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축구협회 제공

[스포츠니어스|부산=조성룡 기자] 17일 구덕운동장.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서 2019 EAFF E-1챔피언십 대만과 중국의 경기가 종료됐다. 이 경기는 중국이 승리했다. 하지만 표정이 더 밝은 쪽은 대만이었다. 대만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패배를 자축(?)했다. 대만의 카즈오 에치고 감독 또한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유는 스코어에 있었다. 이날 대만이 기록한 경기 결과는 0-1이었다.

이번 중국전에서 패하며 대만은 3전 전패 0득점 13실점이라는 결과를 남겼다.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E-1챔피언십에서 대만 여자축구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E-1챔피언십 역사상 처음으로 한 골 차 패배를 당한 것이다. 그동안 대만의 여자축구는 E-1챔피언십에서 승점은 커녕 본선 진출도 어려운 팀이었다. 그런 팀이 장족의 발전을 이뤄낸 셈이다.

출전부터 극적이었던 대만의 E-1챔피언십

사실 대만의 출전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E-1챔피언십 여자부 본선은 세 팀이 본선에 직행하고 남은 팀들이 한 장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겨룬다. 이번에는 주최국 대한민국을 비롯해 FIFA 랭킹이 가장 높은 일본, 그리고 지난 대회 챔피언인 북한이 본선에 직행했다. 그리고 예선에서 중국이 1위를 차지했다. 대만은 2위로 예선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북한이 갑작스럽게 기권을 선언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출전권은 예선에서 2위를 기록한 대만에 주어졌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낭보였다. 대만 여자축구는 A매치 한 번 하기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에서도 경쟁력 있는 동아시아의 강호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대만 여자축구의 E-1챔피언십 본선 진출은 2010년 이후 9년 만의 일이다.

물론 본선에 진출했다고 경기력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만은 여자축구의 약체였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은 거대한 벽이었다. 1차전에서 대만은 전력 차를 여실히 실감했다. 일본을 만난 대만은 0-9 대패를 당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10분에 한 골씩 먹힌 셈이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대한민국에 0-3으로 패배했다. 일찌감치 최하위가 확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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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빛이 났던 대만의 투혼과 전술

대만은 분명 일본전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대만은 조직적인 수비로 대한민국을 괴롭혔다. 전술의 유연성도 흥미로웠다. 4-4-2 포메이션을 기본으로 들고 나온 대만은 좌우 측면 미드필더의 위치를 유기적으로 조절하면서 4-3-3과 5-3-2 포메이션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대한민국전에서 골키퍼의 실책성 플레이가 없었다면 경기는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대만은 중국전에서 대한민국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줬다. 실책성 플레이로 고개를 숙였던 골키퍼 청쓰위가 제 실력을 발휘하면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중국은 고전했고 대만을 상대로 단 한 골 밖에 넣지 못했다. 0-1 패배라는 결과는 대만의 E-1챔피언십 역사상 가장 좋은 결과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에 0-4, 일본과 중국에 각각 0-3으로 패배했다. 1차전의 0-9 대패가 없었다면 본선 최종 성적 역시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꽤 눈에 띄는 선수도 있었다. 공격수 첸옌핑은 언제든지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줬고 측면 미드필더의 역할을 수행하다 공격적인 역할을 해내는 파오 신수안과 측면 수비까지 소화하는 리시우친의 비중은 제법 컸다. 특히 대만은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팀이다. 엔트리에 포함된 23명의 선수 중 만 20세 미만이 무려 여섯 명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만이 조만간 아시아 여자축구 무대에서 신흥 강호로 떠오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서 일본 취재진들은 일부 대만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일본 여자축구 리그인 나데시코 리그의 수준과 비교하기도 했다. 카즈오 에치고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직 멀었다. 나데시코 리그에서 2부리그나 3부리그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1부리그는 무리다"라고 평가했다.

'주경야축' 대만의 투혼, E-1챔피언십의 존재 가치 살리다

대만은 다른 세 개 국가의 여자 대표팀에 비해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 대한민국전이 끝나고 카즈오 에치고 감독은 열악한 상황에 대해 토로했다. "선수들이 훈련할 시간이 거의 없다. 체계적으로 선수를 키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훈련 환경도 굉장히 열악하다. 그라운드 위에서 뛰며 훈련해야 하는 선수들이 체육관 안에서 훈련할 때도 많다."

이는 대만 여자축구의 현실과 직결된다. 현재 대만의 여자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대만의 에이스 파오 신수안은 농담 삼아 "나는 파트 타임 축구선수다"라고 할 정도다.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또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낮에는 회사에서 엔지니어 일을 하고 밤에는 훈련장에 나가 축구를 하는 셈이다. 한 때 미국 여자축구 리그 구단이 군침을 흘렸던 왕년의 유망주가 대만에서는 투잡의 삶을 살고 있다.

파오 신수안이 <스포츠니어스>에 전한 이야기는 현재 대만 여자축구의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낸다. "대만 여자축구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축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나 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그렇다. 좋은 훈련 장비와 프로그램, 그리고 다양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일단 축구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E-1챔피언십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파오 신수안은 "그래서 E-1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하다. 기대하지 않았던 무대에 우리는 등장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팀들을 상대로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확인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에 돌아가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사실 이번 E-1챔피언십은 흥행 부진 등으로 예년보다 관심이 시들해졌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등 최정예 멤버를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E-1챔피언십은 네 개 국가만 참여하는 대회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동아시아축구연맹에 속해있는 10개 국가가 우승을 겨루는 대회다. 누구에게는 그저 비교적 가벼운 대회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는 월드컵만큼 꿈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만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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