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그런 걸까 ⓒ 한국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부천=홍인택 기자] 설기현 감독은 "축구가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참 애매하고 흐릿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표현도 딱히 없다.

25일 부천종합운동장. 하나원큐 K리그2 2020 부천FC1995와 경남FC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부천종합운동장의 안팎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경기 전에는 구단 측이 준비한 이벤트로 팬들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다. 부천의 시즌 두 번째 제한적 관중 입장이 허용된 경기였다. 경기 전부터 부천 팬들은 부천 구단의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야외 광장에서 긴 시간 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팬들로서는 오랜만에 찾은 홈 경기장이었다. 마침 지난 17일 대전하나시티즌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둬 나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기장 안 분위기는 긴장감이 흘렀다. 부천을 응원하는 서포터즈 '헤르메스'는 자신들의 걸개를 거꾸로 걸었다. 지난 경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팀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날 부천 팬들은 전반전 이후 팀을 향한 메시지 걸개를 들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의지는 선수단에게만 해당인가?" 그 걸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팀의 분발을 촉구하는 부천 팬들 ⓒ 한국프로축구연맹

경남 측도 부담스러운 원정이었다. 경남은 승격 플레이오프를 향해 서울이랜드FC, 대전하나시티즌, 전남드래곤즈와 치열한 경쟁 중이다. 리그 마지막 경기까지 모두 치르고 난 뒤 4위까지만 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어느 팀이 올라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뚜렷하지 않다. 마침 이 경기가 열리기 전날인 24일 침체기를 겪던 대전이 전남에 2-1 승리를 거두면서 플레이오프 경쟁은 더 미궁속으로 빠졌다.

막상 경기가 시작하자 경기 양상도 다르게 흘렀다. 초반 경기력은 부천 쪽이 더 우세했다. 빠른 패스로 수비 지역에서 전방으로 공을 전달했다. 그동안 답답한 경기를 펼쳤던 부천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공을 소유하고 도전적으로 공격에 임하면서 경남의 측면 뒷공간을 노렸다. 바비오는 앞에서 열심히 싸워줬고 서명원과 조건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선제골은 경남이 넣었다. 고경민의 크로스를 정혁이 헤딩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만 해도 경남이 무난하게 부천을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출전 경험도 얼마 없는 조건규가 연달아 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조건규가 동점골을 넣고 이어서 국태정이 역전골까지 성공했다. 후반전 시작과 함께 조건규가 또 추가골을 터뜨리면서 부천이 무려 세 골을 넣고 3-1로 기분 좋게 이기고 있었다. 후반 10분 즈음에는 조건규가 또 다시 골을 터뜨리면서 구단 최초 해트트릭의 주인공이 될 뻔 했지만 오프사이드로 골이 취소되면서 아쉽게 부천의 골 폭풍이 멈췄다.

그럼에도 후반 중반까지는 부천의 흐름대로 경기가 흘렀다. 송선호 감독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조건규 대신 이현일을 넣고 이어서 최병찬과 이정찬까지 넣으며 승리를 굳히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경기가 이대로 끝나면 경남이 매우 불리했다. 경남의 남은 상대는 수원FC와 대전이다. 순위표 상 하위에 있는 부천을 상대로 승점을 획득해야 서울이랜드, 전남드래곤즈, 대전하나시티즌과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설기현 감독은 이미 손을 써놓은 상황이었다. 후반 시작과 함께 이광선 대신 강승조를 투입하면서 수비에 변화를 줬고 박창준 대신 폭발적인 스피드가 있는 황일수를 투입했다. 이어 후반 초반 네게바까지 투입하면서 총공세에 나섰지만 후반 중반까지도 추격하는 골은 나오지 않았다. 부천은 나름대로 수비는 훌륭한 팀이다. 설기현 감독은 이 상황에서 "'오늘 경기는 졌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3-1로 앞선 상황에서도 송선호 감독의 목소리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경남이 점점 공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송선호 감독은 마스크도 내린 채 벤치에서 선수들에게 집중을 요구하며 소리쳤다. 계속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고 계속 한 발 더 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송선호 감독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후반 40분 고경민이 한 골 추격하면서 점수는 2-3이 됐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이때도 설기현 감독은 "두 번째 골이 너무 늦게 들어갔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설 감독은 선수들에게 계속 도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팀의 분발을 촉구하는 부천 팬들 ⓒ 한국프로축구연맹

그리고 대반전이 시작됐다. 네게바가 부천 수비 지역에서 특유의 센스를 발휘했다. 감각적인 터치로 공의 방향만 바꾸며 다른 공격수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줬다. 결국 최봉진이 네게바의 공중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고경민의 얼굴에 펀칭을 가했고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백성동이 침착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동점에 성공했다. 이 때가 후반 44분이었다.

그러나 경남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탄 경남은 끝까지 밀어부쳤다. 또 다시 부천 골문 앞에서 혼전 상황이 펼쳐졌고 최준이 결국 경남의 승리를 결정하는 골을 기록했다. 경남 선수들은 일제히 환호면서 경남 벤치로 뛰어들어갔다. 멀리 원정을 온 경남의 홍보팀 직원도 기자석에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90분 동안 지옥에 있던 팀이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 곧바로 천당으로 올라왔다. 반면 부천 선수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승리를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선수단의 모습은 참혹했다.

두 팀의 상반된 분위기는 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설기현 감독은 얼떨떨한 승리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마스크는 벗지 않았지만 특유의 미소가 마스크 밖으로 새어나왔다. "최준이 왜 그 순간 그 곳에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거나 "사실 난 지는 줄 알았다"라며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하면서 연신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이 너무 고맙다"라고 말했다. 설기현 감독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자회견 밖을 빠져나갔다.

반면 송선호 감독의 표정은 참담했다. 아무리 힘든 경기를 펼쳐도 쓴웃음이라도 짓던 송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단 한차례 쓴 웃음도 잘 짓지 못했다. 송 감독은 "선수 교체에 실수가 있었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면서도 "선수들에게 믿음을 줬는데 잘 이뤄지지 않았다"라며 어렵게 입을 뗐다. 경험이 많은 송 감독으로서도 이날 기자회견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팀의 분발을 촉구하는 부천 팬들 ⓒ 한국프로축구연맹

설기현 감독은 "축구가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90분 동안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이날 데뷔골을 기록한 조건규가 구단 최초로 해트트릭까지 기록하면서 홈 팬들 앞에서 웃을 수 있는 경기였지만 결국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웃고 환호하는 팀은 따로 있었다. U-20 월드컵에서 결정적인 골을 기록했던 최준은 이날 대역전에 성공하는 골로 프로 데뷔골을 신고했다. 최준은 "오늘 골이 월드컵 때보다 더 뜻 깊다"라고까지 말했다. 최준은 이렇게 두 번째 인생골을 기록했다.

90분 동안 괴로운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경남 홍보팀 직원은 즐거운 마음과 표정으로 설기현 감독과 최준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반면 오랜만에 팬들을 집으로 부른 부천 관계자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10월 25일 90분 동안 펼쳐진 부천FC1995와 경남FC의 드라마는 이렇게 끝났다.

intaekd@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