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임완섭이 말하는 선수 시절부터 감독까지 ‘솔직 토크’


<스포츠니어스>가 인천유나이티드 임완섭 감독을 직접 만났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남해=김현회 기자] 임완섭 감독은 K리그에서 이번 비시즌 동안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지도자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은 아니지만 묵묵히 성과를 낸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안산경찰청과 경남FC 수석코치로 K리그2 우승을 두 번이나 공헌한 그는 지난 시즌에는 열악한 환경의 안산그리너스 감독으로도 5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이후 안산에서 사퇴한 그가 어느 팀으로 갈까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임완섭 감독은 경남FC 사령탑 부임이 확정적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인천유나이티드였다. 인천은 췌장암 투병으로 지휘봉을 내려 놓은 유상철 감독 후임으로 임완섭 감독을 선임했다. 늘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던 그는 이제 K리그에서도 가장 많은 스토리를 쌓아가고 있는 열정적인 팀으로 향하게 됐다. 이제는 인천유나이티드 수장이 된 임완섭 감독을 전지훈련지인 경남 남해에서 직접 만났다.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간 임완섭’에 관한 이야기부터 팀을 이끄는 고민까지 솔직한 이야기가 가득 담겼다.

임완섭 감독은 비시즌 동안 거취가 가장 주목받았던 지도자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반갑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이제 감독으로 부임한지 막 일주일이 됐다. 선수들 이름을 외우는 중이다. 선수들과 빨리 친해지려면 이게 가장 중요하다. K리그에서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어지간한 선수들 이름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몇몇은 아직 생소하다. 이름뿐 아니라 선수들의 성격도 파악해야 한다.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어떤 습관이 있는지 그 패턴도 알아야 한다. 나도 아는 선수라고 생각했지만 TV를 통해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것과는 다를 때가 많다.

그래서 이름은 다 외웠나.
사실 좀 헷갈리는 선수들이 있긴 하다. 신장도 비슷하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선수들이 좀 있다. 여기 남해에 28명의 선수단이 와 있다. 신인들과 부상 선수는 아직 인천에 남아 있다. 내가 감독으로 선임된 다음 날 오전 8시에 선수단과 상견례를 하고 곧바로 남해로 출발했다. 인천에 남아 있는 선수들은 아직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인천에 올라가면 또 서로 서로 알아갈 것이다.

인천 감독 부임 소식이 갑자기 전해졌다. 지난 12월 안산에서 감독직을 그만둔 뒤로는 어떻게 지냈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행 겸 태국에 가서 U-22 경기를 봤다. 요르단전과 호주전을 현지에서 직접 지켜봤다. 요르단과의 경기는 오래 전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는 정정용 감독과 함께 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와 브라질 연수를 떠나려고 준비 중이었다. 브라질 삼바 축제 기간이 끝나는 21일에 브라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마쳐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인천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감독직을 수락하게 됐다.

지도자로는 최근 들어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현역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평범한 선수였다. 미드필드와 사이드백이 주 포지션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U-17 대표팀에도 줄곧 뽑혔다. 그때 나하고 같이 미드필드를 봤던 친구가 바로 김병수 감독이다. 왼쪽 윙포워드에는 신태용 감독이 있었고 오른쪽 날개에는 서정원 감독이 있었다. 우리보다 한 살 어린 노정윤이 쉐도우 스트라이커였다. 골키퍼는 지금 수원삼성 골키퍼 코치로 있는 김봉수가 맡았다. 그때는 나도 공 좀 찼다.

동료들의 이름을 들어보니 어린 시절 촉망 받던 선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당신이 언급했던 선수들의 나이가 다 다르다. 어떻게 된 건가.
당시 상황을 아는 이들도 많을 거다. 1980년대 이야기니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가. 사실 나이를 조금씩 줄였다. 세계대회에 나가야 한다고 나이를 속일 때였다. 신태용 감독은 고향인 경북 영덕에 가서 한 살을 줄여서 돌아왔다. 다른 선수들도 어딜 갔다가 오면 한 살씩 줄어서 오더라. 다들 1969년생인데 그렇게 1970년생이 됐다. 1970년 8월 이후 출생자들에게 세계 청소년대회 출전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그대 전북 남원으로 가서 나이를 줄였다.

남원에 무슨 연고가 있었나.
남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우리 스승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갔다가 호적을 고쳤다. 그때 그쪽 높으신 분이 “국가를 위해 하는 거니 해준다”고 하면서 호적을 바꿔줬다. 나름대로 골밀도를 측정하는 엑스레이도 찍고 절차는 다 밟았다. 당시 김병수 감독과 신태용, 서정원 감독은 한 살을 줄여 1970년생이 됐는데 나는 감독님께서 “이왕 줄이는 거 두 살 줄이라”고 해서 1971년생이 됐다.

정말 이제야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내 호적상 생일이 1971년 8월 15일이다. 그것도 그때 남원의 높으신 분이 “그래. 광복절 좋다. 8월 15일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 내 원래 생일은 1969년 7월인데 이때부터 1971년 8월 15일생이 된 거다. 그러다보니 대학교 때도 두 살 밑에 동생들과 같이 청소년 대표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두 살 밑에 동생들이 바로 유상철, 이임생, 故조진호 감독이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족보 정리는 잘 됐나. 난감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끼리는 서로 이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다들 호적상의 나이가 아닌 실제 학번을 알고 있었고 당연히 나에게 형 대우를 해줬다. 그리고 유상철 감독이 경신고 1학년 때 경신고 3학년에 내 친구 (김)병수가 있었다. 내가 병수하고 친구인데 상철이하고도 친구를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 잘 정리가 됐다.

하지만 당신은 이후 현역 생활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허리 디스크로 한 1년을 고생했다. 그 질병으로 군대까지 면제받을 정도였으니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신체 기능이 30%가량 떨어졌다. 그때는 재활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물리치료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찜질하고 뛰는 게 전부였다.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노력은 했고 지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몸이 안 따라줬다. 그래서 프로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실업팀인 국민은행에 가게 된 거였나.
그렇다. 당시 실업 축구에서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최강 팀이었다. 여기에서 팀이 IMF로 해체될 때까지 쭉 선수 생활을 했다. 팀이 해체될 당시에는 내 나이가 서른 가까이 됐고 축구선수로 더 도전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현역 생활을 그만두고 은행 근무를 시작했다. 넥타이 매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2년 동안이나 했다.

정말인가. 몰랐던 사실이다.
안산시 선부동 지점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은행에서 돈만 셌다.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지점에서도 일을 주지 않더라. 돈 한 뭉치를 준 다음 “저쪽 구석에 가서 돈 세는 연습만 하라”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구석에서 돈 세는 연습만 했다. 지점에서는 그냥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인 직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고 객장에 나가서 인사만 했다. 손님이 오면 “어서오세요”라고 크게 인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김학범 감독도 은행원 출신이다. 비슷한 게 많은 것 같다.
나하고 김학범 감독하고 가까운 사이다. 김학범 감독은 축구를 그만두고 국민은행에서 대리를 달고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코치로 온 거였고 내가 그때 그 팀 선수였다. 그러다가 팀이 해체된 뒤에 김학범 코치는 함흥철 선생님을 따라서 일화로 갔다. 같은 금융맨이었다.

축구만 해오던 당신에게 은행 업무가 힘들지는 않았나.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인사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지점에서 나를 좋게 봐주셨다. 창구에서 출납 업무도 할 수 있었고 ATM에 돈이 떨어지면 돈 집어넣는 일도 했다. 그러다가 한 6개월 정도 지나고 나서는 지점장님이 나를 좋게 보셔서 2층에서 아파트 담보대출 업무를 맡았다.

축구감독인 당신 입에서 아파트 담보대출 이야기가 나오니 뭔가 생소하다.
그때는 아파트 담보 대출을 80%까지 해줬다. “등기부등본 가지고 오세요”라고 해서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보고 대출을 해주는 업무를 했다. 그런데 돈 개념이 없는 사람이 숫자를 끼고 사려니까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 2년이 지나니까 정말 몸이 아파왔다. 일을 잘 몰라 매일 7시 반에 출근해서 일 준비하고 퇴근 후에도 남아서 일을 배웠다.

직급이 뭐였나.
계장이었다.

국민은행 안산시 성부동 지점 임계장님이 이렇게 프로팀 감독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지금가지 계속 일을 했다면 지점장이나 부지점장을 할 나이다. 얼마 전에 한 번 찾아봤더니 그쪽도 연봉이 세더라.

그래도 프로 감독보다도 연봉이 세지는 않을 것 같다.
감독도 감독 나름이다.

그러면 지금도 국민은행만 이용하나.
그렇다. 다른 은행 계좌는 따로 없다. 지금까지 오로지 KB국민은행만 썼다.

신한은행이 인천유나이티드 후원사다. 아마 인천 월급도 신한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들어오지 않을까.
아직 감독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아서 첫 월급을 못 받아봤다. 신한은행 계좌가 필요하다고 하면 만들 것이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난 뒤 고민 끝에 다시 축구로 돌아오게 됐다. 축구계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축구인들과 통화를 자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2년 동안이나 하는 걸 보면서 집 사람도 같이 힘들어했다. 오죽하면 내가 “이제 다시 축구 쪽으로 가보고 싶다”고 하니까 군말 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원래부터 지도자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허리 디스크 이후 몸이 워낙 좋지 않은데 선수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아예 그 꿈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운동을 그만두니까 허리도 좋아지더라. 주변에 지도자 생활을 하는 선배들이 있어서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본격적으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이후 국민은행과 FC안양 사령탑을 맞았던 이우형 감독과 내가 잘 알고 지낸다. 당시 이우형 감독이 브라질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와서 진지하게 그 분과 논의를 했다. 이우형 감독이 브라질 연수를 잘 소개해줬고 그렇게 연수 후에 한양공고에서 코치를 시작하게 됐다.

다시 돌아온 후의 기분은 어땠나.
확실히 땀 흘리면서 일해야 한다는 걸 느끼게 됐다. 역시 운동장이 나의 일터라고 생각했다. 축구를 하면서 전국을 다 돌아다니다가 사무실에만 있으려니 너무 힘들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브라질에 가 6개월 배웠다고 지도자로서 얼마나 배웠겠나. 그래도 새로운 축구 문화를 우리 어린 선수들이 즐겁게 접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더 공부하게 되더라. 해변이나 길거리에서 맨발로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즐기는 축구를 새로 접하게 됐다.

당신에게 브라질에서의 축구 연수는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브라질 프로팀의 훈련을 참관하면서 깜짝 놀랐다. 시합이 코앞인데 선수단의 표정이 엄청 밝은 거다. 선수가 감독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저하지 않고 반박 의견을 내기도 하고 활발히 소통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즐긴다고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할 건 다 하더라. 그런 분위기를 접하면서 지도 철학을 잡게 됐다.

이후 지도자로서의 이력은 어땠나.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한양공고 코치를 하다가 전주해성중학교를 거쳐 한양중학교 감독으로 옮긴 뒤 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울산현대에 있다가 상주상무로 간 왼발잡이 이명재가 당시 제자다. 그 다음에 2011년 유상철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유상철 감독이 대전시티즌에 부임한 이후 나에게 전화를 해 왔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한 번 해보시죠. 형님”이라고 해서 뜻을 같이 하게 됐다. 그렇게 유상철 감독이 이끄는 대전시티즌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안산무궁화와 경남FC에서 수석코치를 지냈다.

안산과 경남 시절 두 번이나 K리그2 우승을 경험한 지도자다. 비결이 있을 것 같다.
당시 성적에 좋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그땐 시즌 돌입 전에 부상자가 없었다. 최고의 선수들이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시즌 중반까지도 마찬가지였고 혹시라도 부상자가 나오면 그걸 보완해 줄 수 있는 백업 선수들이 있었다. 경남에서는 믿었던 선수들이 경기에 나갈 수 없을 때 배기종이 그런 역할을 잘 해줬다. 또한 한 시즌을 준비할 때는 한 자리에 보통 두 명 이상의 선수를 놓고 경쟁하는데 한 명이 부상을 당하면 또 다른 선수가 그 자리를 잘 메워줬다. 누군가 다치면 항상 누군가 준비하고 있다가 그 자리를 채워주는 팀이 좋은 성적이 나오더라.

그런 좋은 경험을 인천에서 녹여낸다면 성적이 나올 것 같다.
물론이다. 해외에서는 교체 선수가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드물 수 있어도 국내 무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비기는 경기를 이기고 지는 경기를 비기는 건 교체 선수의 역량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인천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안산 그리너스

안산그리너스에서 지난 시즌 5위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당신은 시즌이 끝난 뒤 갑자기 팀을 떠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민감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내 계약이 올해 9월까지였는데 미래가 불투명했다. 새로운 감독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스스로 사퇴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떠난 팀이지만 안산은 이후에도 많은 선수들이 빠져 나가면서 위태로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플 것 같다.
안산이 많은 선수들을 떠나보냈다는 건 전임 감독으로서 아쉽다. 인천에 올 줄 알았다면 내가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여기오니 안산에서 함께 했던 김연수가 와 있더라. 만나서 반가웠다. 김연수는 내가 인천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먼저 전화도 하더라.

김연수가 사회생활을 잘 하는 모양이다.
그런 거 같다. 그런데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자면 내가 인천에 온 것과 김연수가 인천에 온 건 관계가 없다. 김연수가 먼저 이 팀에 와 있었고 내가 이후에 인천과 계약한 거다.

인천 감독 부임 전에 경남FC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도 파다했다.
사실 경남도지사님과 미팅까지 마무리했고 경남 구단에서도 계약 이후 다음 단계를 준비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틀어졌다. 이유는 아마 도지사님이 아시지 않을까. 사실 그때까지도 안산과는 작별한 상황이 아니어서 그냥 계속 안산에 남아 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안산에서 버티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남에서 잘 안 된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안산에 사표를 냈다.

안산이나 경남 등 K리그2 팀이 아니라 K리그1 팀을 맡게 됐다. 따지고 보면 감독으로서는 더 좋은 기회를 얻은 것 아닌가.
안산에서 물러난 뒤 많은 생각을 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내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으려 한 건 아닌지 돌아봤다. 다 털어버리고 브라질로 가 축구 연수를 하려던 상황에서 인천에서 연락이 왔다. 지도자로서는 성적도 잘 냈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사실 인천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1부리그 팀인 인천에서 바라는 감독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인천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브라질행을 마음 편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인천에서 연락이 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
2월 3일 이천수 전력강화실장의 연락을 받고 첫 미팅을 가진 뒤 다음날 전달수 대표이사를 만나고 6일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천수 전력강화실장과 전달수 대표이사 모두 인천이 최근 3~4년 동안 강등 문턱을 오갔는데 그보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팀이 됐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목표와 생각이 잘 맞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다음 날 오전 8시에 선수단과 상견례를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왔다.

무직이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프로팀 감독이 됐다. 축하한다.
고맙다. 딸들이 농담 삼아 ‘아빠가 백수에서 탈출했다’고 기뻐하더라.

ⓒ 인천유나이티드 제공

이제 인천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이 인천과 1년 단기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좀 의아하다. 더 장기계약을 맺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계약기간에 연연하지 않는다. 2~3년 계약을 하더라도 내가 올해 인천에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면 팀을 떠나야 한다. 지도자 생활은 계약기간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올 시즌 내가 어떻게 팀을 꾸려갔느냐에 따라서 내년을 또 기약할 수 있다. 이게 감독의 운명이기 때문에 서운한 건 없다.

당신이 축구계에 몸담으면서 바라봤던 인천은 어떤 모습이었나.
지난 해에도 인천 홈 경기장을 세 번이나 찾았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집에서 가까워서 자주 들러 경기를 관전했다. 유상철 감독을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다. 경기장에 올 때마다 늘 팬들의 대단한 열정을 느꼈다. 전북현대나 FC서울 못지 않은 홈 경기장 분위기가 멋졌다. 이런 열정을 가진 팬들과 함께한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인천 감독이 돼 바라보는 팀은 어떤가. 이제는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
수비를 탄탄하게 하고 싶다. 스리백과 포백을 병행해서 쓸 것이다. 1차 태국 동계훈련 때부터 코칭스태프가 스리백을 대비한 훈련을 많이 했더라. 갑자기 포백으로 바꾸면 혼란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틀을 유지하면서 적절한 변화를 모색해보려 한다. 골을 많이 넣는 화끈한 공격축구는 어려울 수 있어도 이기는 축구를 하고 싶다. 점유율과 슈팅수가 아닌 승점을 따내는 경기를 추구할 것이다.

‘사고뭉치’ 빈치씽코를 활용했던 감독으로서 케힌데의 장점을 극대화할 방안에 기대를 거는 이들도 많다.
둘이 비슷한 성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빈치씽코는 경기장에서 더 욱하는 성격이 있는데 케힌데는 그렇지 않다. 피지컬만 비슷할 뿐 성향은 다르다. 빈치씽코는 전형적인 왼발잡이 스타일이고 케힌데는 오른발이 강력하다. 빈치씽코는 아기자기한 센스가 있다면 케힌데는 선이 굵다. 아직 케힌데를 100%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연습경기에서는 무고사와 투톱도 기용해 보려고 한다. 케힌데의 장점을 살릴 방법을 모색 중이다.

안산에서 ‘카드 수집가’인 빈치씽코와 물병을 걷어차며 불만을 드러낸 마사를 잘 이끈 감독이었다. 외국인 선수를 다루는 노하우가 있나.
티격태격 해야 한다. 적절한 보상과 제재를 가해야 한다. 하지만 인천에서는 그렇게 외국인 선수와 티격태격 하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무고사와 부노자, 케힌데, 마하지 모두 국내 선수들과 너무 잘 어울린다. 전지훈련에 와서도 방을 외국인 선수들끼리 쓰지 않고 국내 선수들과 같이 쓰고 있더라. 나는 처음에는 코치들이 방을 일부러 그렇게 배정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본인들이 국내 선수들과 같은 방을 쓰길 원한다고 하더라. 놀라웠다.

이런 팀을 본 적이 없다.
무고사는 말 그대로 프로페셔널하다. 부노자는 부상으로 다소 고생하고 있지만 워낙 성격이 좋아 마찰은 없을 것이다. 마하지는 알아서 다 잘한다. 케힌데는 인천 팬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좋아하는 선수다. 감독으로서는 케힌데 같은 선수들을 더 ‘업’ 시켜줄 필요가 있다. 우리 공격진에는 무고사와 케힌데만 있는 게 아니라 송시우와 김호남도 있다. 다양한 공격 조합을 찾고 있다.

ⓒ 인천유나이티드

유상철 감독이 왔다 갔다고 들었다.
지난 10일 저녁에 우리 숙소로 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자고 다음 날 연습경기까지 보고 갔다. 항암치료를 하기 전에 찾아온 거다. 선수들한테는 부담을 주기 싫어서 연습경기장에서 만나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하면 인천을 잘 끌고 갈 수 있느냐”고 많은 걸 물었다. 여전히 나보다도 인천 선수들을 잘 아는 감독이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우리 팀의 감독이다. 나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는 지도자다. 2월 20일 대전과 마지막 연습경기가 잡혀 있는데 항암치료를 잘 마치고 컨디션이 괜찮다면 그날도 한 번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 질문이다. 올 시즌 인천을 맡은 각오를 말해달라.
인천은 매번 강등권에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인천은 6위나 7위 정도에서 싸울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팀이다. 강등권이 아닌 그 위에서 싸우고 싶다. 이기는 축구를 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

임완섭 감독은 인지도에 비해 이룬 게 많은 지도자다. K리그2에서 이미 두 번이나 우승을 경험했고 2부리그에서 가장 열악했던 팀을 5위까지 올려 놓은 바 있다. 비시즌 동안 거취가 가장 주목받았던 감독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현역 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동료에게서 바통을 물려 받아 인천을 이끌게 된다. K리그1에서 임완섭 감독이 보여준 축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또 한 번의 도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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