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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잠실올림픽주경기장=김현회 기자]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명대사를 꼽자면 단연 “후지산이 무너집니다”일 것이다. 송재익 캐스터는 1997년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이 역사에 남을 명언을 탄생시켰다. 이뿐 아니라 그는 한국 스포츠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다. 무려 6개 월드컵을 중계한 살아있는 역사다. 축구뿐 아니라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의 권투 중계 역시 그가 생중계했던 경기였다. 그의 역사가 곧 한국 스포츠의 역사였다.

송재익 캐스터는 지난 해부터 K리그 중계로 다시 돌아왔다. 프로축구연맹은 자체 중계를 시작하면서 송재익 캐스터에게 다시 한 번 마이크를 맡겼다. 최선을 다해 두 시즌 동안 임무를 완수한 그는 21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하나원큐 K리그2 2020 서울이랜드와 전남드래곤즈의 경기를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게 됐다. 경기 종료 후 송재익 캐스터는 밀려드는 인터뷰 공세가 다 끝난 뒤 모두가 떠난 경기장에서 조용히 <스포츠니어스>와 둘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경기를 마친 소감은.

사람들은 내가 올 시즌을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는 걸 대단히 슬프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직업을 잃는 입장은 아니다. 원래 캠핑카를 몰고 여향 다니는 걸 즐기는데 건강이 안 좋거나 걷기 어려운 상황도 아니고 소일거리로 작년부터 K리그 중계를 했다. 코로나19 여파에서도 순탄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내 나이에 밥벌이를 하려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이크를 내려놓게 된 게 홀가분하다. 그간 교통사고도 없었고 코로나19도 없이 잘 버텨온 건 다행이다. 크게 흠 잡을 데 없이 불명예스럽지 않게 마이크를 내려놓게 돼 행복하다.

올해 79세다. 건강하게 한 시즌을 잘 마무리하셨다.

MBC에서 중계를 30년 했다. 프랑스 월드컵 때 시청률이 기억난다. 신문선 씨하고 내가 중계를 했을 때 시청률이 50%였다. 타 방송사들과 비교가 안됐다. 프랑스 월드컵 끝나고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데 그때 IMF가 왔다. (사람들이) 퇴직을 할 때였다. 68살까지 하고 마이크를 놓았다. 이후에 10년을 쉬면서 여행을 다녀왔다. 그전에 K리그 중계할 때는 광양, 울산 등 바닷가를 유랑하며 중계를 했다. 출장비도 받았고 기쁘게 캐스터 경험을 했다.

68살에 마이크를 놓았는데 작년에 연맹에서 연락이 왔다. 연맹에서 중계를 자체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K리그2는 작년부터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운동장에 가서 체온을 쟀다. 이틀 전에 대전에 중계를 갔는데 집에 오니 밤 12시였다. 내가 오늘 마이크를 놓은 것에 대해 가장 기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집사람이다. 늙은 남자가 운동장에 갔다. 오늘 아주 기쁘게 마이크를 놓는다. 캐스터에서 시청자로 집에 돌아가겠다. 지금 아내와 둘이 지내고 있는데 오늘은 저녁 맛있게 해놓을 테니 빨리 오라고 했다.

몇 년 더 하셔도 될 만큼 건강한 모습이다.

에이 그래도 그 정도 체력은 아니다. 어느 경기장을 가더라도 운전을 해서 왔다갔다 하는 게 이제는 좀 힘들다. 얼마 전에도 대전에 중계를 하러 갔다가 왔는데 집에 도착하니 12시더라. 내 나이에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제 그만둬야지‘라고 하면 주변에서는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한다. 지방으로 가면 하루가 소요되기도 하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이 나이에 이걸 견디는 게 힘들다. 강연을 하러 다니면 모르는데 이건 미리 자료준비하고 경기장에 두 시간 전에 도착해서 중계를 두 시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그래서 홀가분하다는 표현을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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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유지 비법이 따로 있나.

해야되는 일은 반드시 하고 안 해야 할 일 안 하는 게 절제다. 술 담배를 안 한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평생 하지 않으려 했다. 평생 살면서 납품이나 수금한 적이 없다. 세상을 계산하며 산 적이 없다. 축구장에 가면 본부석에서 임원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절제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따라왔다. 겸손이 참 힘들다. 하지만 쉽게 겸손할 수 있다. 겸손한 척 하면 된다. 겸손한 척은 할 수 있다. 절제와 겸손한 생활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유지됐다.

마지막 중계 장소가 또 하필이면 송재익 캐스터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 했던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다.

큰 의미는 아니고 우연 정도인 것 같다. 내가 1986년에 여기에서 서울아시안게임 개막식을 중계했다. 이 경기장에서 첫 국가대표 축구 경기도 내가 중계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중계한 모든 경기를 속속 기억은 못 해도 여기 관중석에 관중이 꽉 차고 들썩였던 기억은 늘 있다.

한국 스포츠 중계사의 살아있는 역사를 가지신 분이 떠난다고 하니 아쉽다.

다 때가 되면 떠나야 되는 법 아닌가. 내가 올림픽을 8번, 월드컵을 6번했다. 한국 현대 스포츠사의 중요한 현장에 다 있었다. 올림픽 같은 메인 이벤트 때는 현장에서 중계를 하기보다는 스튜디오에서 여러 종목을 연결하는 앵커 역할을 많이 했다. 축구 중계 끝나면 농구장 연결했다가 유도장도 연결하는 그 역할이다. 축구나 야구, 복싱 등의 중계와는 다른 일이다. 스튜디오에서 보통 3분에서 5분씩 애드리브로 시간을 채워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현지에 가면 길거리에도 돌아다녀보고 많은 걸 경험하려고 했다. 1984년 LA올림픽 때 LA에 가보니 달이 참 크더라.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미국에 오니 음력 달력이 없어서 오늘이 음력 며칠인지는 모르겠지만 달이 참 큽니다. 미국 사람들 손과 입만 큰 게 아니라 달도 여기 햄버거 만큼이나 크네요”라고 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히로시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원자탄의 상처를 입은 히로시마에는 6개의 강이 흐르는데 이 부근에는 방사선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종이학을 접어놓는 곳이 있다. 이 이야기를 꺼냈다. 지역에 따라, 배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요소요소에 포함시키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어록도 많이 생겼다.

어록을 혹시라도 미리 준비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1997년 도쿄대첩 당시 “후지산이 무너집니다” 같은 말이 오래 회자되자보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어록은 미리 만들 수 없다. 미리 준비한 어록은 한 번 쓰면 두 번은 못 쓴다. 상황이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준비된 건 없다. 아, 물론 경기 중계 오프닝을 준비한 적은 몇 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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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이었나.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온 뒤 성적이 나오지 않아 ‘오대영 감독’이라는 별명을 얻을 때였다. 지방에서 하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을 중계하러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뭐라고 오프닝 멘트를 해야할까 고민이 많았다. “우리가 이길 겁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때 기차에서 오프닝 멘트는 준비했다. 이 멘트는 지금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다.

한 번 다시 해줄 수 있나.

정확히 기억난다. “오늘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을 갖습니다. 뒷걸음질 치는 한국 축구가 언제쯤 유턴을 할 것인지, 추락하는 히딩크의 주가가 언제쯤 반등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였다. 이건 미리 준비한 멘트였다.

정말 그 상황을 잘 묘사한 멘트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이 부산에서 폴란드를 이기고 대구로 가 미국하고 붙을 때에는 오프닝 때 “오늘도 이겨야 될 경기를 중계방송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관중석을 둘러 봤는데 6만3천 명이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다시 마이크가 넘어온 뒤에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6만 3천 송이의 장미꽃이 활짝 핀 대구월드컵경기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신문선 씨, 장미에는 가시와 향기가 있는데 오늘 이 장미꽃은 향기보다는 가시가 더 날카로웠으면 합니다.” 날카롭게 공격을 해달라는 멘트였다. 이건 준비된 멘트가 아니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관중석을 보고 떠오른 말이었다. 당시 포르투갈과의 3차전에서는 우리나라가 흰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했는데 그날 송종국이 피구를 완벽히 막아내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때 했던 멘트도 기억난다. “오늘 피구의 그림자는 하얗습니다.” 이것도 준비된 어록은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이었나.

2002 월드컵 때 스페인을 이기고 4강으로 갈 때가 가장 기억이 난다. 멕시코 월드컵 이후 여섯 번 중계를 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 한국 경기 중계를 마치고 부리나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스튜디오에서 결승까지 중계를 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시작할 때만 해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은 상태였다. 극적인 상황일 때 내가 던진 어록을 잊지 않고 있다. "마테우스가 이끈 병정들이 세계 축구를 평정하고 찬란한 우승컵을 들고 고국으로 가면 나라가 통일이 된다"는 말을 남겼다.

목이 메어서 말이 안 나왔다. 나는 6.25를 겪은 세대였다. 마테우스가 당시 서독 주장이었는데 할머니가 동독에 살았다. 그 선수가 찬란한 금메달을 안고 고국으로 가는데 "참 부럽습니다"라고 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못했다. 이주일 씨가 죽기 전에 입원을 하고도 축구장을 찾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주일 씨가 축구광이다. 경기 중계를 하려고 하는데 이주일 씨가 휠체어에 타고 운동장에 왔다고 한다. 내가 눈물이 참 많은데 이주일 씨가 온 걸 보고 말이 안 나왔다.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2004년에 그리스에서 있었던 아테네 올림픽 때 한국이 말리하고 경기를 했다. 말리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가는 상황이었는데 전반전에 0-3으로 지고 있었다. 세 골을 넣어 3-3이 되어야 올라가는데 후반에 세 골을 넣었다. 극적인 장면이었다. 이 경기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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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분야에서 이렇게 50년 동안 존경을 받으며 일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진심으로 존경을 보낸다. 비법이 있나.

특별한 비결은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는 항상 경기가 열리면 경기 두 시간 전에 경기장에 온다. 이렇게 한적한 경기장에 비둘기가 왔다갔다 하면 그걸 보는 게 참 행복했다. 내가 축구 덕을 많이 봤다. 내가 축구와 복싱 캐스터를 하니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주지 누가 날 알아주겠나.

마지막으로 그 동안 중계를 사랑해준 시청자 분들께 한 마디 해달라.

이제는 마이크를 놓지만 아무쪼록 한국 축구와 복싱 모두 잘 되기를 바란다. 특히나 K리그는 한국 축구의 중심이다. 한국 축구는 영원해야 하니 축구에 많은 성원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또한 건강해야 축구도 즐길 수 있다.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해볼까 한다. “지금까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송재익이었습니다.”

한국 스포츠의 살아 있는 역사인 송재익 캐스터는 이렇게 박수를 받으며 마지막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한 동안 잠실종합운동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8번의 올림픽과 6번의 월드컵 동안 늘 우리와 함께 한 전설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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