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프로축구연맹

유상철 감독이 투병 중이다. 유상철 감독은 현재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런 유상철 감독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많은 이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스포츠니어스>에서는 유상철 감독의 완쾌를 기원하며 ‘힘내라 유상철’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부디 유상철 감독이 건강을 되찾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전영민 기자] 유상철 감독은 자타공인 한국 축구 최고의 전설이다. 지난 1994년 울산현대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유상철은 1999시즌까지 울산에서 활약했다. 이후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가시와 레이솔을 거친 유상철은 2005시즌 울산 유니폼을 입으며 K리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6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국가대표로서의 업적도 대단했다. 지난 1994년 3월 5일 열린 미국과의 친선전을 통해 A대표팀에 데뷔한 유상철은 이후 태극마크를 달고 124경기에 출전해 18득점을 기록했다.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에도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이렇듯 유상철 감독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그가 안겨준 여러 감동의 순간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9일 축구계에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유상철 감독의 췌장암 4기 투병 사실이 알려진 것. 유상철 감독은 인천 구단 공식 SNS를 통해 자신의 건강 상태를 직접 알렸다.

그러나 병마도 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유상철 감독은 오히려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호흡할 때가 더 편하다"며 인천 감독직 업무를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4일 유상철 감독은 홈에서 열린 상주와의 리그 37라운드 홈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인천 감독 부임 후 홈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온 투병 소식이지만 많은 팬들은 유상철 감독이 현재의 이 상황을 이겨낼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우리 모두는 유상철 감독이 '기적의 사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니어스>는 유상철 감독의 쾌유를 바라는 의미에서 유상철 감독이 일으킨 기적의 순간을 되돌아봤다.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E조 3차전 벨기에전 동점골

ⓒ 대한축구협회

월드컵 본선 첫승을 노리며 호기롭게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에 나섰던 한국 대표팀. 하지만 대표팀의 꿈은 첫 경기부터 산산조각 났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북중미 강호' 멕시코를 만난 한국은 하석주의 선제골로 앞서가며 '월드컵 첫승'이란 목표를 달성하는듯했다. 그러나 이후 선제골을 기록했던 하석주가 백태클로 퇴장 명령을 받았고 결국 대표팀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며 1-3 패배를 당했다.

2차전 결과는 더욱 심각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 대표팀과 만난 한국은 네덜란드에 무려 5실점을 허용하며 0-5 대패를 당했다. 네덜란드전 참패 직후 대한축구협회는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며 그 책임을 물었다. 월드컵 도중 감독 경질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 속에 대표팀은 최종전을 맞이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표팀은 최종전에서 벨기에를 맞게 되었다. 출발 역시 좋지 않았다. 한국은 전반 7분 만에 벨기에에 선제 실점을 허용하며 끌려갔다. 3연패로 대회를 마무리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대표팀에 영웅이 등장했다. 바로 유상철이었다.

후반 27분 한국의 공격 상황에서 벨기에 수비진이 파울을 범하며 한국의 프리킥이 선언됐다. 키커로는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백태클로 퇴장을 당했던 하석주가 나섰다. 이후 하석주는 벨기에 수비진 뒷공간으로 정확한 왼발 프리킥을 골문으로 연결했고 이를 유상철이 오른발 슬라이딩 슈팅으로 연결하며 동점골을 기록했다.

유상철의 동점골 직후 대표팀은 그토록 바랐던 월드컵 첫승을 위해 공세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벨기에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경기는 1-1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비록 결과는 아쉬운 무승부였지만 이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대표팀의 플레이는 박수 받아 마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주장 유상철이 있었다. 유상철의 투혼 덕에 대표팀은 승점 1점을 챙기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2001 FIFA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 결승골

지난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개최 1년을 앞두고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위해 홍명보, 송종국, 유상철, 박지성, 황선홍, 이영표, 설기현 등 훗날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 되는 자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2001년 6월 1일 대표팀은 울산문수경기장에서 북중미 강호 멕시코와 일전을 치르게 됐다. 한국과 멕시코의 맞대결이 열린다는 소식에 울산문수경기장은 41,550의 관중들로 가득찼다. 히딩크 감독은 멕시코를 상대로 유상철-박지성-고종수로 이어지는 특급 미드필더 라인을 가동했다.

하지만 멕시코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전반전 선발 멤버 유상철이 코뼈 부상을 입으며 위기에 처했다. 당시 유상철의 코뼈는 이미 부러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원했던 유상철은 그라운드에 남아 플레이를 이어갔다.

그렇게 전반전을 0-0으로 마친 한국은 후반전에 돌입했다. 이어 후반 11분 한국의 선제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황선홍이었다. 우측 측면에서 넘어온 최성용의 오른발 크로스를 황선홍이 예리한 헤딩골로 연결하며 한국이 기선을 잡았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표팀은 후반 26분 멕시코 수비수 듀일리오 다비노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는듯하던 후반 추가시간 한국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역시 유상철이었다.

한국의 코너킥 상황에서 키커 박지성이 페널티 박스로 예리한 오른발 킥을 올렸다. 이후 멕시코 수비진과의 경합을 힘에서 이겨낸 유상철이 타점 높은 헤딩골로 멕시코의 골문을 열었다. 전반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유상철이었지만 그는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결국 투혼을 아끼지 않았던 유상철의 활약 덕에 대표팀은 멕시코에 2-1 승리를 거뒀다.

이날 유상철의 플레이는 대표팀 선수들이 어떤 자세를 갖고 경기에 임해야 하는지 많은 귀감을 남겼다. 그는 코뼈가 부러진, 견디기 힘든 통증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어떻게 국가대표 경기에 임해야 하는지 몸소 증명한 멕시코전 유상철의 투혼이었다.

2002 FIFA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D조 폴란드전 추가골

ⓒ 대한축구협회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을 1무 2패로 마친 대표팀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월드컵 본선 첫승을 노렸다. 하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대표팀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동유럽 강호 폴란드를 만나게 되었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악마의 함성을 등에 업은 대표팀은 폴란드를 초반부터 몰아쳤다. 이후 대표팀은 전반 26분 황선홍의 선제골로 기선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 골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선 추가 득점이 필요했다.

그렇게 모두가 득점을 바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추가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유상철이었다. 유상철은 후반 8분 폴란드 수비진으로부터 공을 가로채낸 후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을 때려 추가골에 성공했다. 당시 리버풀에서 활약 중이던 세계적인 수문장, 폴란드의 예지 두덱이 손을 쓰지 못할 만큼 유상철의 슈팅은 강력했다.

추가골을 터뜨린 유상철은 누구보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득점에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더 큰 응원을 보내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유상철의 득점 후 전세는 확연히 기울어졌다. 결국 대표팀은 폴란드를 상대로 2-0 승리를 따내며 감격적인 월드컵 본선 첫승을 거두는데 성공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그 중심엔 유상철이 있었다.

1994, 1998, 2002 K리그 베스트 11

ⓒ 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계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바로 유상철 감독의 현역 시절 포지션이다. 12년의 길었던 현역 시절 동안 유상철 감독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그간 축구계에는 여러 멀티 플레이어들이 있었지만 모두 유상철 감독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유상철 감독은 현역 시절 남들이 한 번 타기도 어렵다는 K리그 베스트 11을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서 모두 수상했다.

K리그 데뷔 시즌이었던 지난 1994년 유상철 감독은 수비수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이후 1998년 미드필더로 다시 한 번 K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린 유상철 감독은 2002시즌에는 공격수로 K리그 베스트11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K리그 베스트 11에 한 번씩 이름을 올리는 불멸의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유상철 감독은 현역 시절 센터백,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을 모두 소화했다. 골키퍼를 제외하고는 모든 포지션에서 뛰는 선수였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약점 역시 없었다. 탁월한 경기 조율 능력, 예리한 패스, 날카로운 킥, 안정감 있는 수비에 184cm의 신장에서 나오는 제공권 그리고 골 결정력까지. 유상철 감독은 선수 시절 아시아 최고의 톱 클래스 선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기억하는 이유다.

보이지 않았던 한쪽 눈, 그의 화려함 뒤에 감춰졌던 이면

ⓒ 대한축구협회

이렇듯 유상철 감독은 우리에게 여러 번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선사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K리그 최고의 선수가 되고, 태극마크를 달며,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기까지 유상철 감독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의 시력이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2006년이었다. 당시 은퇴를 앞뒀던 유상철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물 분간이 힘들 정도로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의 고백에 축구 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지난 2010년 방송에 출연한 유상철 감독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SBS 예능 프로그램 '강심장'에 출연했던 유상철 감독은 "왼쪽 눈의 시력이 없다. 옆에 사람이 지나가도 누군지 모른다. 실루엣만 보인다"고 실명 사실을 고백했다.

이어 유상철 감독은 "실명 사실을 팀 동료들과 감독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자아냈다. 유상철 감독은 어머니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유상철 감독은 "어머니가 내게 본인의 눈을 주겠다고 이야기하셨다. 당시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굉장히 화를 냈다"며 눈물을 흘렸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유상철 감독은 결국 끝없는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당혹스러운 현실에 무릎을 꿇고 꿈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상철 감독은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이를 극복하며 한국 축구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우리에게 기적을 준 당신, 이젠 당신이 그 기적을 받을 차례

이렇듯 유상철 감독은 여러 차례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쁨들을 선사해줬다. 그리고 '기적'이란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 증명해냈다. 24일 인천과 상주의 경기가 열린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는 유상철 감독을 향한 '우리에게 준 소중한 기적들. 이제는 다시 그대가 찾을 차례'라는 인천 팬들의 걸개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 그간 유상철 감독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기적들을 안겨줬다. 이젠 우리가 아닌 유상철 감독이 그 기적의 기쁨을 맛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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