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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전영민 기자] 지난 시즌 막판 돌풍을 일으키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던 부천FC1995는 올 시즌 한 단계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본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수비진을 이끌었던 닐손주니어가 이탈하며 큰 공백이 발생했다. 이후 송선호 감독은 고심 끝에 닐손주니어의 대체자로 34세의 베테랑 수비수 윤신영을 선택했다. <스포츠니어스>는 19일 오후 정들었던 대전을 떠나 부천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 윤신영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갑다. 시즌 개막이 미뤄졌는데 컨디션은 좀 어떤가?

시즌 개막에 맞춰 동계훈련을 했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다. 그런데 시즌이 미뤄졌다. 그래도 토요일마다 연습경기를 하면서 시즌 개막에 대비해 운동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컨디션이 다들 괜찮은 것 같다.

운동 강도는 어느 정도로 하고 있나?

시즌 들어갔을 때처럼 하고 있다. 토요일에 연습경기를 하기 때문에 화요일 수요일은 강한 훈련을 했다가 목요일 금요일에는 조금 약하게 한 다음 토요일에 경기를 하고 이후엔 회복을 하는 방식이다.

부천 수비진에 타 팀에서 온 선수들이 많다. 호흡은 좀 어떤가?

나도 호흡에 대해 걱정을 했는데 막상 태국과 남해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보니까 생각보다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내가 1월에 팀에 왔다. 두 달이 조금 넘었다. 부천은 선수들끼리 단합이 더 잘되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부천이라는 팀이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아직 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아서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단합이 잘된다. 선수들끼리도 소통을 많이 한다.

부천에 오기 전에 부천이 항상 까다로운 팀이라 생각했었다. 껄끄러운 팀이었다. 투쟁심이 강한 팀이고 선수들이 끝까지 하는 팀이었다. 또 부천 선수들이 이기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 보니까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송선호 감독과 함께하게 됐다.

그간 함께해본 감독님 중 송선호 감독님이 제일 열정이 넘치시는 것 같다. 송선호 감독님은 항상 선수들과 같이 뛰어다니시고 소리치신다. 굉장히 열정적이시다. 만약에 원래 정해진 운동 시간이 1시간이었는데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1시간 30분으로 훈련이 늘어나기도 한다.

송선호 감독이 태국에서 강한 훈련을 시켰다고 들었다.

내가 올해 프로 12년 차다. 이번 동계 때 운동을 진짜 많이 했다. 태국 전지훈련에선 내가 여태껏 축구를 하면서 운동을 제일 많이 했던 것 같다. 태국에선 거의 체력 운동 위주였다. 오전에 체력 운동 오후에는 공을 가지고 하는 훈련 저녁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그런데 웨이트 트레이닝도 자율적인 게 아니라 서킷 트레이닝 방식으로 시간에 맞춰서 했다. 진짜 힘들었다. 정말 태국에서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운동을 하지 않다가 태국에서 합류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태국에 갔는데 처음부터 훈련 강도를 강하게 했다. 다른 선수들은 태국에 가기 전부터 모여서 운동을 했다고 들었다. 물론 태국 가기 전 훈련에서는 몸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서 운동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들었다. 어쨌든 이번 동계 때 한 훈련량은 내가 프로 생활 12년 동안 한 것 중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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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부천으로 이적하게 된 과정을 말해줄 수 있나?

대전이 시민구단에서 기업구단으로 전환되면서 팀이 리빌딩이 됐다. 감독님도 바뀌었다. 감독은 본인이 원하는 색깔에 맞는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전과 조금 생각이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떤 선수든 겪을 수 있는 과정이다. 마침 그 시기에 송선호 감독님이 나를 불러주셨다. 그래서 부천으로 팀을 옮기게 됐다.

대전에서 오랜 시간 있었다.(2009~2009.11 /2015.01~2016.02/2017.02~2020.01)

데뷔한 팀이 대전이었다. 이후에도 이적할 때마다 대전을 가야지라고 마음 먹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감독님들이 바뀌실 때마다 나를 찾아주셨다. 그렇게 대전에서 세 번을 뛰었다. 지금도 집은 대전이다. 아내와 아기가 대전 집에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부천에 따로 나와 집을 구해 사는 중이다. 대전을 떠나게 되어 많이 섭섭했다. 솔직히 대전이라는 팀을 떠나 슬픈 부분도 있었지만 대전이라는 도시에 정이 많이 들었다. 대전이 집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섭섭하다.

지금은 그래도 아내와 아기가 부천에 잠시 올라와 있어서 같이 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조금 그렇고 나머지는 불편한 건 없는 것 같다. 경기할 때 빼고는 부천에 와본 것이 처음이다. 듣기론 굉장히 작은 도시지만 인구밀도가 전국 1위라고 들었다. 차도 굉장히 많다. 반면에 대전은 널널하다. 대전은 교통 체증도 심하지 않았다.

팀에서 어느덧 최고참이 되었다.

그렇다. 항상 선배들이 위에 한두 명 있곤 했는데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처음이다. 수비 라인에 있는 후배들도 내게 많은 걸 물어본다. 후배들이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책임감이 생기고 나도 아는 선에서 가르쳐주려고 하는 편이다.

후배들한테 말을 많이 하는 편인가 보다.

선수들의 사기나 투쟁심이 떨어지는 게 보이거나 혹은 정신적으로 해이한 모습이 보인다고 할 때는 선수들 전체를 모아놓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전해줄 필요가 있는 이야기는 따로 만나 한다. 왜냐하면 선수들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사건건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진짜 말을 해야 하는 건 말을 하고 웬만하면 지켜보는 스타일인 것 같다.

1980년대 중후반 출신 선수들이 점차 K리그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내 동기들이나 친구들을 봐도 이제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이 없다. 내 비슷한 또래 선수들이 이제 K리그에 별로 없더라. 이런 점들을 보며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나이가 있으면 K리그에서 살아남기가 옛날보다 더 힘들어진 것 같다. 옛날에는 팀에 노장이 몇 명씩 있었는데 요즘에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농담이긴 하지만 U-22 의무 출전 룰처럼 U-33 룰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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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싸커 대표팀으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

그렇다. 대학생 때 비치싸커 대표팀 1기로 활동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故 박말봉 감독님이 팀을 이끄실 때였다. 그때 비치싸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유튜브를 찾아보면서 운동하고 그랬다. 경기 룰도 유튜브를 보면서 배웠다.

비치싸커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해달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5대5로 했던 것 같다. 모래에서 뛰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딱딱한 모래가 아니라 깊은 모래였다. 4쿼터까지 경기가 있었는데 교체 가능한 인원이 무제한이었다. 모래에서 하다 보니 드리블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슈팅을 때리곤 했다.

당시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아시안비치게임이 있었다. 아시안게임이 아니라 해변에서 하는 종목만으로 구성된 아시안비치게임이라고 따로 있었다. 그때 우리가 첫 출전을 했는데 4위를 했다. 중국도 꺾었다. 장난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성적이 목표가 아니라 참가에 목적을 뒀다. 잘하는 외국 선수들은 진짜 잘하더라.

혹시 아시안비치게임도 금메달을 따면 병역혜택이 있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금메달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가 첫 번째 출전이었고 비치싸커를 해본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축구를 하는 것처럼 비치싸커를 했다. 나는 그때 공격수였는데 다섯 골을 넣었다. 어렸을 때라 슈팅 힘이 좋아서 옆에서 크로스를 올리면 슈팅을 때리고 그랬다. 거기선 기술이 필요없다. 처음하는 사람들은 힘으로 한다. 피지컬로 상대를 누르고 다섯 골 넣었던 기억이 난다.

좋은 추억이었다. 그때 같이 발리 아시안비치게임에 나갔던 골키퍼가 옛날에 제주에서 뛰었던 박준혁이다. 그 친구가 대회 내내 잘 막았다. 승부차기에서 박준혁이 막아서 다음 라운드에 올라간 적도 있다. 한 가지 또 말하자면 비치싸커는 그냥 맨발로 한다. 발바닥이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비치싸커라는 종목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20살 21살 때였으니까 벌써 13년 된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비치싸커를 종종 했나?

그 이후론 한 번도 안 해봤다. 할 기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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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리그를 모두 거친 경력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국 장쑤에서 뛰었다. 내가 갔을 때가 중국리그가 막 돈을 쓰기 시작할 때였다. 데얀과 같이 장쑤로 넘어갔다. 28살 때였는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중국을 갔다. 그런데 정말 힘들더라. 외국에서 산다는 게 여행 가는 것과는 다르게 진짜 힘들었다. 생활뿐 아니라 중국 음식 문화 모두 힘들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점 역시 힘들었다. 처음엔 엄청 힘들었다.

그래도 데얀이 있었다. 그때 데얀이랑 베프였다. 내 아내랑 데얀의 아내도 중국에 있었다. 운동 끝나면 함께 밥도 먹으러 가고 같이 쉬면서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데얀과 한국 식당도 가고 스테이크도 먹으러 가고 초밥도 먹고 했다.

중국 선수들은 좀 어땠나?

중국 선수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전술 같은 면도 조직력을 중시한다기 보다는 개인 기량에 의존하는 게 많았다. 감독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있을 때는 그랬다. 전술이라고 할 게 없었다. 그때 분위기는 좋은 외국인 선수랑 중국 대표팀 선수들 데리고 와서 축구 하는 그거 자체가 전술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 어린 선수들이 친해지려고 먼저 다가왔다. 외국인을 신기하게 보는 것 같았다. 같이 한국 식당을 가자고 중국인 선수들이 많이 했다.

중국 팀들의 승리 수당이 세다고 들었다.

사실이다. 금전적으로는 아마 세계 최고이지 않을까 싶다. 보너스나 수당이 확실히 세다.

일본에도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반대다. 선수들이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일본 애들은 텃세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일본 애들에게 "밥 먹자"고 하면서 다가갔다. 팀에 융화가 되야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중국에서 깨달았다. 선수들이랑 친해져야 편하다는 걸 깨달아서 "밥 먹으러 가자"고 많이 했다. 일본은 전술적인 면이 확실히 강하다. 중국과 일본은 완전 반대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중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과거 홍정호를 향한 태클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괜찮다. 그때가 2012년이었으니 8년이 됐다. 그날 이후 홍정호 선수한테 연락을 했는데 전화 통화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던 기억이 난다. 그날 경기 후 욕을 엄청 많이 먹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과 '윤신영 살인태클'이 올라왔다. 그때는 트위터가 한창 유행할 땐데 살면서 받을 메시지를 그날 트위터를 통해 다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일부러 한 것이 아니었다. 고의가 아니었다.

홍정호 선수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 당시에 올림픽 대표팀이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고 홍정호 선수가 주장이었다. 젊은 선수였고 팀에서 가장 필요한 선수였는데 엄청 미안했다. 나도 같은 축구선수로서 부상을 당하면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 정말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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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홍정호와 경기장에서 만난 적은 있나?

아직까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경남에 있다가 중국으로 갔고 홍정호 선수는 독일에 오래 있다가 공교롭게도 내가 뛰었던 장쑤로 이적했다. 그 이후에 나는 대전에서 뛰었는데 대전이 K리그2였으니까 아직 만난 적이 없다. 홍정호 선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 홍정호 선수 입장에선 정말 화가 났을 것이다. 홍정호 선수는 내가 아직도 싫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

올 시즌 K리그2가 정말 치열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팀은 지지 않겠다는 끈끈함이 강하다. 선수들이 열심히 한다. 많은 팀을 돌아다니고 오랜 기간 프로 무대에서 있었지만 부천 선수들이 그런 점이 특히 강하다고 생각한다. 한 발 더 뛰는 모습도 있다.

오는 5월 5일 부천과 제주의 경기가 있다.

부천과 제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천에 오기 전에도 두 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 팬들이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감독님도 제주와의 경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원래 3월에 제주와 원정 경기가 있었다. SNS를 봤는데 "제주한테 지면 제주도에서 수영해서 부천까지 와라"라고 하는 팬들의 말씀이 엄청 많더라. 제주랑 할 때는 사실상 결승전이라고 생각하고 뛰어야 한다. 분위기가 그렇게 잡혀있다. 제주한테는 패배할 수 없다. 원래부터 부천에 있던 선수들도 "제주한테 지면 죽어요 형"이라고 말하더라.

올 시즌 목표가 있나?

개인적인 목표는 부상을 당하지 않고 시즌을 끝까지 보내는 것이다. 34살이 되다 보니까 지금 부상을 당하거나 하면 사실상 거의 은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축구에 대한 꿈이 있다. 내 딸이 아빠가 축구선수였다는 모습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내가 1~2년은 더 해야 한다.

팀 목표는 승격이 목표다. 어떤 팀이든 마찬가지일 듯 하다. 팀에서 최고참이니까 감독님이 원하시는 축구를 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도와서 단단한 팀을 만들고 싶다. 시즌이 끝날 때쯤에 "부천 수비가 견고하다"는 뉴스가 많이 올라오게 하고 싶다.

부천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절대 작년보다 못한 경기력이나 못한 모습은 보여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항상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있다. 경기장에 많이 찾아주시고 응원을 해주시면 보답해드리겠다. 경기장에서 쓴소리보다는 자상한 말씀을 많이 해주시면 좋겠다. 부천이란 팀이 정말 색깔이 있고 끈끈한 팀이라는 걸 보여드릴 테니까 지켜봐 달라.

11년의 긴 프로 시절 동안 윤신영은 그리 빛나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부천 이적과 동시에 팀의 최고참이 된 윤신영은 자신의 프로 12번째 시즌을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아빠가 축구선수라는 것을 딸이 알게 하고 싶어 아직 더 많이 뛰어야 한다는 윤신영. 그가 부천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길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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