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정과 함께 포즈를 취한 한승수 통역(왼쪽)의 모습. ⓒ FC안양

[스포츠니어스|안양=전영민 기자] 축구팀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 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팬들까지. 축구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선수단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고 지원하는 구단 직원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승수 FC안양 통역 겸 매니저 역시 그라운드 밖에서 구단을 위해 열심히 뛰는 여러 직원들 중 한 명이다. <스포츠니어스>는 17일 수원FC전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한승수 통역 겸 매니저를 안양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갑다.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FC안양에서 통역 겸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한승수라고 한다.

통역 겸 매니저라면 두 배는 더 바쁠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요즘은 팀 분위기가 좋아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통역 업무를 맡고 있지만 과거에는 선수로 활약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나이로는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축구를 했다. 학년 상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린 시절 브라질 유학을 갔다 와서 고등학교 때 유급을 해야 했다. 6년 동안 브라질에서 축구 유학을 했다. 귀국 후 서울 경희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브라질은 어떻게 건너가게 되었나.

브라질 소로카바라는 팀에서 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안양시 공무원이시다. 당시에 시청에서 일을 하셨는데 지인 중 한분이 아버지에게 "자네 아들 축구하지 않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안양시와 소로카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소로카바 팀을 추천해주셨다. 이후 부모님과 대화를 나눈 끝에 브라질 유학을 결심했고 그렇게 12살 때 혼자 소로카바로 떠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먼 곳으로 가게 되었다.

소로카바가 상파울루주에 위치한 도시다. 그래도 규모가 꽤 되는 도시인데 도시 전체에 한국인이 나 혼자밖에 없었다. 굉장히 외로웠다. 한국에 1~2년에 한 번씩밖에 못 왔다. 전화비도 상당히 비쌌다. 내 기억으로는 1분에 5천원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전화도 3개월에 한 번씩 밖에 못했다. 가족들이랑 이메일도 많이 하지 못했다.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브라질에 동양인이 꽤 있긴 하다. 일본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중국인이 많다. 그런데 한국인은 그 당시만 해도 별로 없었다. 자연스레 브라질 친구들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우리 집에 가서 주말 보내자", "훈련 끝나고 같이 놀자"라며 먼저 다가와줘서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차별도 있긴 했다. 경기 도중에 참 많이 싸웠다. 경기를 하다가 상대 팀 선수들이 "일본인 꺼져라"라고 욕하는 경우도 많았다. 15살 때는 상파울루에서 프로 팀들이 모두 참가하는 큰 대회를 했는데 경기 도중 또 "일본인 죽어라"라는 욕을 들어서 바로 보복하고 퇴장을 당한 경험도 있다.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인종차별은 아무것도 아니다. 총을 든 강도들에게 두 번이나 소지품을 털린 경험이 있다. 한 번은 친구와 교회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었다. 당시가 오후 세 시였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든 강도 세 명이 다가오더니 우릴 둘러싸더라. 그리고 나서는 "지갑을 꺼내라"라고 해서 지갑을 줬다. 그런데 지갑을 뺐더니 "경찰에 말하면 죽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가더라. 그래서 강도들이 가자마자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랬는데 경찰이 안 왔다.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학교 앞에서도 강도를 만난 적이 있다. 사립학교는 치안이 좋지만 공립학교는 그렇지 못하다. 내가 다니던 공립학교는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에 위치해있었다. 그 학교에 입학하면 '바보인 채로 들어갔다가 도둑놈이 되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내가 살던 동네가 안 좋았다. 그만큼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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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했다.

그래도 소로카바에서 생활하며 가끔 한국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소로카바 축구단이 통일교가 소유했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故 문선명 총재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나. 그래서 팀 사장으로 가끔씩 한국 사람이 오긴 했다. 아 물론 나는 통일교를 믿지는 않는다.

그렇게 브라질에서 지내다가 고등학교 때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경희고등학교를 갔다. 그런데 대회를 뛰다가 부상을 당해서 축구를 그만뒀다. 재활을 했는데 회복이 안되더라.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포틀랜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어학 연수를 했다.

처음에는 영어를 진짜 못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ESL이라는 시험에서 레벨 8에 도달해야 하는데 내가 레벨 1이었다. 그런데 레벨 1반에 앙골라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앙골라가 포르투갈어를 쓰지 않나. 그래서 그 친구들과 상당히 친해졌다. 어쨌든 그곳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영어를 익혀 누나가 사는 호주 시드니로 가게 되었다.

시드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누나의 말에 부모님의 부담도 덜어드릴 겸 호주행을 선택했다. 호주에서도 고생을 했다. 고깃집에서 불판도 닦아보고 호텔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를 병행하며 맥컬리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호주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은 감정이 없다. 내가 미국, 호주, 브라질, 필리핀, 앙골라에 살아봤는데 호주가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다. 동양인이 많이 사는 나라임에도 부당한 대우를 많이 겪었다.

의외의 사실이다. 그런데 도대체 안양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호주에서 살다가 이후에 필리핀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편입을 해서 다바오라는 도시에 있는 한 대학의 호텔경영학과를 갔다. 그런데 영장이 날라왔다.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역은 아니었다. 선수 시절 입은 어깨, 발목 부상으로 4급 판정을 받았고 그렇게 공익으로 안양시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부서는 국제 교류팀이었다. 그때 내가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었다. 스페인어는 정식으로 배워본 경험은 없지만 포르투갈어와 매우 유사하기에 가능했다. 어쨌든 당시 내 나이가 25살이었다.

내가 25살이다. 25살에 4개 국어를 할 수 있었던 당신이 부럽다.

국제 교류팀이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한 부서였다. 안양시의 국제 교류 관련 이메일, 행사 업무, 스케줄 관리를 다 내가 맡았다. 또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번역 업무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2013년에 안양이 창단을 하고 나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려고 하는데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안양 구단이 시청에 "외국어를 잘하는 공익 요원이 있다고 들었다"라고 문의를 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지원 근무 형태로 안양시청과 안양 구단을 왔다 갔다 하며 일하게 되었다.

프로 축구팀에서 일했던 공익은 당신이 유일할 것 같다.

안양에 와서 처음 만난 외국인 선수가 대전에서 '박은호'라는 이름으로 뛰었던 바그너다. 박은호는 이전에 한국 경험도 있었고 재밌는 친구였다. 착하기도 정말 착했다. 또 펠리피라는 선수도 있었다. 펠리피가 덩치는 컸지만 굉장히 젠틀한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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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외국인 선수가 있나?

팀을 떠난 선수들 거의 모두 현재까지 연락을 하며 지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역시 루키안이다. 우리 팀에는 6개월밖에 없었지만 루키안과 원래 알던 사이였기에 더욱 그렇다. 현재 인천유나이티드 피지컬 코치로 있는 바우지니가 2016년에 안양에서 일했다. 바우지니랑 루키안이 막역한 사이라서 바우지니를 통해 루키안을 알게 됐다.

사실 바우지니는 내가 소로카바에 있을 때 그곳에서 피지컬 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바우지니가 한국으로 오며 인연이 이어지게 됐다. K리그에 활약하는 브라질 축구인들끼리의 모임이 있는데 나도 모임에 참석한다. 루키안 외에는 브루닝요도 기억이 난다. 브루닝요도 소로카바에서 함께 훈련을 하고 같이 경기에도 뛰었던 선수다. 브루닝요가 안양에 오기 전에는 플라멩고에서 뛸 정도로 브라질 내에서는 그 실력을 인정받는 선수였다. 아, 미국 출신의 오스틴 베리도 연락을 한다. 베리가 현재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MLS 신시내티에서 피지컬 코치를 하고 있다.

소로카바에서 맺은 인연들이 한국에서도 이어지다니 신기하다.

지금 뛰는 알렉스도 소로카바에 있었던 선수다. 나는 기억을 못했는데 알렉스는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 내가 소로카바 15세 팀에서 뛸 당시 알렉스는 18세 팀에서 뛰고 있었다. 알렉스가 나보다 한 살 형이다. 알렉스가 안양으로 이적하고 나서 "널 알고 있다. 소로카바에서 뛰지 않았냐"라고 먼저 말을 꺼냈다.

경남과 부산에서 뛰었던 뽀뽀도 소로카바에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사이다. 뽀뽀는 나보다 훨씬 형이다. 당시 나는 유스팀에 있었지만 뽀뽀는 성인이었고 1군에서 활동했다. 비록 나이 차이는 꽤 났지만 뽀뽀와 정말 친하게 지냈다. 소로카바에서 뛸 때 항상 밥도 같이 먹었다. 뽀뽀가 한국으로 이적하고 난 이후에도 연락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억하기 싫은 선수도 있나?

당연히 있다.

그게 누군가?

조시엘이다.

조시엘이라면 김종필 감독이 혀를 찼던 선수 아닌가. 

걔는 진짜 골머리가 아픈 애였다. 나랑도 한 번 싸울뻔했다. 나를 완전히 무시하더라.

본인을 도와주는 통역사인데도 말인가?

나는 항상 조시엘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다. 나는 통역하는 사람이고 너를 도와주는 일을 맡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시엘이 나한테 "웃기지 마라. 너는 그냥 구단의 앞잡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너무 화가 나서 조시엘과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의무팀장님과 루키안이 옆에서 우리를 말렸다.

조시엘은 정말 통제불능이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루키안은 정말 순하고 젠틀한 친구였다. 그때 루키안과 조시엘이 아파트 바로 앞집에 살던 사이였다. 그런데 조시엘이 루키안을 참 귀찮게 했다. 루키안이 아내와 어디를 가려고 나서면 조시엘이 그 상황을 두고 보지 못했다. 루키안을 가만두지 않았다. 조시엘이 항상 루키안과 루키안 아내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루키안 아내도 조시엘에게 질려버려서 루키안한테 "쟤랑 다니지 말아라. 이상한 애다"라고 말했다. 조시엘과는 연락 안 한다. 걔랑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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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지금 외국인 선수들은 참 순한 것 같다.

팔라시오스와 알렉스가 참 착하다. 팔라시오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라 스페인어를 쓰지만 브라질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고 포르투갈에서도 뛰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어를 잘한다. 물론 나도 스페인어를 할 수 있기에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가끔 두 선수가 생활 면에서 문제가 있으면 전화가 오곤 한다. 또 관리비를 내는 방법을 잘 몰라서 한 달에 한 번 관리비를 내주러 내가 같이 가기도 한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른 팀 통역들도 하는 기본적인 업무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안양에서 굉장히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중간에 안양을 잠시 떠났었다고 들었다.

2017년 2월 앙골라 루안다에 위치한 대한민국 대사관에 행정원으로 가게 됐다. 소집해제 이후 안양에서 통역으로 계속 일을 하다가 2016년 말에 행정원 공고가 뜬 것을 봤다. 그래서 '설마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한 번 지원을 해봤다. 나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행정원 업무에 합격을 했고 아내와 함께 앙골라로 가게 됐다.

대사관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대사관의 행정 업무, 시설 관리, 스케줄 관리, 대사님 운전 기사 역할까지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루안다에 도착한 후 아까 말한 미국에서 만났던 앙골라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미국에서 만났을 때는 앙골라에서 왔다고 해서 되게 못 사는 친구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다들 펜트하우스에 살고 아버지가 앙골라 정부 부처의 장관일 정도로 잘나가는 친구들이었다. 집에 차가 다섯 대였다. 그 친구들이 미국에서 만났을 때 "나 전세기타고 여기 왔어"라고 말했던 것이 '허풍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본 앙골라는 어땠나?

너무나 열악했다. 앙골라가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다.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가면 어느 날은 재료가 있고, 어느 날은 없고 그랬다. 하루는 달걀을 사러 갔는데 달걀이 며칠 후에나 들어온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식료품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40분 거리에 위치한 중국 마켓으로 가야 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던 중국인은 있더라.

살던 집은 좋았다. 하지만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서 하루에 정전이 적어도 10번은 됐다. 또 일 처리도 늦었다. 앙골라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조금 있더라. 어느 날은 에어컨을 고쳐야 해서 에어컨 기사를 불렀는데 1주일 뒤에나 왔다. 그래서 에어컨을 점검하더니 "이거 가져가서 수리해야겠는데?"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고 바로 가져가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가져가면 될 걸 다음 주에 다시 와서 가져간다. 수돗물에 석회가 많아 양치를 할 때도 마지막에는 수돗물이 아니라 꼭 생수로 입을 헹궈줘야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건가?

그렇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앙골라에 북한 사람들도 많았다. 한 번은 아내와 함께 마트를 갔는데 아시아인들이 있더라.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한국말로 "동양인이네?"라고 말하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쟤네 남조선 아새끼들 아니네?"라는 답이 돌아오는 것 아닌가. 소름이 돋았다.

다음 날에 대사관 사람들한테 가서 그날 일을 말했다. 그랬더니 대사관 직원들이 "조심해라. 납치해간다"라고 충고를 해줬다. 그날 이후로 아내가 집 밖에를 못 나갔다. 당시 앙골라와 북한이 군사적 교류가 많다고 들었다. 지금은 UN 제제로 인해 교류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지만 그때는 북한과 앙골라가 친밀해서 북한 사람들이 앙골라에 상당히 많았다.

결국 아내가 더 이상 앙골라에 못 살겠다고 말했다. 또 마침 아이가 생겼다. 그래서 한국으로 왔다. 더불어 우연치 않게 내 후임으로 안양 통역 일을 하게 되신 분이 내가 돌아올 시기에 더 이상 못 하겠다고 일을 그만두셨다. 그래서 귀국과 동시에 다시 안양에 돌아가게 됐다. 그때가 2017년 8월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안양에서는 현재 통역 겸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

맞다. 매니저 일도 같이 하고 있다. 경기 중에는 통역과 선수 교체 등의 일을, 경기장 밖에서는 팀 스케줄 조정, 호텔 예약, 선수들이 식사할 식당 예약, 그밖에 다양한 결제 업무까지 많은 일을 한다. 전지훈련을 갈 때도 전지훈련장 섭외부터 숙소 예약까지 할 일이 많다. 나처럼 통역과 주무 일을 같이 하는 직원이 있는팀이 몇 팀 안 되는 것으로 안다. 그래도 다른 직원들이 많이 도와줘서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다.

ⓒ FC안양

그렇다면 궁금한 게 있다.

뭔가?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으니 월급도 두 배인가?

그렇진 않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팀 통역들이 받는 보수에 비해 조금 더 받는 것 같다. 많은 차이는 아니다. 정말 아주 조금 더 받을 뿐이다.

조금 섭섭할 것 같다.

두 가지 일 외에 선수 영입 작업에 참여할 때도 있다. 경기운영팀장님과 외국인 선수 영입 이야기를 많이 한다. 브라질 선수를 영입할 경우에는 브라질 현지 사이트와 구단의 수준 등 정보를 팀장님께 제공해드린다. 프로필, 선수 경력 등의 사소한 정보가 팀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2017년 초반에는 이영민 감독님과 함께 브라질에 가서 선수를 뽑으러 다니기도 했다. 당시 현지 구단들과 연락을 하고 스케줄을 짜는 등 일을 맡았다.

앙골라 대사관에서 맡았던 업무들도 그렇고 당신은 멀티 플레이어인 것 같다.

그래도 올 시즌이 제일 뿌듯하다. 팀 분위기가 정말 좋다. 감독님과 선수들 사이에도 벽이 없다. 의사소통도 많이 한다.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보면 올해는 운동장에서 선수들의 얼굴에 정말 웃음꽃이 넘쳐난다. 생활적인 측면에서나 운동장에서나 팀 분위기가 정말 좋다.

김형열 감독님이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굉장히 프리하다. 되게 잘해주신다. 팔라시오스와 알렉스도 본인들이 안다. 감독님이 좋은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 번은 알렉스가 내게 "김형열 감독님처럼 외국인 선수에게 잘해주는 분은 없다. 다른데 가면 외국인 선수들이 푸대접 받는다"고 말하더라. 물론 감독님도 엄격할 때는 엄격하시지만 외국인 선수들이 감독님의 마음을 알기에 더욱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팔라시오스와 알렉스가 감독님이 자신들을 가족같이 대우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김형열 감독을 중심으로 팀이 똘똘 뭉친 것이 보인다.

감독님과 함께한 지 1년이라는 시간이 되어 간다. 이제는 감독님이 말을 하지 않으셔도 감독님의 생각을 조금은 읽을 수 있는 정도는 된 것 같다. 팔라시오스와 알렉스에게도 감독님이 원하는 플레이를 내가 눈치껏 주문한다. "감독님이 이런 플레이를 좋아한다"고 훈련 때에도 말해준다.

팀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얼마 전 안산전에서 경기 시작하기 전에 서포터스가 우리를 향해 응원가를 불러주는데 소름이 돋더라. 선수들도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는 감독님이 코칭스태프까지 모든 인원들을 모아 파이팅의 의미로 함께 점프를 하자고 해서 감동을 받았다. 원래 코칭스태프들은 경기가 끝나면 바로 라커룸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우리 팀이 승격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분위기가 너무 좋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명 할 수 있다.

우연한 기회로 안양과 인연을 맺은 한승수 통역 겸 매니저는 이렇게 누구보다 안양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수 출신인 그는 코칭스태프와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또 한국인 선수들과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매니저로서 맡은 바 업무에도 충실하고 있었다. 이렇듯 잘 나가는 안양의 배경에는 한승수 통역 겸 매니저와 같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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