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올해 K리그2의 우승은 광주FC가 차지했다.

이제 광주는 내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밟게 되는 K리그1 무대는 광주가 그토록 바라던 곳이었다. 그들은 지금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여기 또 한 명의 선수가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광주의 신예 공격수 김주공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주공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펠리페와 윌리안 등 좋은 외국인 공격수가 포진한 광주에서 김주공이라는 공격수는 낯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김주공은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올 시즌 후반기 들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김주공은 17경기 출전에 3골 2도움이라는 성적을 올렸다.

K리그 입성 첫 시즌에 우승컵을 들어올린 광주 김주공은 이제 내년 시즌 K리그1 무대를 준비해야 한다. 어찌보면 탄탄대로다. 하지만 알고보면 김주공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상당히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아직은 어린 선수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한층 성숙해진 광주 김주공을 <스포츠니어스>가 목포축구센터에서 만났다. 김주공, 또는 LH킴이라 불리는 이 선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서 반갑다.

반갑다. 이런 단독 인터뷰는 처음이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겠다. 주공아파트 사는가.

아…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걸 묻더라. 나보고 주공아파트 사냐고. 엄밀히 말하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목포축구센터지만 본가가 익산에 있는 주공아파트다. 실제로 주공아파트에 사는 것은 맞다.

정말인가.

그렇다. 또 자세히 말하자면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전북 익산에 위치한 주공아파트 2차에 집이 있다. 그런데 약 1년 전에 아파트 이름이 바뀌었다. 주공이나 LH 같은 이름은 싹 없어지고 아름드리 아파트로 변신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주공아파트에 사는 것을 잘 모른다. 누가 내 이름을 듣고 주공아파트 사냐고 물어보면 태연하게 "아름드리 산다"라고 얘기한다.

이게 다 광주가 K리그2 우승을 한 덕분에 관심이 늘어난 것이다.

맞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나 우승을 좀 해봤고 그 이후로는 우승의 맛을 잘 몰랐다. 한 10년 만에 우승한 것 같다. 처음 우리가 우승을 확정 지었을 때는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데 형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니 생각이 바뀌더라. 10년 동안 축구하면서 우승을 처음 해봤다는 형들도 많았다. 그런데 나는 이 우승이라는 것을 K리그 1년차에 경험했다. 이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니 정말 '내가 우승했구나' 실감나더라.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김주공의 인생에서 정말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다.

맞다. 불과 약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K리그에 발도 못들일 줄 알았다. 하하.

입단 전 이야기를 해보자. 원래 행선지는 광주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맞다. 내가 전주대에 다닐 때 전북현대와 입단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심지어 테스트 선수로 R리그 경기에도 나섰다. 전북 소속으로 R리그를 세 경기 뛰었는데 여기서 세 골을 넣었다. 어느 정도 눈도장을 찍은 셈이다. 활약한 덕분에 전북 관계자가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계약을 추진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주대에 다니면서 전북은 내게 가장 친숙한 곳이었다. 경기도 많이 보러 갔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전북 경기를 보러가는 수업이 있었다. 수업으로도 가고 단체 응원으로도 갔다. K리그 팀 중에서는 전북 경기를 제일 많이 봤다.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처음 전북 경기를 볼 때는 '내가 저기서 뛸 수 있을까?'란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계약이 조금씩 진행되면서 '와 내가 곧 저기서 뛰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북에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생겼다. 최강희 감독님이 팀을 떠나시는 등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내 입단이 취소됐다. 그 때가 2018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이후였다. 나는 그 소식에 거의 '멘붕'이었다. 그 시기면 다른 팀들은 선수단 구성이 거의 다 끝나고 한창 동계훈련 준비를 할 시기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갈 팀이 없어진 것이다.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 '더 이상 축구하기 싫다'란 생각도 했다. 방황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군 입대도 고민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현역병으로 군대를 갔다와서 축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도 축구를 하고 있다.

1월 초 쯤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에이전트에게 연락이 왔다. 광주에서 테스트 경기가 열린다고 하더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갔다. 솔직히 간절함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반반이었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경기를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전북과의 계약이 잘 진행된다고 안심해 약 한 달 가량 운동을 하지 않고 놀았다. 그런 상황에서 테스트 경기에 나서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갑자기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즐기자'는 마음으로 갔다. 테스트 경기를 재밌게 열심히 뛰었다. 기영옥 단장님과 박진섭 감독님 등 관계자들이 나를 긍정적으로 봐준 모양이었다. 바로 며칠 뒤 연락이 와서 팀에 합류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광주의 전지훈련이 진행되고 있던 광양으로 바로 짐싸서 내려갔다. 그 때부터 광주 생활이 시작됐다.

정말 극적인 입단이었다. K리그2에서 뛰거나 이런 것에 대한 아쉬움 등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내가 진짜 운이 좋구나'란 생각만 했다. 광주에 합류하면서 '다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흔들리던 내 정신력도 다시 다잡았다. 이제 나는 프로라는 세계에 진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아야 했다. 열심히 준비할 생각으로 광주에 입단했다.

광주의 동계훈련은 힘들기로 유명하다. 한 달 놀았던 당신 입장에서는 더욱 힘들었겠다.

아니다. 내가 또 이런 부분에서 운이 좋다. 광주의 동계훈련이 힘든 것은 체력훈련 때문이다. 시작하고 나서 1차 동계훈련을 체력 위주로 한다. 그런데 내가 합류했을 때는 그 악명 높은 1차 동계훈련이 거의 마무리될 때였다. 나는 그래서 광양에서 3일 정도 훈련하고 휴가를 받은 뒤 2차 동계훈련 장소인 일본으로 날아갔다. 맛도 제대로 못본 셈이다.

일본에서는 힘든 훈련이 거의 없다. 주로 전술적인 부분을 다듬고 연습 경기를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다. 형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내게 "와, 너 동계훈련 제대로 안하고 완전 꿀 빨고 있네"라고 하더라. 하하.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런 것 같더라. 그래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신인이었다. 그리고 팀에도 늦게 합류했고 컨디션도 빠르게 끌어올려야 했다.

맞다. 당신은 프로의 세계에 적응도 해야했다.

솔직히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다 모르는 형들이지 않는가. 혼자서 어색했다. 어색하면 생활이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형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내 룸메이트인 (김)진환이 형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동계훈련 때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하자는 의미로 함께 계획도 짰고 새벽운동도 항상 같이 했다. 우리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알기에 더욱 노력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30대 고참 형들도 내 생각과는 달랐다. 형들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착하다. 후배들에게 장난도 많이 치고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이끄려고 항상 노력한다. 후배의 입장에서는 선배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우리가 선배들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선배들이 솔선수범하고 후배들은 선배들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했다. 선배들을 통해 프로가 어떤 세계인지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웠던 선배는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은 없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주장 (김)태윤이 형이 제일 무서웠다.

그 서장훈 닮은…?

맞다. 내가 태윤이 형에게 직접 말은 안했지만 정말 닮긴 닮았다. 하하. 보자마자 서장훈인 줄 알았다. 지금도 볼 때마다 그렇다. 사실 태윤이 형이 무서워 보여서 동계훈련 때는 거의 말도 많이 섞지 못했다. 어색해서 말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제일 친한 형 중 한 명이다. 이제는 서로 수다도 많이 떨고 숙소에서 밥 먹을 때도 항상 붙어서 먹을 정도다.

코칭스태프는 어떤 느낌이었나.

박진섭 감독님은 참 신기했다. 내가 광주에 와서 내 스타일을 바꿨다. 나는 원래 드리블을 많이 하고 공격적으로 상대 수비를 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박 감독님이 나를 보더니 "등 졌을 때는 파고들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다시 리턴 패스를 내주라"는 것이다. 내게 "왜 굳이 무리하게 하는가"라고 지적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장점이었고 박 감독님이 그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했다. 연습경기를 할 때 박 감독님은 항상 "쉽게 쉽게 하라"고 강조하셨다.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이 적응했다. 특히 박 감독님은 상대를 속이는 방법을 많이 알려주셨다. 역시 '꾀돌이'더라. 골키퍼를 속이는 슈팅이나 심리 같은 걸 많이 가르쳐주셨다. 이런 것이 다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였다. 그걸 많이 전수해주셨다.

그리고 박 감독님의 전술 폭은 정말로 넓다. 사실 대학 때는 포지션 대로 경기를 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 포지션을 부여 받아도 상대 전술에 맞춰 포지션이 순식간에 또 달라진다. 상대가 변화를 주면 그라운드 안에서 곧바로 대응을 한다. 밖에서 박 감독님이 다 지시를 한다. 감독님의 말만 잘 들으면 진짜 경기가 쉽게 풀린다.

유경렬 코치님은 내가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때 정말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훈련하고 들어오면 따로 불러서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 좋은 날이 올 거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하는지 세밀하게 알려주시더라. 하지만 잘할 때는 자만하지 않도록 일깨워주신다. 원래 유 코치님 말투가 좀 세다. 경기에 나가서 잘하면 오히려 혼내는 것처럼 "건방지면 안된다"라고 강조하신다.

특히 예전에 한 번 제대로 혼난 적이 있다. 예전에 서울이랜드와 경기할 때로 기억한다. 3-1 정도의 스코어로 이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상대 골대 바로 앞에 있었고 공이 내게 굴러오더라. 그냥 잘 밀어넣으면 골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완벽한 왼발 슈팅으로 김영광 골키퍼를 맞췄다. 그 때 유 코치님에게 많이 혼나고 욕도 많이 먹었다. 하하.

신인 공격수에게 주전경쟁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 같다.

당연히 그랬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펠리페라는 어마어마한 강적이 있었다. 광주에 입단하면서 나름대로 목표를 높게 잡았는데 현실적으로 경기 출전 자체가 힘들더라. 컨디션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몇 차례 경기에 나서니 보여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연습을 많이 했다. 동계훈련이 끝나고도 매일 매일 새벽에 개인 훈련을 했다.

특히 훈련할 때 슈팅과 움직임에 대한 연습을 많이 했다. 생각해보니 펠리페와 내가 똑같은 스타일이라면 내게 경쟁력은 없었다.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 뒷공간을 침투하거나 수비 라인을 끌어내리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연습했다. 연습 경기를 하면 이 모습만 엄청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중용된 시기는 한참 후였던 것 같다.

우리 팀이 1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지 않았나. 그 때 굳이 선수 명단에 변화를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하하. 하지만 FC안양에 1-7 대패를 당했을 때 좀 오기가 생겼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교체 명단에 있었다. 정말 뛰고 싶었다. 그라운드에서 반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날 투입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내가 처음으로 선발로 출전한 경기는 전남드래곤즈전이었다. 펠리페가 처음 퇴장 당하고 나서 기회를 얻어낸 것이다. 그날 경기에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조금씩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공격포인트도 잘 올리지 못하고 경기력도 좋지 못했다. 다시 선발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졌다. 그러던 와중에 펠리페가 또 퇴장을 당했다. 그러니 다시 내게 기회가 왔다. 그 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펠리페의 두 번째 퇴장을 계기로 쭉 경기에 나섰다.

펠리페에게 밥 한 번 사야할 것 같다.

그런가. 어쨌든 펠리페가 퇴장을 두 번이나 당한 덕분에 내게 기회가 두 번 왔던 것 같다.

어쨌든 당신은 후반기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LH 킴'이라는 새로운 별명도 생겼다.

어릴 때는 그저 주공아파트라고 놀림 받았고 성인이 되서는 이름 가지고 놀림 받을 일이 그리 없었다. 그런데 내가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니까 LH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 한 번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같이 축구한 친구들과 함께 나의 경기 영상을 봤다. 내가 골을 넣은 경기였다. 이 영상 댓글에 사람들이 나보고 LH라고 하더라. 'LH 잘한다!'란 댓글이 있더라.

아니 내가 골을 넣었는데 김주공 이름 석 자는 알려지지 않고 LH가 더욱 알려지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웃겼다. 옆에서 보던 친구들도 많이 웃었다. 친구들이 이 참에 LH로 골 뒷풀이를 하나 만들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LH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더라. 다음 시즌에 내가 K리그1에서 골을 넣게 된다면 LH 골 뒷풀이를 한 번 해볼까 생각하고 있다.

지난번 전남과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는 두현석과 함께 이상한 춤을 추더라.

아, 그거 봤는가? 마지막 홈 경기를 위해 우리가 특별히 준비한 골 뒤풀이다. 우리 팀은 골 뒷풀이라고 할 만한 게 펠리페 '주먹 뒷풀이' 밖에 없다고 해서 한 번 고민해봤다. 두현석과 홍준호, 그리고 내가 '피파' 게임을 즐겨한다. 피파에서 골을 넣고 키를 몇 개 누르면 춤 추는 뒷풀이가 나온다. 딱 그거다. (두)현식이 형, (홍)준호 형과 함께 경기 들어가기 전에 골을 넣으면 코너 플래그 쪽에서 춤을 추자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경기에서 지는 바람에 아쉬움이 좀 남는다.

그래도 올 시즌 김주공의 활약은 만족할 만한 수준 아닌가.

아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특히 기회를 놓친 것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경기에 나서면서 내가 잡은 득점 기회를 정말 많이 날렸다. 득점도 서너 골 정도는 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날리는 바람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경기 수도 아쉬움이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 20경기 안팎 출전을 목표로 잡았지만 17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내년 시즌을 앞두고는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 올해는 내가 늦게 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아쉬웠던 부분이 많았다. 내년 시즌에는 동계훈련부터 더욱 열심히 해서 더 발전하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전북의 홈 경기장인 전주성에서 경기도 뛰고 골 넣고 뒷풀이도 한 번 해보고 싶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후반기 때 내가 좀 잘하니까 형들이 말해줬다. "어깨 올라가있지 말고 건방 떨면 안된다"라고.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관중석에서 보던 전주월드컵경기장이 그리운가.

광주월드컵경기장이 훨씬 낫다. 이제는.

왠지 내년 시즌 K리그1에서 전북을 상대로 칼을 갈고 있을 것 같다.

전북을 상대로 골을 넣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목표는 아니다. 그저 공격수라면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골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K리그1에서 가장 만나보고 싶은 팀은 대구FC다. DGB대구은행파크가 좋다고 해서 한 번 그 경기장에서 뛰어보고 싶다. 특히 팬들이 엄청 많아서 관중석도 꽉 차고 경기장도 유럽 못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제일 기대되는 경기다. 뭐 그렇다고 엄청 부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도 곧 아담하고 좋은 새로운 경기장이 생기고 클럽하우스도 만들어진다.

내년을 더욱 기대하겠다. K리거 김주공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먼 훗날 당신은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될까?

LH만 아니면 된다.

내년 시즌에도 김주공의 앞날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여전히 주전 경쟁은 험난하고 K리그1에서 만날 팀들은 K리그2와는 또 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팀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김주공 또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하지만 김주공은 아직 젊다. 젊은 만큼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은 많다. 올 한 해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써낸 김주공은 한 번 맛본 해피엔딩을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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