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부산=조성룡 기자] "어머, 어머. 쟤네 홍콩 애들이네."

18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2019 EAFF E-1챔피언십 남자부 홍콩과 중국의 경기가 열리기 한 시간 전, 광장에 포장마차를 차려놓고 먹거리를 판매하던 '부산 아지매'들은 깜짝 놀랐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북소리와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다. "위 아 홍콩(우리는 홍콩), 위 아 홍콩." 그들은 홍콩 팬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은 홍콩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이 예정되어 있는 '이시국 매치'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이 걸어갈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응원을 보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홍콩의 상황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고등학생도 아주머니도 그들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열렬하지는 않았지만 홍콩인들에게 따뜻한 환대가 이어졌다. 홍콩인들은 한국어로 '광복홍콩 시대혁명'을 연습해 경기장 밖에서 열심히 외쳤다. 놀랍게도 이 자리에는 홍콩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길림성에서 온 한 중국인 부부는 "홍콩은 잘못한 것이 없다"라면서 당당하게 홍콩 지지를 외치기도 했다. 유창한 중국어로 취재진들 앞에서 중국을 규탄하기도 했다.

모두가 우려하던 홍콩인과 중국인의 충돌은 없었다. 먼저 경기장 앞에 와 대기하던 중국인들은 홍콩인들이 등장하자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사설 경호원과 경찰의 통제 아래 홍콩인들은 예매한 표를 발권하고 안내대로 경기장에 들어왔다. 물론 경기장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부 실랑이는 있었다. 일부 홍콩 팬이 한국어로 '광복홍콩 시대혁명, 5대요구 수용하라'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울려퍼진 '홍콩에 다시 영광을'

애초에 동아시아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경기를 대비해 엄격한 지침을 세웠다. 그래서 출입구에서 실랑이도 일어났다. 경기장 내에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 등을 반입할 수 없도록 했다. 지금까지 홍콩의 경기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홍콩 팬들은 몇 차례 경기장을 방문하며 학습효과를 얻었다.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을 숨기는 법을 알아낸 것이다.

경기 시작 직전 중국의 국가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퍼지자 홍콩의 응원석은 격렬한 야유로 뒤덮였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숨겨온 현수막을 꺼내들었다. 홍콩 시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복홍콩 시대혁명'은 물론이고 'HongKong is not China(홍콩은 중국이 아니다)' 등이 펼쳐졌다. 경호원들은 다급히 제지하기 위해 다가갔고 거센 실랑이가 이어졌다. 약 10분이 걸려서야 소동은 진정됐다.

후반 시작과 함께 홍콩 시위를 관심있게 본 사람은 알 수 있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바로 최근 홍콩의 국가로 여겨지는 '홍콩에 다시 영광을'이라는 노래였다. '이 땅에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노가 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당히 맞서 침묵하지 않으니 울려퍼지는 함성, 이곳에 자유가 다시 찾아오기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홍콩 시위에서 자주 불린다. 우리나라의 '님을 위한 행진곡'과 비슷한 느낌이다.

만일 '프리 홍콩'과 같은 영어 구호가 조직적으로 울려 퍼졌다면 주최 측 입장에서는 즉각 제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명확한 정치적 구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광동어로 불린다. 한국에서 광동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안에서는 홍콩인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경기장 안에서는 한참 동안 '홍콩에 다시 영광을'이 울려퍼졌다. 그 노래가 나올 때 최루탄 냄새도, 무장한 경찰도 없었다.

홍콩인들에게 행복했던 부산에서의 90분

홍콩 팬들이 규정을 위반하고 무리하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한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국제대회에서 중국을 향해 항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홍콩 현지의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홍콩 현지에서도 이 경기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홍콩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경기가 생중계될 정도였다.

이날 수많은 홍콩 팬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한 홍콩 팬은 이렇게 대답했다. "홍콩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처벌 받아요.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아요." 다른 팬도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경기장 밖에서 이렇게 구호를 외쳐도 체포되거나 끌려가지 않아요. 홍콩 사람들에게 이곳 한국이 이렇게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도 한국처럼 민주적인 곳에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홍콩인들은 갑작스럽게 몰려든 취재진에게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홍콩의 홈이었다. 사실 다들 중국은 큰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홍콩은 작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반대였다. 수십명의 중국인들이 "짜요"를 외쳤지만 홍콩의 "위 아 홍콩 보이스"라는 노래에 쉽게 묻혔다. 홍콩인들은 90분 동안 쉬지않고 응원을 펼쳤다. 팀은 패색이 짙었지만 홍콩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비록 몇 차례 실랑이가 있었지만 홍콩과 중국의 경기는 평화롭게 끝났다. 중국은 홍콩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3위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홍콩 팬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선수들 열심히 싸웠잖아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홍콩 팬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90분 동안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몰려온 사람들이 목청껏 홍콩을 외쳤다. 아주 자유롭게. 경기 종료 이후 '홍콩에 다시 영광을'이 한 번 더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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