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잠실=전영민 기자] 김원민은 FC안양의 전설 중 한 명이다. 지난 2013년 창단 멤버로 FC안양에 합류한 김원민은 작년까지 안양에서 리그 117경기에 나서 13골 9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안양의 힘들었던 시절과 좋았던 시절을 모두 겪은 몇 안되는 선수다. 안양이 창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지난해에도 김원민은 중요한 고비마다 알토란 같은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안양의 선수단 명단에선 김원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포츠니어스>는 3일 서울 잠실에 위치한 한 축구교실에서 김원민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험난했던 프로 입성과 안양을 떠나게 된 이유까지. 2편에 걸쳐 김원민과 나눈 1시간 30분 동안의 대화를 소개한다.

반갑다. 안양을 나온 후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화성FC에 플레잉코치로 합류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는 바람에 2월 말부터 팀 훈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계속 집에만 있었다. 휴가 때도 이렇게 오래 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코로나19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같은 팀에서 뛰는 김동석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확산되는 바람에 팀에서 "빨리 화성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다들 화성에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결국 동석이 결혼식에는 감독님, 주장 등 몇 명만 갔다.

이후에 화성 숙소에서 격리 생활을 했다. 화성시와 이야기를 했는데 "단체 운동을 하면 안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결국 "운동도 하지 못하는데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다들 집으로 가라"는 결론이 나와서 팀에서 나왔다. 전지훈련을 통해 컨디션을 끌어올렸는데 이렇게 됐다. 경기 감각이 거의 다 떨어졌다. 몇몇 친한 친구들을 최근에 만나서 풋살 실업팀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했는데 확실히 우리 모두 컨디션이 안 올라와 있더라.

그렇다면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우선 어제 이사를 했다. 건대 근처에 살았는데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내가 원래 평소에 자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자고 싶을 때까지 자는 편이다. 10시간에서 12시간 정도를 잔다. 그렇게 자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곳에 와서 운동을 한다. 아니면 친동생이 보디빌더를 하고 있는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한다. 사람을 많이 못 만난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실 내가 고깃집도 한다. 나름 고깃집 사장인데 지금 상황이 이래서 고깃집에도 못 간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곳에서 운영 중인 팀에 대해 소개해달라.

내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이자 과거 전북에서 잠깐 뛰기도 했던 김태현이라는 형이 잠실주사랑FC라는 팀을 운영하고 있다. 그 팀이 쓰는 구장이다. 내가 축구를 그만두고 힘들었을 때 그 형도 같이 힘들었었다. 그때 많이 의지가 됐다. 내가 친형처럼 따르는 형이다. 처음에는 분당에서 작은 규모로 시작을 해서 키워나갔다. 이 근처에 유명한 축구 교실이 있는데 그 팀들에 아이들을 맡기신 어머님들도 다 이쪽으로 오려고 하신다. 여기가 2구장인데 근처에 1구장과 3구장이 있다. 이 형이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어머님들이 오시면 커피를 내드린다. 구장 옆에는 카페처럼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놨다. 일반인들한테 대관도 한다. 휴식기 때 이범영과 윤석영이 여기에 와서 공을 찼다고 들었다. 김영광 선수도 한 번 오셨다고 들었다. 나는 다른 곳을 안 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여기가 되게 넓은 거라고 하더라.

명함에 '사장 김원민'이라고 적혀있다.

태현이 형이 처음엔 이사로 등재를 해줬는데 이제는 사장으로 명함을 다시 파주셨다.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명함에 축구 클럽뿐 아니라 고깃집, 인테리어 회사, 해산물 가게도 운영한다고 나와있는데 어떻게 된 건가?

조개 무한리필 집인 '조개폭식'과 '인생고기', '신천집'이라는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 번씩 나가서 일을 하곤 한다. 언제는 한 번 고깃집에서 부천 팬을 만난 적이 있다. 부천이 안양 라이벌 아닌가. 일을 하고 있는데 나를 쳐다보시더라. 나를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축구선수 김원민입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분 회사가 잠실 근처인 것 같더라. 나중에 몇 번 더 동료분들이랑 회식을 와주셨다. 그래서 사진도 함께 찍고 서비스도 드리고 그랬다.

그래도 지분을 여러 군데에 투자할 정도면 제태크를 잘했나 보다.

그렇진 않다. 돈을 안 벌려고 한 거는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태현이 형을 믿고 고깃집에 투자를 했다. 좋은 사람들끼리 해보자고 해서 한 거다. 음식점들이 지금 다 힘들다. 내 명함에 카페랑 인테리어 회사도 한다고 나와있는데 그건 그냥 그 형이 하는 거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화성에서 플레잉코치로 뛰게 됐다.

원래 안양에서 나오고 축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많이 아쉽기도 했고 '안양 아닌 다른 팀에서 축구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K3리그 몇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저 축구 안 할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데 김학철 감독님과 연락이 닿았다. 내가 과거 공익 시절 포천시민축구단에서 뛸 때  김학철 감독님이 포천 감독님이셨다. 그래서 이후에도 연락을 몇 번씩 드리곤 했다.

감독님이 "플레잉코치를 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축구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인간적으로 내게 다가와 주시고 또 정을 주시니까 '몸은 괜찮은데 이렇게 끝내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도 "작년에 경기를 뛰지 못한 것도 아니고 거의 다 뛰었는데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셨다. 또 내가 지금 B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A급을 따기 위해선 코치 경력이 있어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돈을 떠나 화성을 선택하게 됐다.

지난 시즌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화성 선수단이 수준급이다.

이번에 선수 수급이 잘됐다. 최치원과 김레오 그리고 김현까지 합류했다. 플레잉코치로 함께하게 된 심우연 형도 있다. 내가 예전에 K3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다. 포천에서는 무패 우승도 했다. 오히려 프로에 있는 선수들보다 괜찮은 선수들이 K3리그에 많다. 다만 이제 발을 맞춰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안양에서 나오고 다른 K리그 팀들에선 연락이 없었나?

없었다. 알아보지도 않았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이틀 정도 후에 바로 B급 지도자 교육을 들어갔다. 거기서 운동을 3주 동안 해서 망가지지 않은 몸 상태로 화성에 합류했다.

포천 시절 무패 우승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때 K3리그에선 포천이 최강이었다. 2015년도에 포천으로 갔는데 사실 원래 그때는 포천이 아니라 화성으로 가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포천에서 연락이 왔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너만 오면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화성에 가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포천 감독님이셨던 인창수 감독님이 연락을 주셨다. 그리고선 감독님이 "너를 내셔널리그 시절부터 봤다. 너만 오면 끝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 끝에 포천으로 갔다. 결과적으론 잘 됐다. 2015년엔 무패 우승을 했고 2016년엔 한 번 지고 우승을 했다.

포천 시절 한 경기에서 16골을 넣은 적이 있다. 어떻게 된 건가?

당시에 서울 마르티스라는 팀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대다수고 선수 출신은 몇 명 없는 팀이었다. 그 팀이랑 경기를 하면 다른 팀들이 다 10-0 아니면 그 이상으로 이겼다.

마르티스가 우리 홈으로 원정을 온 날이었다. 그런데 다들 취미로 축구를 하시는 분들이니까 경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홉 명밖에 경기장에 오지 않으셨다. 늦으신 거다. 그래서 마르티스가 아홉 명인가 열 명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전반전에만 내가 열 골을 넣었다. 슈팅을 때리면 다 들어갔다. 코너킥이 올라와도 나한테 공이 왔다. 골 넣는 게 쉬웠다. 후반엔 마르티스 나머지 분들이 도착을 하셔서 마르티스도 11명으로 뛰었는데 후반엔 내가 여섯 골을 넣었다. 그래서 35-0인가로 이겼다. '그때 골을 더 넣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내가 지금 조기축구회에 나가도 16골은 못 넣겠다'는 생각도 한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쉬엄쉬엄해도 되었을 텐데 16골까지 넣은 이유가 있나?

다른 팀 선수들도 마르티스와 경기를 하면 몇 골씩을 넣고 그랬다. 그러다 보니 '우리 팀도 많이 넣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넣었다. 또 우리 팀에서 득점왕이 나와야 좋으니까 계속 골을 넣은 것도 있었다. 그때 마르티스 골키퍼가 일반인이었다. 선수 출신은 수비진에 한 명, 공격진에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있었다.

한 경기 16골을 넣었으니 당연히 그 시즌 득점왕에 올랐겠다.

아니다. 마르티스랑 한 시즌에 두 번씩 경기를 했는데 그 해에 마르티스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내가 골을 많이 넣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팀에 마르티스를 상대로 득점을 꾸준히 넣은 친구가 있더라. 그 친구가 득점왕에 오른 걸로 기억한다.

이젠 K3리그나 K4리그에서 당시처럼 일반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때만 해도 K3리그 우승은 거의 포천 아니면 화성의 차지였다. 하지만 이젠 통합된 K3리그엔 내셔널리그 팀들도 참가한다. 또 연봉 계약도 한다. 그래도 아직 확실히 프로에 비해선 열악하긴 하다.

프로에 오기까지 많이 돌아왔다.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K리그 팀들 드래프트 순위에 네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안됐다. '축구가 내 길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테스트라도 받아보자'해서 대전 공개테스트를 갔다. 경기력도 괜찮았고 내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길래 선택받았나 했는데 발목 부상을 당하며 물거품이 됐다. 그래도 어떻게든 프로가 되고 싶어서 부산아이파크에 공개테스트를 보러 갔다. 당시 부산 감독님이 황선홍 감독님이셨는데 날 좋게 봐주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또 안됐다. 그래서 1년을 쉬었다.

쉬는 동안 집에서 러닝을 뛰고 조기축구팀에 가서 축구를 했다. 내가 그렇게 지내고 있는 걸 보면서 황선홍 감독님이 "2군에 와서 몸을 만들어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산으로 갔는데 아무래도 쉬다가 경기를 뛰니깐 자신감이 없었다. 다른 선수들과 실력 차이도 엄청 났다. 형들도 "너 왜 그래. 이런 애 아니잖아"라고 했다. 2군 코치님으로부터 "너가 어떻게 건대를 갔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숙소 생활을 하며 부산 2군에서 뛰다가 10월에 나왔다. 갈 팀이 없었다.

다시 혼자 운동을 하다가 김해시청 테스트를 보러 갔다. 동아대학교와의 경기였는데 전반에 선발로 나갔다. 우리가 전반에만 세 골을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반 종료 후에 "옆에 가서 숏게임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뛰어서 보여줘도 될까 말까인데… 아 오늘도 안됐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계약을 하자"고 하셔서 그렇게 김해에서 뛰게 됐다.

김해에서의 활약은 어땠나?

시즌 개막 1주일 전에 "공격수로 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감독님께 "나도 죽고 팀도 죽는 길이다"고 말씀드렸다. 처음엔 허둥지둥댔다. 그러다가 8골 10도움으로 시즌을 끝내서 내셔널리그 베스트11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에 나이도 어렸고 활약도 좋아서 프로에서 오라는 팀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또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게 두려웠다. '내가 프로에 가서 잘할 수 있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내셔널리그 거의 모든 팀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프로 팀을 선택하지 않고 고양국민은행으로 갔다.

이우형 감독님이 내셔널리그 시상식 전에 전화를 주셨다. "집이 서울인데 일산과 가깝지 않냐"고 하셨다. 시상식 때 감독님을 만나 뵙고 결국 국민은행으로 가게 됐다. 당시에 국민은행이 전력이 좋았다. 내가 들어갔을 때 정규리그에서 1패하고 우승을 했다. 거의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잘한다는 경주한수원도 6-0으로 이겼다. 연봉도 괜찮았고 대우도 좋았다. 은행팀이다 보니까 회식도 많이 했다. 소고기나 비타민처럼 좋은 음식을 많이 먹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흥미로운 이야기다. 잠깐 축구 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보고 싶다. 석사 학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생활을 병행했다. 논문도 썼다. 원래 대학원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민은행 시절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건국대학교 대학원을 알아봤는데 쉽지 않다고 해서 다른 곳을 찾아봤다. 그때 경기대학교에서 추가모집으로 대학원생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호남대학교 원서를 취소하고 경기대로 갔다. 일산에서 경기대까지 오고 가며 2학기를 보냈다. 국민은행이 좋은 게 선수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면 등록금 반을 대줬다. 그때 등록금이 500만원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교생 생활도 했나?

그렇다. 2013년도에 안양공고에서 했다. 애들한테 축구를 많이 가르쳐줬다. 확실히 고등학생 애들은 슈팅 때리는 걸 좋아한다. 슈팅하는 법을 알려주고 경기도 같이 뛰면서 놀았다. 교생을 진짜 재밌게 했다. 그땐 안양에서 뛸 때였는데 오전엔 교생 생활을 하고 오후에는 팀 훈련을 했다. 안양공고에서도 많이 배려해 주셨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역시 학생들은 공 갖고 노는 걸 좋아한다.

반 애들이랑 친해졌다. 당시 애들이 고2였다. 지금도 가끔 연락한다. 애들이 안양종합운동장에도 가끔 왔다. 나중에 25명 아이들 전부한테 편지를 다 써줬다. 아이들이 "고마웠다"고 하더라. 너무 재밌었다. 매일 아침 일찍 학교로 출근했다. 당시에 지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출근하자마자 애들한테 전화해서 "빨리 학교로 와라. 선생님이랑 놀고 수업도 듣자"고 했다. 학교에서 말하길 "이런 교생이 없었다"고 하더라. 아이들도 "선생님이 담임을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애들한테 밥도 많이 사줬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롱 스로인 능력이 매우 좋다. 비결이 뭔가?

원래 어깨 힘이 좋았다. 대학교 때부터 스로인을 던졌다. 허리 힘도 많이 쓴다. 사실 대학교 1학년을 쉬기로 하고 건대에 입학했다. 그 1년 동안 살도 찌우고 키도 키우려고 했다. 어쨌든 건대에 들어가서 스로인을 한 번 던졌는데 멀리 나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스로인을 던지게 됐다. 던지다 보니 요령도 쌓였다. 건대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한 번은 투수들이 던지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져봤다. 120km가 나왔다. 야구부 애들이 "너 왜 축구했냐"고 했다. 내가 손으로 하는 운동을 좋아한다. 야구부 친구들이 "넌 종목을 잘못 선택했다"라고 했다.

스로인으로 어시스트를 한 적도 있나?

있다. 대학교 때는 스로인으로 골도 넣었다. 스로인을 던졌는데 우리 공격수와 상대 골키퍼가 경합하다가 골키퍼 손에 맞고 그대로 골이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대학교 때 세 골을 넣었다. 내셔널리그에서 뛸 때도 스로인으로 도움을 했다. K리그에선 도움까진 아니고 스로인으로 득점 기점이 된 적은 있었다. 좋은 옵션인 것 같다. 나도 주위에 "스로인 하나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스로인으로 도움을 해도 수당을 따로 받나?

그런 적은 없었다. 계약서에 따로 조항을 넣을 걸 그랬다. 그 생각을 못했다.

(2편에 계속)

henry412@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