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팬들을 향한 포항 팬들의 도발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울산=김현회 기자] 2013년 12월 1일 울산문수경기장. 울산현대와 포항스틸러스의 리그 최종전은 비겨도 우승을 확정짓는 울산과 반드시 이겨야 역전 우승이 가능한 포항의 맞대결이었다. 그런데 0-0의 균형이 팽팽하게 이어지며 울산의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후반 종료 직전 포항 김원일이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하며 포항이 대역전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K리그엣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라이벌전은 이렇게 역사에 남을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리고 6년이 흐른 2019년 12월 1일 울산종합운동장. 이번에도 울산현대가 유리한 상황에서 포항스틸러스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전북현대와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던 울산현대는 무승부만 거둬도 자력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반면 포항은 이미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실상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도 물 건너 간 상황이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경기였다. 울산은 이 경기를 앞두고 우승 세리머니 리허설까지 마무리했다. 울산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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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과는 믿을 수 없었다. 이 경기에서 포항이 무려 4-1 대승을 거두며 울산의 우승 꿈을 무참히 짓밟았기 때문이다. 라이벌전이라는 자존심을 빼면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지만 포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정신력으로 승리를 따냈다. 같은 시간 전북이 강원을 1-0으로 제압하며 우승 트로피는 울산의 손에서 전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울산-포항전이 끝난 뒤 울산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며 괴로워했고 포항 선수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부둥켜 안고 환호했다. 6년 전 아픔을 그대로 재현한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동해안 더비였다.

경기가 끝나자 포항 팬들은 환호했다. 미리 준비해 온 걸개로 라이벌 팀의 우승 실패를 마음껏 놀렸다. 그들이 내건 ‘김도훈 시계 어디서 산거야?’라는 걸개는 K리그의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했다.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시계를 풀며 거세게 항의해 중징계를 당했던 김도훈 감독을 향한 ‘디스’였다. 여기에 ‘어디서산거야?’라는 글귀에서 ‘서산’이 띄어쓰기가 돼 있지 않고 이 두 글자만 빨갛게 쓰여진 건 울산의 자존심을 긁는 도발이었다. 포항 팬들은 울산 서포터스의 상징과도 같은 응원가 “잘있어요”를 불렀다.

올 시즌을 4위로 마치며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포항 선수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포항 서포터스 앞으로 달려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뛰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기동 감독을 헹가래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만 본다면 포항이 우승을 했다고 믿어도 될 만했다. 그 사이 울산 관계자들과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경기 도중 친절하게 따뜻한 커피를 전해주던 울산 구단 아르바이트생은 펑펑 울었고 아빠와 함께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한 어린 아이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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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김기동 감독은 기자회견장에서 “혹시 어디가 우승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 라이벌전에 최선을 다했을 뿐 우승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울산이 패하고 전북이 이기는 바람에 전북에 우승이 돌아갔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는 “어휴”라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장 안전 관계자는 혹시라도 포항 선수들의 안전 문제를 우려해 포항 선수들이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안내했다. 흔히 경기 종료 후 양 팀 선수단 동선이 겹치는 경우도 많지만 이날 만큼은 포항 선수단 버스가 떠나고 한참 뒤 그 자리에 울산 선수단 버스가 자리했다.

경기 후 울산 선수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김보경이 취재진과 잠깐 만나 아쉬웠던 경기 소감을 전했을 뿐 다른 선수들은 모두 조용히 퇴장했다. 이날 결정적인 실수를 한 김승규는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짧게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겼다. 취재진 사이에서도 “오늘 김승규의 인터뷰 고사는 그래도 이해해주자”는 말이 나왔다. 그에게나 울산에나 너무나도 괴로운 순간이었다. 라이벌전은 이렇게 끝이 났고 울산은 포항에 의해 두 번이나 우승을 놓치는 악연이 이어졌다. 경기장을 빠져 나오는데 여기저기에서 울고 있는 울산 팬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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