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마을의 ‘선생 곽미희’ 이야기

'왕년의 스타' 곽미희 감독은 현재 고향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강원도 고성=김현회 기자] 한국 여자축구가 막 첫 발을 내딛고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던 2001년.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중국을 상대했다. 제1회 타이거풀스 토토컵 국제여자축구대회였다. 이명화와 유영실, 차성미, 이지은 등 한국 여자축구 1세대 선수들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브라질과 일본을 상대로 선전했다. 비록 상대는 2군이 출전했지만 한국이 일본과 1-1로 비기고 브라질을 3-1로 제압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세계 최강’ 중국 잡은 스무 살의 곽미희
결승전 상대는 세계 최강 중국이었다. 중국은 1999년 여자월드컵 우승을 거둔 무시무시한 팀이었다. 주전급 선수들이 빠졌어도 한국이 상대하기에는 대단히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2001년 8월 7일 열린 중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믿을 수 없는 3-1 승리를 따냈다. 특히나 이날 경기에서는 스무 살 어린 선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혼자 역전골과 결승골을 터트린 곽미희(당시 INI스틸)가 그 주인공이었다.

강원도 고성이 고향인 곽미희는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강릉 경포여중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강일여고와 제주 한라대를 거쳐 INI스틸에서 뛴 공격수다. 곽미희가 두 골을 넣으면서 중국을 제압하자 여자 축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곽미희의 고향 마을에서는 주민 100여 명이 참석한 우승 축하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고성군수는 아버지 없이 홀몸으로 곽미희를 키워낸 그의 어머니에게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했다.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마을 입구부터 자랑스러운 곽미희를 알리기 위한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곽미희는 이 대회에서 MVP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곽미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세계적인 스타가 탄생했다’는 곽미희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지만 그는 현재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체육회에서 일하고 있다. 18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3일 강원도 고성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제7회 고성 금강통일배 전국유소년클럽축구대회에서 ‘왕년의 스타’ 곽미희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대회는 한국유소년축구연합회에서 주관하고 고성군과 고성군의회, 고성군 체육회, 아디다스코리아, ㈜피파스포츠, 월간축구사커뱅크가 후원하는 대회다. 곽미희 감독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고향에서 행복해 보였다.

한국 여자대표팀은 2001년 이 대회에서 곽미희의 대활약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다시 축구를 만난 이유는?

그는 INI스틸과 서울시청을 거쳐 2004년에 현역에서 일찌감치 물러났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예선 2차전 대만과의 경기에서 어깨쇄골 골절과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큰 수술과 재활을 통해 지난 2004년에 복귀했지만 경희대와의 연습경기에서 똑같은 부상을 당하면서 서울시청 실업팀 소속으로 결국 일찍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한 곽미희 감독은 이후 아산에서 유소년 지도자로 변신했지만 사정이 겹치며 아산에서 아이들과 작별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고성군 체육회에 취직하면서 고향에 정착했다. 강릉으로 축구 유학을 떠났던 소녀는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고성군 체육회에서 그가 할 일은 많았다. 군민을 위한 생활체육 보급을 위한 일이 주된 업무였다. 곽미희 감독은 그러던 중 다시 축구를 접하게 됐다. 고성군 체육회에서 이따금 고성군 아이들을 위해 열었던 무료 축구 수업을 접하게 되면서부터다. 여자축구 대표팀으로 세계 최강을 상대로 골을 넣었던 그에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었다. 한두 번씩 비정기적인 축구 수업을 하다 보니 욕심이 났다. 아이들은 그와 함께 공을 찬 뒤 “또 언제 축구하느냐”고 물었다. 부모들도 고성군 체육회에 연락해 “우리 아이가 또 축구를 하고 싶다고 한다. 수업을 더 열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성화였다.

곽미희 감독은 시골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결국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축구를 지도하면서 받는 돈은 없다. 고성군 체육회에서 나오는 월급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자기 시간을 투자한다. 그는 “발로 뛰며 아이들을 모았다. 수업할 곳을 찾아다녔다. 한 번 수업해도 될 걸 두 번, 세 번씩 하니 아이들이 점점 더 모이더라”고 전했다. 훈련 시간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들마다 학교 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다르고 이후 학원을 가는 아이들도 있어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고성 아이들을 응원하는 학부모들의 모습. ⓒ스포츠니어스

고성FC가 1년에 딱 한 번 나갈 수 있는 대회
유료 개인 레슨이면 제자와 선생님이 서로 시간을 조율하면 될 일이지만 곽미희 씨와 아이들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단체로 무료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모두가 가능한 시간대를 찾아야 했다. 더군다나 곽미희 감독은 고성군 체육회 소속이라 주말에 열리는 고성군 행사 일도 담당해야 한다. 결국 곽미희 감독은 학부모들과 일일이 연락하며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요일과 시간을 정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모여 아이들을 지도한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다보면 훌쩍 퇴근 시간이 넘어가지만 그래도 곽미희 감독에게 퇴근이란 없다.

곽미희 감독이 이끄는 이 팀은 이번 대회에 고성FC라는 이름으로 출전했다. 그들에게 이번 대회는 너무나도 특별하다. 다른 축구 클럽은 1년에도 여러 번씩 대회에 출전하지만 고성FC가 1년에 나갈 수 있는 대회는 딱 이 대회 뿐이기 때문이다. 고성FC는 고상군 체육회가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지만 무료로 운영되는 팀이라 상황이 열악하다. 타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나갈 형편이 안 된다. 숙식비와 버스 대절비 등은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올해로 고성군에서 7년째 열리고 있는 이 대회에만 나간다. 곽미희 감독도 “차량 지원 등을 생각해 보면 다른 대회에 나갈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이 산골 마을에서 군은 적극적으로 축구를 보급하고 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성인 취미반까지 개설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풍족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곽미희 감독은 “경기도나 경상권 강팀과 비교하면 실력은 한참 떨어진다”면서 “대회에도 더 많이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팀 훈련은 물론이고 축구 개인 레슨까지 받는 도시 아이들과 비교하면 실력 차이가 크다. 하지만 애들이 워낙 축구를 좋아하고 착하다. 그런 매력 때문에 이 팀을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중학생 선수들을 맡았다가 이제 초등부까지 맡은 지 3년이 됐다. 초등학생 저학년 위주로 선발해 이 선수들을 쭉 성장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왕년의 스타’ 곽미희 감독은 현재 고향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

강원도 산골 마을의 ‘선생 곽미희’ 이야기
이날 경기에서 고성FC는 서울은평FS와 상대했다. 고성 시골 아이들에 비하면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상대팀 선수들은 확실한 ‘도시 아이들’이다. 경기 전부터 고성FC 학부형들은 “열 골만 안 먹으면 다행이다”라고 웃었다. 그들에게 승패는 큰 상관이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곽미희 감독과 아이들이 행복하게 축구를 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압도적인 실력차가 예상된 경기에서 고성FC는 선전했고 딱(?) 두 골 만을 내주며 0-2로 패했다. 곽미희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격려했다. 그는 “열 골을 먹어도 괜찮은 경기였는데 아이들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해줬다. 감동을 받아서 울 뻔했다”고 말했다.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 서울의 잘 나가는 초등학교 선생인 김봉두는 오지의 시골 분교로 발령된다. 이 영화는 ‘선생 김봉두’가 시골 아이들과 함께하며 느끼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곽미희 감독이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와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와 다르지만 그를 보니 딱 ‘선생 김봉두’가 떠오른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자축구 1세대 공격수 곽미희는 이제 고향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1년에 딱 한 번밖에 대회에 나갈 수 없는 팀이지만 고성FC는 오늘도 곽미희 감독과 행복하게 공을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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