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또다시 도전 꿈꾸는 안양 황문기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홀로 낯선 유럽 생활을 견뎌낸 청년은 더욱 성숙해지고 있었다.

이번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FC안양에 새로운 선수가 들어왔다. 공격형 미드필더 황문기다. 울산현대고를 다니던 황문기는 포르투갈로 떠나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포르투갈 리그 팀인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에서 유스 팀을 포함해 다섯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선택은 어릴 적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안양이었다.

최근 안양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문기의 활약은 조금씩 기대감을 키워가고 있다. 비록 경기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평가다. <스포츠니어스>는 안양종합운동장에서 황문기와 마주했다. 그런데 이 선수, 생각보다 많이 짠하다. 지금부터 산전수전 모두 다 겪은 황문기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시국에 한국에 오느라 수고했다.
4월 1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 적응이 다 완료됐다. 정말 쉽지 않은 귀국길이었다. 코로나19로 포르투갈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한국 복귀를 정말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니 무언가 굉장히 빨리 진행됐다. 3월 30일에 전 구단과 계약 해지를 했고 다음날 바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정신이 없었다.

정말 포르투갈에서 5년 동안 산전수전 많이 겪었다.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돌아오는 과정마저 스펙터클했다. 지금은 안양에서 잘 생활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조금 있다 물어보겠다.
나는 다 준비되어 있다.

포르투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것이 특이하다.
울산현대고에 다니면서 졸업을 준비하던 중 테스트를 보러 갔다 말 그대로 눌러 앉았다. 사실 고3 여름에 포르투갈 팀 테스트 제의는 한 번 왔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고 나도 별 생각 없이 들었다. 그런데 시즌이 끝날 때쯤 되니 다시 한 번 포르투갈에서 테스트를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유럽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바로 테스트를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에 가 테스트를 보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마침 내가 동시에 경희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제출한 상황이었다. 고민도 할 법 했지만 마침 포르투갈에서 합격 소식이 날아올 때 경희대학교에서는 탈락했다는 통지가 왔다. 그래서 이 참에 마음 편하게 포르투갈을 가기로 했다. 울산현대와도 잘 이야기해 처음에는 아카데미카 U-19 팀에서 반 시즌을 뛰고 프리시즌 때 1군에 합류해 정식으로 계약했다.

그런데 솔직히 몰랐다. 그 때부터 1년 간은 고생길이 훤히 열리더라…

어린 나이에 홀로 유럽 생활을 하니 그랬던 것인가?
그런 것 같다. 나도 유럽이라는 곳을 그저 ‘로망’처럼만 생각하고 너무 쉽게 다가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적응하는데 진짜 힘들었다. 1년 동안은 와…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더라. 특히 내가 처음 포르투갈을 갔을 때 집을 하나 얻어서 생활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전기도 물도 가스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눈 앞이 아찔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은 집에서 잠만 잤다. 그리고 궁상맞은 생활이 시작됐다. 잠을 제외한 모든 생활은 밖에서 해야했다. 일단 씻지도 못한 상태로 카페에 가서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다. 씻는 것은 구단 훈련장에서 씻기도 했지만 마트에 6리터 짜리 페트병에 파는 물이 있다. 그걸 들고 와서 씻으면서 버텼다. 정말 힘들었다. 그 때는 갓 성인인 나이에 맥주도 많이 마셨다.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맥주라도 마셔야 살 것 같았다. 살도 많이 찌더라.

그런데 이 고생이 끝이 아니었다. 유소년 팀에서 잘 뛰고 1군과 계약을 했다. 처음에 프리시즌 때는 경기도 많이 뛰었다. 그런데 팀에서 점점 소외가 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우울함이 밀려왔다. 게다가 나는 그곳에서 혼자였다. 집과 훈련장만 반복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밥도 식당에서 먹지 않고 무조건 포장해서 집에 와 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울증에 걸렸던 시기 같다.

사실 내가 뛰는 곳에서 동양인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식당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주위에서 보는 시선들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인종차별적 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당시 워낙 예민했다. 어디 가기만 하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나마 그 때 도중에 대한민국 U-23 대표팀에 소집되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포르투갈 생활을 접었을 것 같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고향에 온 느낌이었는가.
한국에 와서 훈련을 하니까 모든 것이 좋더라. 그 때는 한국에서 훈련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훈련 와서 ‘힐링’도 많이 하고 나의 현재 실력도 어느 정도 체감하는 계기가 됐다. 그 때는 뭔지 모르게 모든 것이 정말 힘들었다. 가족들도 정말 많이 보고싶었다.

어린 아들을 이역만리 타국 땅에 보낸 부모님도 마음 고생 좀 하셨을 것 같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부모님께 그런 티를 많이 내지 않았다. 나는 포르투갈에 오고 나서 가족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딱 한 번이었다. 그게 바로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을 때였다. 그 전까지는 돌아간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무언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쉽게 돌아서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결국 포르투갈에서 5년이나 살았다. 반전의 계기가 있었는가?
악몽과 같았던 첫 번째 시즌이 끝났다. 당시 팀은 2부리그로 강등을 당했고 나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다. 그 때 가족들과 속초에 여행을 갔다. 거기서 가족들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가족들이 모일 때 주된 이야기 주제는 나다. 마침 나도 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했다. 가족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이 가족의 힘이라고 해야할까? 포르투갈 생활 초기에 나는 ‘나는 어린 선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팀도 2부리그로 떨어진 상황이 내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과의 시간을 통해 힘을 얻고 다음 시즌은 어떻게 해서라도 적응을 빨리 해서 잘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 때부터 나도 팀 동료들에게 다가서고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무언가 나아지더라.

다들 팀의 강등이 계기였다고 평가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이유는 가족이었던 건가.
그렇다. 가족과 함께 속초에 갔을 때 가족들이 내게 많은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많이 의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나 또한 많이 성장한 것 같다. 가족들과는 매년 여행을 떠난다. 그 때마다 마음도 많이 치료를 하고 무언가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포르투를 간 적이 있다. 내가 정말 포르투를 좋아한다. 수도인 리스본과 약간 다른 느낌이다. 리스본은 도시의 느낌이라면 포르투는 교외와 도시의 느낌이 같이 있는 분위기다. 경치도 정말 예쁘다. 포르투갈에 있을 때 쉴 때마다 포르투를 갔던 것 같다. 어머니가 귀찮아해도 내가 무조건 모시고 갈 정도다. 그런데 어머니는 몇 번 가더니 좀 질리다면서 ‘안가본 곳도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다시 상황이 좋아져 한국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포르투갈도 한 번은 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페인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오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사실 나는 스페인을 가보지 않아서 모른다. 하하. 그래도 나는 포르투갈이 좋다. 나중에 유럽에서 한 달 동안 살 기회가 있다면 또 포르투갈에 갈 것이다. 특히 포르투에 살고 싶다. 해외 생활의 낙이었다. 내가 또 포르투 맛집은 싹 다 알고 있다.

포르투갈 축구는 어떤가?
1부리그와 2부리그가 상당히 다르다. 포르투갈 1부리그는 좀 더 기술적이고 공간이 많다. 그래서 좀 더 수월하게 축구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상위팀과 하위팀의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 2부리그는 속된 말로 ‘힘 축구’라고 부를 수 있다. 파워풀하다. 힘에서 이기는 팀이 1부리그 승격의 기회를 얻는 것 같다.

비록 팀이 강등당한 이후 2부리그에서 뛰었지만 나는 이제서야 프로 선수라는 것을 실감했다. 팬들 앞에서 뛴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게다가 팬들이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해줬다. 팬들은 나를 “키”라고 부른다. 내가 경기장에 들어가면 나 만을 위해 관중들이 “키~”라고 함성을 지른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정말 고마웠다. 아직도 그 함성은 그리울 정도다. 그러다보니 첫 시즌과는 다르게 팀에 대한 나의 애정도도 상당히 높아졌다.

수만 관중이 그렇게 외쳤다니 소름이 돋았겠다.
수만 명은 아니다. 1부리그 상위권 팀과는 관중 수에서도 꽤 많은 차이가 난다. 포르투갈은 신기하게 우리나라처럼 자고 나란 동네 팀을 좋아하거나 고향 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따로 있다. 그 중에 절반은 벤피카, 포르투, 스포르팅이다. 우리 팀 경기에 찾아오는 관중은 약 2천명 정도였다.

제한적 관중 입장이 풀리면 안양에 그보다 더 많은 팬들이 올 것 같다.
맞다. 그래서 나도 정말 많이 기대를 하고 있다. 안양의 영상을 보면서 나도 한 번 이런 팀에서 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뛰어보고 싶다. 안양 팬들의 응원이 있다면 더 힘이 나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포르투갈 생활 도중에 SC브라가에 갈 뻔 했다고 들었다.
그게 2017년인가 2018년인가… 프리시즌을 잘 마치고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고 있을 때였다. 이적시장이 거의 끝날 때쯤 급하게 팀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빨리 네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 알고보니 브라가에서 제의가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전트에게 바로 연락을 했고 “무조건 가겠다”라고 했다. 또다른 도전이니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적시장이 그 때 약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연락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제의는 없었다. 일각에서 테스트를 봤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제의만 받았다. 물론 도전이 불발된 것은 아쉽지만 그걸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면 성장이 멈추는 선수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빠르게 잊고 내가 할 일에만 열심히 집중했다.

그리고 결국 당신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포르투갈에서 4년 째 생활할 때 부모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한국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싶다”라고. 그 때는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5년 째를 채우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돌아갈 시기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늦으면 내가 한국에 돌아와도 뛰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 복귀를 결심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포르투갈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4월이 되면 공항이 셧다운 되어 포르투갈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나 또한 한국 복귀를 고민하던 와중에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니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굉장히 뒤숭숭했다. 심지어 나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감기’라는 영화를 봤다. 호흡기로 감염되는 질병을 다룬 영화였다. 이 영화가 코로나19와 비슷한 점이 제법 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게다가 한 번은 친구와 함께 쇼핑센터를 가는데 포르투갈 사람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나를 보고 기침을 했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적인 행동이었다.

ⓒ FC안양 제공

물론 포르투갈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일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기분이 나빠서 포르투갈어로 몇 마디를 하니 도망 가더라. 그 정도로 무언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그 이후로는 정신 없이 일이 진행됐다. 일단 비행기 티켓부터 확보해야 했다. 이미 포르투갈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항공편은 없어 어렵게 런던에서 한국으로 가는 대한항공 티켓을 구했다.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고 짐을 싸고 한국으로 오는 모든 과정이 5일 안에 다 끝났다. 좀 급하게 포르투갈 생활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나는 여권까지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여권까지 잃어버리니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포르투갈에 있는 한국 대사관이 정말 빠르게 잘 대처해줬다. 그렇게 짧고 굵게 고생을 하고 공항에 가니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더라. 순간 영화 ‘감기’가 생각나면서 이게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에 오면 2주 자가격리라는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한국에 와서 나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오직 나 혼자서 집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친척 집에서 생활했다.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2주인 것 같았다.

포르투갈에서 한국에 왔으니 가장 먼저 시차 적응을 해야했다. 그런데 시차 적응을 하려면 좀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해야한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속된 말로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야할 때 잠들지 못하고 자면 안되는 시간에 잠드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근육량도 많이 빠졌다. 아무리 집에서 운동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철저하게 자가격리 수칙은 지켰다. 가족들이 “너처럼 자가격리 잘 지키는 사람도 없을 거다”라고 할 정도다. 어쨌든 내가 방심하고 자가격리를 어기면 누군가를 죽음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코로나19다. 그래서 나는 집 베란다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정말 힘든 자가격리지만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 또 자가격리다.

그렇게 2주 동안 자가격리를 끝나자마자 밖에 나가서 뛰었다. 러닝을 하는데 ‘공기가 이 정도로 달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쾌하고 좋았다. 그 때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정말 신나서 생각보다 더 빨리 뛰고 많이 뛰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K리그에 입성했다. 왜 안양을 택했는가?
K리그 입성을 준비하면서 나는 경기를 많이 뛸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축구를 시작한 곳이 바로 안양이다. 처음 안양에서 입단 제의가 왔을 때 나는 바로 “안양에 가고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이곳이 아니면 나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안양이 1순위였다. 나의 K리그 첫 시작을 이곳에서 하고 싶었다.

ⓒ FC안양 제공

다시 팀 동료들과 손발을 맞춘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 자신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정말 많이 쉬었던 것 같다. 안양의 팀 훈련에 참여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속으로 ‘진짜 와, 이건 너무 힘들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팀 훈련을 따라하니 컨디션이 금방 좋아지더라. 게다가 코칭스태프와 팀 동료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정말 많이 도와줬다. 지금은 문제가 없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포르투갈과 많이 다른가?
포르투갈에서도 출퇴근을 했고 여기서도 출퇴근을 하고 있다.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다만 한국 선수들과 더 많이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좋고 단체 생활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신경쓰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자취라는 것을 하고 있다. 밖에 잘 나가지 않는 ‘집돌이’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가끔 누나의 가족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정도다.

누나와 교류를 많이 하는가.
누나와도 굉장히 친하고 매형과도 자주 어울린다. 누나 내외가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밥도 많이 사주면서 격려해줬고 좋은 곳이 있으면 매형과 같이 데려가서 재충전도 시켜줬다. 심지어 조카의 태몽을 내가 꾸기도 했다.

태몽을 꿨다고?
포르투갈에 있을 때 자다가 꿈을 꿨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바닷가에 우리 집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데 엄청나게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 호랑이가 우리 집을 한 바퀴 돌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호랑이가 크게 포효를 하더니 바닷가로 뛰어들어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꿈이 깼다. 일어나서도 무언가 잔상이 강하게 남았다.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이런 꿈을 꿨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도 “신기하다”라면서 “좋은 꿈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꿈을 꾸고 나서 일주일 뒤에 누나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보니 그것이 태몽이었다. 꿈을 꿨을 때는 “이거 좋은 일이 있으려나?”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좋은 일이 생겼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신기하다.

포르투갈에서 한 시즌을 마치고 휴가를 받아 한국에 갔을 때 처음으로 태어난 조카를 봤다. 그런데 첫 만남은 썩 훈훈하지는 않았다. 조카가 워낙 낯을 가려서 나를 보고 울더라. 하하. 그래도 난 조카를 사랑한다. 지금 조카가 보트 장난감을 갖고 싶어한다. 안양에서 열심히 해서 얼른 사줘야 한다.

그러려면 K리그2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야 한다.
첫 경기 때는 경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템포가 워낙 빨라서 힘들었다. 그나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것 같다. 조금씩 경기를 뛰니까 이제 좀 적응한 것 같다. 템포가 빠른 경기를 하니 내심 재밌기도 하다. 게다가 한동안 경기를 뛰지 못해서 경기에 나서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마무리가 안되서 참 걱정이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더 노력해야 하는데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올 시즌 안양이 부진해 마음 고생이 심할 것 같다.
항상 경기하기 전에는 무조건 이긴다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결과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이 때 이렇게 하면 안됐는데’라는 후회도 많이 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경기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매 경기에서 이기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겨야 하는 경기는 꼭 이겨서 좀 더 높은 순위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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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우리는 매주 새로운 경기를 앞두고 있다. 경기에서 졌다고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안된다. 지난 일은 뒤로 하고 눈 앞에 다가온 다음 경기를 위해 선수들끼리 계속 끈끈하게 뭉치고 있다. 고칠 것은 고치고 우리가 더 해야할 것은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 감독님께서 내게 체력적인 부분과 공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 또한 열심히 하고 있다. 아직 후반전에는 제대로 뛰지 못하는 것 같아 보강 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

나는 딱히 개인적인 목표가 없다. 경기에 많이 나가고 싶고 많은 경기에서 이겨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한 순위까지 들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목표는 힘들게 달성해야 더욱 달콤하다.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

본격적으로 관중이 많이 들어오면 안양이 더 힘을 받지 않을까.
동의한다. 안양 팬들의 열정이 유명한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안양에 오기 전 지난 시즌 영상을 많이 봤다. 특히 광주FC를 상대로 7-1로 이겼던 경기는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열기가 용암보다 더 뜨거웠다. 서포터스가 승리를 확신하면서 전광판을 향해 뒤돌아서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말 멋있게 봤고 내가 뛰면서 그런 장면이 또 나왔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축구팬들께 내 이름 석 자를 알리고 싶고 그들의 입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듣고 싶다. 열심히 하겠다. 팬들께 ‘복덩이 같은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 “이 선수는 꼭 같이 계속 데리고 가야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같은 팀에서 함께 하고 싶은 선수”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이제 프로에서도 제법 경력을 쌓은 황문기지만 K리그에서는 신인이다. 포르투갈에서 당차게 도전했던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또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도전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쉽지 않기에 더욱 더 가치있는 것이다. K리그에서 ‘복덩이’가 되려는 황문기와 지난 시즌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안양이 손을 맞잡았다. 함께 같은 꿈을 꾸고 있기에 앞으로가 기대된다.

wisdragon@sport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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