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렸어요” 수원삼성이 3,991일 만에 빅버드에서 우승하던 날


수원삼성 FA컵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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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수원=명재영 기자] 수원삼성이 드디어 홈에서 트로피를 들었다.

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빅버드)에서 2019 KEB하나은행 FA컵 결승 2차전 수원삼성과 대전코레일의 경기가 열렸다. 1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던 양 팀의 맞대결은 2차전에서 수원이 고승범의 2골 맹활약에 힘입어 4-0 완승을 거두면서 수원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수원은 이날 우승으로 FA컵 통산 5회 우승을 차지해 4회 우승의 포항스틸러스를 제치고 단독 최다 우승팀으로 거듭났다.

명문 구단으로 불리지만 수원은 2010년대 들어 급격히 힘이 떨어졌다.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전신 대회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 2002년에 우승한 게 마지막이다. 리그 우승도 2008년에서 멈춰 11년이 흘렀다. FA컵에서 2002년 첫 우승 이후 2009년, 2010년, 2016년에 정상을 차지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FA컵에서만큼은 강팀의 면모를 지켜온 수원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결승전을 모두 원정에서 치른 점이다. FA컵은 2005년까지 중립지역에서 예선부터 결승까지 한 번에 진행하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2002년 첫 우승은 제주였다. 대회 방식이 바뀐 2006년, 두 차례 홈 경기를 치르고 결승까지 올랐지만 역시 무대는 빅버드가 아니었다. 준결승부터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때는 준우승을 했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 우승에서는 모두 추첨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결승 대진에서 원정으로 배정받으면서 성남일화, 부산아이파크, FC서울의 홈에서 트로피를 올렸다. 우승 여부가 제일 중요하지만 역시 프로스포츠의 꽃은 안방에서 홈팬들과 함께 우승하는 모습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수원은 4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동안 단 한 번도 홈팬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결국 수원의 홈 우승 기록은 2008년에 멈춰 있었다. 수원 서포터즈의 유명한 응원곡 중 나오는 가사인 “하얗게 눈이 내리던 그 날”이 바로 2008년이다. 라이벌 FC서울을 상대로 눈이 휘날리는 가운데 우승컵을 들어 올린 순간은 K리그 역사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역대 K리그 중계 시청률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경기이기도 하다.

2008년이면 무려 11년 전이다. 당시 결승전에서 상대 팀 선수로 출전했던 기성용이 대표팀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기성용은 올해 초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대표팀 새내기가 주장을 거쳐 은퇴하는 동안 수원은 한 번도 홈에서 우승을 맛보지 못했다.

수원 2008년 우승
2008년 리그 우승 당시 수석코치였던 이임생 감독(왼쪽) ⓒ KBS1 중계방송

그리고 마침내 올해 기회가 왔다. 32강과 16강에서는 포항스틸러스와 광주FC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지만 홈의 이점을 살려 무난하게 승리했다. 다음 라운드부터는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주는 급의 행운이 잇따랐다. 8강에서는 내셔널리그 광주한수원을 만났고 준결승에서는 K3리그 화성FC와 맞붙었다. 결승 상대도 내셔널리그 내셔널리그 대전코레일이었다. 단판은 모두 홈경기에 준결승부터는 2차전 홈경기를 배정받았다. 우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물론 수원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운 대진을 거부하고 8강부터 살얼음판 승부를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수원은 11년 만에 트로피를 걸고 홈경기를 치렀다. 사실 분위기는 경기 전까지는 썩 좋지 않았다. 리그에서의 실망스러운 경기력과 성적으로 많은 팬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지난 6일 대전에서 열린 결승 1차전도 득점 없이 비기면서 오히려 위기감이 생겼다. 한때 리그 흥행을 선도했던 수원이지만 이제는 옛날이야기에 가까워졌다. 라이벌전이 아니면 1만 명도 채우지도 못하는 홈경기가 대부분이다.

이날 빅버드에는 15,816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수원의 이름값에는 다소 저조한 숫자다. 하지만 뜨거운 결승전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친 수원 서포터들은 경기 전 응원 문구들이 적힌 대형 엠블럼 응원으로 선수단에 힘을 불어넣었다. 절벽 앞에 선 수원 선수들도 이날만큼은 기대에 부응했다. 전반 15분 고승범이 멋진 중거리 슛으로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터트리면서 빅버드의 분위기를 달궜다.

후반 중반부터 수원이 연달아 세 골을 터트리면서 우승에 대한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자 경기장은 점점 축제의 분위기가 됐다. 백미는 후반 32분 김민우의 세 번째 골이었다. 김민우는 전세진, 구대영과 함께 서포터석 앞으로 다가가 양손을 번쩍 올렸다. 그리고 수원의 응원 구호인 “우리에겐 승리뿐이다”를 외쳤다. 이 모습을 본 수원 팬들도 선수들과 같이 구호를 외치면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냈다.

종료 직전 염기훈의 FA컵 득점왕 확정 골까지 터지면서 빅버드는 트로피를 들어 올릴 준비를 마쳤다. 후반 추가시간이 되자 장내 아나운서가 모두 일어나자고 말했고 마침내 주심의 휘슬이 울리는 순간 수원은 다섯 번째 FA컵 우승을 맞이했다. 빅버드에는 2008년 12월 7일 이후 3,991일 만에 록그룹 퀸의 노래 챔피언이 울려 퍼졌다.

팬들과 선수단은 경기가 끝나고도 1시간이 넘게 우승의 순간을 만끽했다. 11년 전과 같이 축하의 눈은 없었지만 고난 속에 값진 우승을 거둔 수원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내년 시즌을 생각하면 다시 머리가 아플테지만 이날만큼은 일단 즐기고 보자는 분위기가 빅버드를 감쌌다. 이제 연차가 낮은(?) 수원 팬들은 10년 넘게 응원해온 ‘고인물’ 오랜 팬들의 “나때는 말이야, 빅버드에서 우승도 했어”라는 말을 듣고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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