다, 지기 싫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실수가 많았고 스스로 많이 무너졌던 것 같다. 물론 그 때를 계기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힘도 생긴 것 같다.

많이 힘들었는가.

사실 그렇다.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다 내 탓이지.

조금만 더 물어보겠다. 왜 그랬을까?

믿음을 주고 주지 못하고의 차이 같다. 인천에 있을 때는 팬들에게 믿음을 주는 골키퍼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수를 하면 '괜찮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팬들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지 못한 상황에서 실수도 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한 물 갔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겨냈어야 하는 부분인데 이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맞다. '한 때는 나도 잘나갔는데 왜 이럴까'라는 생각과 함께 '예전과 똑같이 했고 똑같이 노력하는데 유독 여기서만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자연스럽게 모든 원망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축구가 하기 싫어졌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위로가 되어주셨다. 특히 아내가 정말 고마웠다. 서울에 있던 시절 SNS에 나에 대한 악플이 굉장히 많았다. 내 욕 뿐 아니라 아내를 비롯한 두 아들 등 가족 욕도 엄청났다. 아내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항상 믿어주고 응원해줬다. AFC챔피언스리그(ACL) 원정을 떠날 때 아내가 항상 가방에 몰래 편지를 넣어줬다. '나는 무조건 당신을 믿는다, 응원한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최용수 감독님도 내게는 정말 고마운 존재다. 내가 실수했을 때 앞에서는 상당히 뭐라고 하신다. 그런데 나중에 꼭 전화를 주신다. 전화로 내게 "괜찮타. 골키퍼는 1년에 그런 거(실수) 두 개 씩은 한다. 다시 해라 임마. 그래서 니 뽑은 거 아이가"라고 힘을 실어주시더라. 그런 분이다. 최 감독님이 다시 복귀했을 때도 내게 전화해 "나 없으면 니가 제일 고생이다. 다시 함 해보자"라고 하시면서 격려해주셨다.

물론 나는 서울에 어떠한 나쁜 감정도 없다. 서울에서도 좋은 추억이 많다. ACL에서 뛰어봤고 우승도 해보는 등 다 해봤다. 나름대로 우승한 골키퍼다. 특히 ACL에서 뛰었던 경험은 잊을 수 없다. 내가 서울로 이적할 때는 한창 잘하고 있을 때였다. 여러 팀에서 제의가 왔다. 하지만 서울이 가지고 있던 ACL이라는 존재가 내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오더라. 단지 내가 잘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선택은 일본의 도치기였다.

서울과의 계약이 끝나고 새로운 팀을 잘 구하지 못했다. 약 1년 넘게 경기에 나서지 못한 골키퍼를 누가 데려가겠는가. 정말 상황이 힘들었다. 그 때는 진짜 은퇴할 생각까지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경기에 뛰고 뛰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축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평생 축구를 해왔는데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답답하더라.

솔직히 아버지께도 말씀 드렸다. 지금 아버지는 시골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 한 번 팀 알아보고 그래도 안되면 고향 내려가서 사업 물려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한 마디를 하시더라. "예전에 실업 팀도 갔다와본 놈이 뭘 더 못하겠다는 거야? 더 낮은 곳에서라도 한 번 해봐. 그렇게 하고서도 안되면 은퇴해"라고 하더라. 그래서 팀을 더 알아봤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의 응원도 있었다.

가족들이 많이 도와줬는가.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다. 그래서 아들과도 교회를 자주 간다. 내가 이제 10세, 6세 두 아들이 있다. 한창 팀을 구하지 못하고 힘들어할 때 큰아들이 밤마다 울면서 기도해주더라. "우리 아빠 좋은 팀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더라. 첫째는 철이 좀 들었기 때문에 내가 서울에서 힘들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도치기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과 인연이 없었는데 어떻게 또 그런 인연이 생기더라. 처음에는 겁이 났다. 해외 생활은 처음이고 자식들 학교 문제 때문에 혼자 생활해야 했다. 게다가 연봉 등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고 도치기가 강팀도 아니었다. '가서 뭘 해야하나' 싶더라. 그런데 아내가 일본을 가라고 하더라. 아이들은 자신이 돌본다면서 가서 축구 실컷 하고 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도치기 입단을 결심했다.

가족들에게 잘해야겠다.

나는 아내가 없었다면 벌써 은퇴했다. 정말 잘해야한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 아내는 나보고 "아들 셋 키운다"라고 하더라. 하하. 사실 일본에 있을 때도 아내에게 굉장히 미안했다. 생전 힘든 소리 안하는 사람인데 혼자서 사내아이 둘을 키워야 하니 가끔 "힘들다"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래서 도치기에 갈 때 각오가 남달랐을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은퇴까지 생각하던 와중에 기회가 온 것 아닌가. 1년 안에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 은퇴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입단 확정 전까지도 고민을 많이 했다. 한 때는 나도 잘하는 골키퍼였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J2리그까지 가서 축구를 해야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꼭 가라고 하더라. 아내는 내 의견을 뭐든지 잘 따라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더라. 내가 은퇴 생각을 할 때 아내는 어디라도 한 번 더 도전하자고 하더라.

도치기 생활은 어땠는가?

행복하게 축구를 했다. 사실 도치기가 약팀이다. 경기도 힘들고 훈련도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편하게 생활했다. 구단에서도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첫 해외 생활 아닌가.

첫 3개월은 진짜 좋았고 그 뒤에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혼자 사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육아도 할 일이 없고 그냥 내 할 것만 하고 쉬면 되니 좋더라. 그런데 3개월이 지나니까 슬슬 한국이 가고 싶어지고 음식도 문화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치기가 좀 시골이다. 도쿄에서 차로 2시간 걸리고 신칸센을 타면 50분이 걸린다. 한국 사람도 별로 없는 동네다. 그나마 교회를 가야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통역도 입단하고 한 달 후에 구해졌다. 처음에 구단에서 번역기를 줬다. 말하면 바로 번역해주는 기계더라. 하하. 그 때 속칭 '신입 용병'은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알아서 적응해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좀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경기를 하다보니 사람들의 대우와 시선이 달라졌다. 구단도 그렇고 선수들도 나를 많이 도와줬다.

특히 도치기 감독님께 고마웠다. 감독님이 내 장점을 아시고 나에게 맞춘 전술을 짜셨다. 내가 좀 공격적으로 나가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걸 아시고 수비 라인을 올린 전술을 준비하시더라. 게다가 전술에 대해서도 내게 많이 상의를 하셨다. "(유)현상, 이 전술 어떻게 생각하나? 이렇게 할 생각인데 어때?"라고 물어보시면 "제가 잘할 수 있는 전술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렇게 해주셨고 나중에는 주장까지 시켜주셨다.

신입 외국인 선수가 주장이라니 놀랍다.

바로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약 3개월 뒤에 주장을 맡았다. 하하. 조금씩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니 선수들이 내게 의존하더라. 특히 도치기는 약팀이면서 팀을 이끌 선수가 부족했다. 일명 베테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게다가 나는 이 팀에 빨리 적응하고 싶었다. 적응하기 위해서는 선수들과 빨리 친해져야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사주는 문화가 그리 없다. 내가 삼겹살을 엄청 좋아한다. 일본에서도 매번 한식당 가서 삼겹살을 먹었다. 그런 김에 매일 세 명씩 불러서 삼겹살을 사줬다. 그런데 선수들이 엄청 좋아하더라. 그렇게 열 번에 걸쳐 30명에게 삼겹살을 사줬다.

도치기가 연봉을 많이 주는 팀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다.

사실 도치기는 연봉 따져서 간 팀은 아니다. 축구 하겠다는 생각으로 갔지. 그리고 투자한 만큼 돌아왔기 때문에 아깝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선수들과 금방 친해졌다.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더라. 덕분에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당신은 도치기를 1년 만에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부상을 당했다. 비골 골절 부상을 당했다. 34경기를 뛰었고 8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다쳤다. 그리고 그 때 한창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치기도 재계약을 원했고 일본에 있는 다른 팀들도 제안을 했다. 사실 내가 원했다면 일본에 남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족이 마음에 걸리더라.

사실 금전적인 부분보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일본에 남고 싶었다. 아내도 일본에서 계속 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의 교육이 문제였다. 만일 국제학교가 있는 도시의 팀이라면 갔겠지만 내게 제안이 왔던 팀은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아들들이 한창 아빠와 놀고 아빠를 찾을 나이인데 내가 해외 생활을 더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돌아왔다. 사실 총각이었으면 일본에 더 있었을 것이다. 하하.

그리고 당신의 선택은 K리그2의 수원FC였다. 왜?

지난 2019년 6월부터 수원FC에서 연락이 꾸준히 왔다. 혹시 한국 돌아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 도치기 경기도 계속 챙겨보고 있다고 했다. 그 때부터 수원FC 구단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힘든 상황인 가운데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좋지 않은 모습으로 떠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을 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수원FC행을 선택했다.

솔직히 이제 말하자면 K리그1 팀에서도 제안이 왔다. 하지만 그곳보다는 수원FC가 이유 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서울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축구선수는 자신을 원하는 팀, 자신을 찾는 팀으로 가야한다. 나를 원하는 곳에서 마음껏 축구를 해보자는 생각에 수원FC를 갔다. 가족들도 내 생각에 흔쾌히 동의해줬다.

한국에서의 부정적인 시선을 만회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선수는 매 년 다르다. 한 해 잘하면 언론도 팬들도 "잘하는 선수"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다가 한 해 부진하면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 이제 한 물 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그렇기 때문에 다시 잘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쇄할 것이라는 기대감 또는 생각은 하고 있다.

수원FC는 어떤 팀인가?

가족같은 분위기가 있는 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단장님과 감독님이 부모님이고 선수들이 자식 같은 존재다. 구단 고위층에서 선수들을 좀 더 챙겨주려고 노력한다. 김 단장님은 정신적 지주다. 선수들이 좀 풀어지는 등 정신적으로 해이해지면 딱 선을 긋고 "얘들아, 지금은 할 때다"라고 한 마디 해주신다. 그렇다고 마냥 엄격한 단장님도 아니다. 어린 선수들에게 먼저 말 걸고 "애들이 몇 살이지?"라시면서 세세하게 잘 챙겨주신다.

감독님도 비슷하다. 정말 좋다. 신사다. 항상 웃으시면서 선수들 편안하게 해주시고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운동할 수 있을까 고민하시는 분이다. 단지 감독님은 전술 등의 부분에서 원하는 것만 해달라고 요구하신다. 그래서 내가 선수들에게 "감독님 원하는 것 잘 하자. 감독님이 우리에게 스트레스 주는 분도 아니고 우리는 할 것 확실하게 하고 쉴 때는 잘 쉬고 하자"라고 당부했다.

최고참이라는 부담감도 있을 것 같다.

조금은 있다. 부상 중이었다가 훈련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개막전에도 출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최고참이지만 내가 경기를 나가겠다는 욕심보다는 그저 팀이 잘 됐으면 좋겠다. 나부터 잘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요즘 어린 선수들과 내가 제법 세대 차이가 난다. 가장 어린 선수와 15세 차이가 난다. 참고로 나와 (김)병지 삼촌이 14세 차이가 난다. 하하. 나도 병지 삼촌을 어려워 했는데 지금 어린 선수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어린 선수들에게 말도 걸고 "야 이리 와봐"라면서 장난도 친다. '플스'로 게임을 할 때도 제일 어린 선수를 일부러 불러서 같이 한다. 노력은 하는데 세대 차이는 쉽게 극복이 안된다. 나는 사실 '손 하트'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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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린 선수들을 보면 다들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든다. 앞날이 창창한 선수들 아닌가. 다들 열심히 한다. 게다가 착하다. 하지만 더 크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 경기 뛰고 뛰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내가 겪어보고 나이를 먹으니까 그렇더라. 그런데 아직까지는 다들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더라. 좀 더 넓게 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얘기해준다고 듣겠나. '노땅'이 잔소리 한다고 생각하지. 하하.

선수단의 애로사항을 감독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최고참의 의무 아닌가.

우리 팀이 주장을 정말 잘 뽑았다. 주장 (이)한샘이가 그런 역할은 다 한다. 훈련이 좀 힘들어서 한샘이에게 "오늘은 감독님께 쉬자고 건의하는 건 어때?"라고 말하면 한샘이가 바로 가서 이야기해준다. 최고다.

사실 당신의 선수 인생은 이제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맞다. 항상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경기를 나서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훈련하고 축구하는 것이 앞으로는 할 수 없을 때가 온다. 이것들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실컷 해보려고 한다. 내 경기력이 좋아져도 좋지 않아도 경기에 출전해도 출전하지 않아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만 둘 생각까지 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 예전에는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지만 이제는 뛰지 못해도 축구하는 것이 행복하다.

혹시 선수 인생 다음의 계획도 준비하고 있는가?

글쎄… 아직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마 축구계에 있지 않을까. 하하. 사실 지도자 자격증 같은 것은 이미 따놓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선수 생활을 최대한 오래 하는 것이 목표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축구기 때문에 아직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물론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나보다 뛰어난 선수가 있으면 당연히 비켜주고 은퇴해야 한다. 그 선수를 위해 뒤에서 적극 밀어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은퇴 수업을 받을 생각이다. 그래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고 은퇴하고 싶다. 모든 선수들의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지금도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올해가 내게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좀 더 해보고 후회 없이 그만두자. 내가 이제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노력해도 이 정도 밖에 안된다면 미련없이 그만두자.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당신의 순발력 등은 아깝다. 혹시 대물림할 생각은…

일단 첫째는 소질이 없다. 판명됐다. 운동 삼아 축구교실을 보내봤다. 거기서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다. 둘째는 축구를 하고싶어 하는데 잘 모르겠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축구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굳이 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축구교실은 한 번 보내볼 생각이다. 운동 삼아 보낼 것이다. 아내도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 하하.

내가 축구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굳이 축구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돌아보면 축구 말고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공부도 한 번 해보고 싶었고 대학 생활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평생 축구만 하느라 그런 것들을 해보지 못했다. 적어도 우리 자식들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축구를 정말 하고 싶어한다면 모를까 굳이 내가 아이들에게 축구 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웬만하면 시키지 않고 싶다. 물론 일반 사회도 정말 힘들 것이다. 그래도 다른 일을 좀 했으면 좋겠다. 다른 친구들은 자식들에게 축구를 시키더라. 그러면 '오, 나도?'라면서 귀가 솔깃해지지만 자식들이 그 힘든 축구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더라.

역시 축구는 보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첫째는 그래도 내가 K리그에서 뛸 때 경기장에 많이 왔다. 하지만 여섯 살인 둘째는 당시 너무 어렸고 내가 일본에도 갔다와서 자주 경기장에 오지 못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경기장에 실컷 데리고 다닐 것이다. 하하.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하자. 올해 K리그2는 더 힘들 것 같다.

이렇게 많이 바뀐 줄 몰랐다. 일본 갔다오니 천지개벽이더라. 일단 선수들도 잘 모르겠더라. 다 처음 보는 선수들로 가득하다. 우리 팀에서도 처음에 내가 알던 선수는 (최)종환이, (김)동찬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전시티즌이 기업구단이 됐다는 이야기도 놀랐고 K리그2 팀 리스트를 보니 여기에 제주유나이티드도 있더라. 거참. 경남FC도 멤버가 정말 좋더라.

그래도 선수 이름값으로 축구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K리그2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주변 선수들에게 물어봤다. 그러니까 '이름값으로 축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더라. 뭐 그냥 다들 비슷비슷하다고 하더라. 아무리 돈을 많이 써도 아무리 돈을 적게 써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이 K리그2라고 들었다. 진짜인지는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수원FC는 올 시즌 어떤 모습을 보일까?

느낌이 온다. 이번 시즌 잘될 것 같다. 많은 팀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뭔가 하려는 선수들이 많은 팀은 처음 봤다. 경기에 뛰지 못하거나 훈련 중에 비주전에 속하면 기분이 나쁘고 툴툴대야 하는데 그런 선수들이 없다. 대신 어떻게 한 번 베스트11 자리에 더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나였다면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 선수들이 기회를 잡으려고 오히려 더 노력하더라.

올해 팀은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이 목표고 나는 경기에 많이 출전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개인적인 출전은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정하는 것이다. 일단 먼저 팀이 잘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주어진 기회 안에서 최대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유현은 아픔을 통해 한 차례 성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 세월은 매정하게 유현에게 그다지 많은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유현은 다시 골키퍼 장갑을 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더 이상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와 축구를 향한 마지막 애정이 그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눈물 어린 기도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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