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지도자 변신한 ‘전어’ 박성호 “감독으론 가을에만 잘하면 안 되죠”

가을이 돼 박성호를 직접 만났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그룹 ‘쿨’의 김성수가 “와우, 여름이다”라고 외쳐야 여름이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선수가 골을 넣어야 여름이 마무리 되고 가을이 시작한다. 바로 박성호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에게 늘 ‘가을 오피셜’은 박성호가 전했다. 2012년 전반기 19경기에서 단 1도움에 머물며 온갖 비난을 온몸으로 감수해야 했던 박성호는 그해 9월 이후 정규리그에서 5골을 뽑아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더니 10월 열린 경남과의 FA컵 결승전에서는 극적인 결승골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8월까지 단 세 골에 머물렀던 그는 9월 8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뽑아내더니 이어 벌어진 FA컵 4강 제주전에서도 결승골을 터뜨렸다.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9월 30일 인천 원정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돼 14분 동안 두 골을 넣으며 팀의 귀중한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수원과의 홈 경기에서 후반 막판 믿을 수 없는 동점골을 뽑아내 또 한 번 팀을 패배의 수렁에서 구해내며 2-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2013년 FA컵 포함 7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가을 사나이’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줬다.

가을만 되면 펄펄 나는 이 선수를 우리는 ‘가을 전어’라고 불렀다. 그가 골을 넣어야 우리는 가을이 왔음을 느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을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박성호가 그라운드를 떠난 뒤 나는 가을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박성호를, 아니 가을을 찾아 떠났다.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난 박성호를 오랜 만에 만나니 이제야 가을이 온 것만 같았다. 그를 인천에서 만났다. 가을 냄새가 물씬 났다.

박성호는 2017년 은퇴 이후 오랜 만에 언론 인터뷰에 임했다. ⓒ스포츠니어스

반갑다.
나도 반갑다. 오랜 만이다.

가을이다.
그런 것 같다. 당신이 이렇게 나를 찾아오다니 가을은 가을인 것 같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애매모호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9월부터 11월 중순까지가 가을이다. 왜냐하면 내가 딱 그 시기에 잘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주장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인가.
인천이다. 요즘 인천 송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U-12세 감독을 하다가 요즘에는 U-15세 아이들도 지도하고 있다.

벌써 감독이 된 건가.
2017년 성남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은퇴했다. 사실은 은퇴를 더 미루고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더라. K리그에서 노장 선수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길을 비켜줘야 하는 시대가 됐다. 아쉽지만 2017년 성남에서의 플레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걸 경험하고 있다. 유소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이다.

혹시 감독이 돼서도 가을에만 잘 하는 거 아닌가.
그건 안 된다. 그러면 6개월 단기 계약을 자주 해야 한다. 성적이 위험한 팀에 가서 생존 시키고 그런 거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도자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가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사계절, 아니 더 나아가 몇 년의 계획을 세워 이뤄내야 한다. 예전에는 선수 입장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다.

포항 시절 박성호의 모습. ⓒ프로축구연맹

소리소문 없이 은퇴해 아쉬웠다. 어쩐지 요즘 K리그에서 가을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구단을 돌아다녔다. 어느 한 팀의 상징적인 선수가 되지 못했다. 안양에서 데뷔해 2년을 있었고 이후 부산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뛰었다. 그 다음에는 대전시티즌에 4년 있었고 포항스틸러스에는 3년 있었다. 이후 울산과 성남에서도 각각 1년씩 있었다. 프로라는 게 무섭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재계약 협상을 하는데 여기에서 협상이 안 되면 정리하고 딱 나와야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다. 아쉬운 건 현역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만한 ‘고향팀’이 없었다는 점이다.

2017년 이후 K리그에서 보이지 않아 해외로 진출한 줄 알았다.
해외에 나가서 1~2년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것도 잘 안 됐다. 2017년 시즌이 끝나고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한 뒤 1년 동안은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걸 하고 다녔다.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골프도 배웠다. 지인이 주로 축구 쪽에만 있어서 사회에 적응하자는 마음으로 비축구인들을 많이 만났다.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만나 조언과 도움을 얻었다. 작년이 딱 2018 러시아월드컵 시즌 아니었나. 축구를 보는 게 싫어 우리나라의 월드컵 조별예선 세 경기만 보고 축구는 아예 멀리했다. 일부러 기사도 찾아보지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으니까 일부러 멀리하게 되더라.

하지만 당신은 다시 축구계로 돌아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지 않은가.
올해부터 다시 축구계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영상도 많이 찾아봐야 한다. 외국 영상도 검색해 본다. 내가 이 중에 접목할만한 건 접목해 훈련에 반영한다.

다시 가을이 왔다. 가을에 ‘전어형’을 만나니 너무 반갑다.
나에게 가을은 정말 특별했다. 가을만 되면 펄펄 날아다녔다. 내 생일이 7월말인데 생일이 지나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주변에서도 “여름만 지나면 너한테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말씀해주셨다. 내 별명이 ‘가을 전어’가 된 건 포항 시절부터였는데 나는 그전부터 날씨가 시원해지면 더 강해졌다. 아마도 좋은 팀에서 좋은 동료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을에 더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을에 유독 잘 풀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심리적인 건가. 날씨 때문이었나.
심리적인 게 컸던 것 같다. 희한하게 봄과 여름에 부진하다가 이제 가을이 되면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그게 신기했다. 한 시즌을 치르면 똑같은 팀과 돌아가면서 경기를 하지 않나. 분명히 봄과 여름에 다 만났던 똑같은 상대 수비수들인데 가을만 되면 ‘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을이 되면 좋아지는 건지 상대가 가을쯤 되면 체력이 떨어지는 건지 헷갈렸다. 은퇴를 했지만 지금도 가을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별명이 ‘가을 전어’였다. 전어를 정말로 좋아하나.
나도 그 별명이 생기고 전어라는 생선을 자세히는 처음 알았다. 그전에는 ‘집 나간 며느리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봤지만 전어라는 생선을 잘 몰랐다. ‘가을 전어’라는 별명이 생긴 이후 이 생선이 친숙해졌고 그러면서 처음 먹어봤다. 이제는 가을만 되면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나에게는 친숙하고도 맛있는 생선이다. 여기 옆 소래포구에 가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K리그에 ‘어류’가 많다. 가물치도 있고 흑상어도 있는데 전어는 강렬하지는 않아도 가장 친숙한 별명이다.
별명이 멋있는 것도 좋지만 재미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은퇴할 때까지 별명 없이 선수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은데 나는 그래도 별명을 만들어 놓고 은퇴했으니 영광이다. 다른 ‘어류’ 선배님들도 많지만 나는 그냥 ‘전어’가 아니고 ‘가을 전어’다. 예전에 팬들 중에는 “왜 가을에만 그렇게 하느냐. 다른 계절에도 잘 좀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물론 봄과 여름에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별명 앞에 계절이 붙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에 다른 ‘어류’ 선배님들의 멋진 별명보다도 더 만족한다.

봄과 여름에는 왜 힘을 받지 못했나. 정말 가을이 돼야 지방이 풍부해지는 전어처럼 가을이 돼야 꼭 당신의 득점력도 풍부해졌다.
동계훈련이 끝나고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생긴다. 해외로 전지훈련을 가면 날씨가 선선할 때 훈련한다. 터키나 유럽 쪽으로 많이 갔다.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즌이 시작될 때 한국에 오면 환경에 적응하는데 영향이 있더라. 아마 핑계일 테지만 그라운드가 딱딱하고 날씨가 추워지면 몸이 뻣뻣해진다. 나도 늘 ‘왜 봄만 되면 컨디션이 떨어질까’ 매 시즌 고민했다. 이유를 파악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핑계를 찾게 되더라.

만약에 한국이 사계절이 아닌 선선한 가을 같은 날씨가 1년 내내 지속됐다면 당신은 반 니스텔루이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지금보다는 더 잘하지 않았을까.

그는 무려 K리그에서만 17년을 활약했다. ⓒ프로축구연맹

당신은 나와 같은 1982년생 동갑이다. 그런데 내 동갑내기가 벌써 이렇게 은퇴를 할 나이라는 게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에 바로 프로팀에 입단했다. 안양LG 소속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였다. 내가 입단했을 때가 최용수 감독님이 막 안양에서 일본으로 진출하실 시기였다. 조광래 감독님께서 최용수 감독님이 달고 있던 등번호 10번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당연히 내가 주전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저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기회를 한 번 잡아보고 싶은 선수였다. 그런데 10번을 달고 있으니 부담감이 엄청났다. 그것도 최용수라는 최고의 선수가 달고 있던 등번호였으니 기분이 어땠겠나. 그게 벌써 18년 전 일이다.

이 정도면 정말 축구 원로다.
당시에 훈련할 때마다 맨날 내 유니폼이 없어지더라. 안양LG 최용수가 달았던 등번호 10번 유니폼은 누구라도 탐 낼만한 것 아닌가. 내 등번호가 10번이니 누가 그렇게 내 유니폼을 훔쳐갔다. 그래서 매번 (김)동진이 형의 4번 유니폼을 입고 훈련했다. 10번 유니폼을 입고 훈련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프로에서 10번을 너무 일찍 달아서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최고의 시즌은 언제였나.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말 축구를 즐겁게 했던 때와 많은 걸 이뤄서 행복했던 때가 따로 있다. 전자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대전에 있을 때였다. 대전은 팀이 약했고 내가 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결과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겼다. 물론 결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강팀과 격돌하다보니 결과보다는 내용을 즐길 수 있었다. 그때는 축구가 참 즐거웠다.

후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언제였나.
포항에 있을 때였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다. 포항은 워낙 명문 팀이고 항상 우승권을 다투는 팀이어서 압박감이 심했다. 골을 넣지 못하면 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공격수는 비난 받는 건 당연하다. 나도 당시에는 골을 넣거나 목표를 이뤄내면 행복하다는 감정은 잠깐이었고 ‘다행이다’라고 안도했다. 내년 시즌에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더 컸다. 하지만 이때 K리그에서 우승도 했고 FA컵도 두 번이나 들어올렸다. 프로 세계에서 이런 걸 이룰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나는 분명히 행복한 선수였다.

나는 2012년 당시 FA컵 결승 경남과의 경기에서 당신이 터트린 연장 결승골을 잊을 수 없다.
그 골은 내 인생 최고의 골이었다. 그 경기를 하기 일주일 전부터 합숙을 하면서 준비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AFC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면서 리그 성적이 좋지 않았고 나도 공격 포인트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FA컵에서의 선전이 분위기 반전의 발판이 됐다. 당시 황선홍 감독님도 준우승 경험만 있었고 우승 트로피가 없어서 간절했다. 이 경기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준비했다. 당시 우리는 이명주나 황진성이 제로톱을 서기도 하면서 흔히 말하는 ‘스틸타카’를 할 때였는데 그 경기를 앞두고는 그런 걸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면 뭘 준비했나.
당시에는 상대인 경남도 멤버가 좋았다. 까이끼도 있었고 윤일록 같은 빠른 선수도 전방에 있었다. 역습이 부담되니 황선홍 감독님은 ‘롱볼 축구’를 준비하셨다. 위험 지역에서는 무조건 사이드에 길게 때려 주는 축구를 준비해서 나갔는데 그런 플레이 자체가 안 됐다. 우리 선수들이 잘하는 플레이가 아니어서 고전했고 오히려 경남에 기회가 더 많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전력에서는 우위에 있어 승부차기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심리적으로 승부차기에 가면 우리가 불리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당신은 그 경기 연장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넣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연장전에서도 상대 골키퍼인 김병지 선배님께서 “성호야. 승부차기 가자”고 말했다. 경기 막판 시간이 촉박해 상대 골킥 상황에서 내가 공을 가져다 주기도 했는데 김병지 선배님이 “승부차기 가서 승부보자”고 하시더라. 마지막 연장 후반 1분이 남았을 때 속으로 ‘할 수 있다’는 기도를 하면서 뛰었다.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고 연장에서 경기를 끝내고 싶었다.

결승골 순간을 기억하나.
물론이다. 당시 백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림 같았다. 보통 백헤딩을 하면 그 이후 공의 방향을 놓치는데 그날은 포물선으로 그 공이 골문 구석으로 꽂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다 보였다. 우리 부모님도 인천에서 포항까지 오셨고 우리 홈 구장에서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어 축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그는 이 시절부터 ‘가을 전어’라는 별명을 얻기 시작했다. ⓒ프로축구연맹

이듬해 K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된 포항과 울산의 리그 최종전에서도 당신의 활약은 돋보였다. 김원일의 결승골 당시 공식적인 어시스트를 기록한 건 당신이었다.
맞다. 공식적으로 내 어시스트다. 그런데 사실 내 슈팅이 빗맞았다. 더 세게 찼어야 하는데 너무 세게 차면 골대를 넘길 것 같아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힘을 뺐는데 그게 (김)원일에게 어시스트가 됐다. 의도한 어시스트는 아니었다. 사실 그 장면 바로 직전에 내가 넘어지면서 슈팅을 했던 게 들어가지 않아 아쉬웠다. 힘든 상황에서 터닝 슈팅을 날렸는데 그게 상대에 맞고 맞고 굴절되면서 다시 우리가 슈팅을 날렸다가 마지막에 원일이한테 걸린 거다. 그것도 사실은 (신)영준이와 ‘더블 슛’이었다.

역사에는 김원일의 결승골로 남게 됐다.
굉장했던 경기였다. 한 시즌에 FA컵 우승과 K리그 우승이라는 더블을 경험하게 됐다. 선수들도 우승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지만 우승은 하늘이 찍어준다는 말을 믿게 됐다. 지금처럼 특정팀이 우위에 있어서 K리그를 계속 주도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울산만 조금 돋보였을 뿐 우리와 서울을 비롯한 팀들의 실력이 다 비슷했다. 사실 리그 마지막 몇 경기가 남았을 때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울산과의 승점 차이도 있고 우리는 이미 FA컵 우승을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리그에서는 2위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K리그 역사상 최고의 뒤집기 승부였다.
그런데 울산이 한 경기 두 경기 하면서 승점을 쌓지 못하고 우리는 승점을 쌓아 나가게 됐다. 우리한테 확률이 10, 20, 30%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천운이 따른 상황이었다. 최종전을 앞두고 강철 코치님께서 당시 숙소에서 엄청 큰 뱀을 봤다는데 그런 게 행운의 징조 아니었을까. 몇몇 선수는 “부모님이 꿈에서 뭘 봤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했다. 우리가 우승을 할 하늘의 뜻이었다.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경기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남긴 당신은 K리그에서 도대체 몇 년 동안 있었던 건가.
경찰청 시절까지 포함하면 17년 동안 있었다.

정말 오래 했다. 특히나 외국인 선수들이 즐비한 공격진에서 국내 공격수가 이렇게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놀랍다. 이렇게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
내가 ‘대박 선수’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흔히 말하는 ‘중박’짜리 선수였다. 꾸준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늘 감독님들 성향에 내가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17년 동안 프로에 있으면서 함께 한 지도자가 10명이 넘는다. 이 분들은 다 성향이 다른데 성향을 맞추지 않아 손해 보는 선수를 많이 봤다. 기량은 특출난데 플레이 스타일을 고집하거나 감독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철저하게 감독님의 성향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버리고 원하는 걸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 생활을 참 잘한다. 이걸 우리 조성룡 기자가 들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팬들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뛸 때만 본다. 나는 현역 시절 가장 아쉬웠던 평가가 ‘헤딩만 하는 선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헤딩을 정말 싫어하는 선수였다. 나하고 단 한 시즌이라도 함께 보낸 선수들은 내가 발로 하는 플레이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 거다. 나는 경기장에서의 플레이만 보는 팬들에게 ‘롱볼’을 따내 헤딩을 해야 하고 크로스에서도 헤딩을 해야 하는 선수로만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했던 동료들은 그래도 내가 기술이 뛰어난 선수라고 인정한다. 그래서 내가 프로 무대에서 오래할 수 있었다고 본다.

박성호는 K리그에서 무려 6개 팀을 거쳤다. ⓒ프로축구연맹

나도 190cm의 장신인 당신이 헤딩을 즐겨하는 선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발로 하는 플레이를 많이 해오고 좋아했다. 그런데 포항에 있을 때 황선홍 감독님은 조금 다른 걸 바라셨다. 포스트 플레이를 해야 했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황선홍 감독님의 현역 시절과 같은 포지션이어서 많이 배웠다. 공격수가 불필요하게 기술을 부릴 필요는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고 빨리 다른 선수에게 공을 연결하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대전에서는 측면으로 가서 돌파도 하고 그런 플레이를 즐겼는데 처음에는 포항으로 가 그 적응을 하는 게 힘들었다.

공격을 하다 보니 현역 시절 욕도 많이 먹었다.
나를 싫어하는 분들도 많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특히 더 많았던 것 같다. 부산과 포항에 있을 때는 정말 욕을 많이 먹었는데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잘 못했다. 나도 이건 인정한다. ‘내가 잘하는데 왜 욕을 하지’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항상 죄송했고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 비난하는 글 하나만 인터넷에 올라와도 그게 신경이 쓰였다. 경기장에서 환호해 주시는 수백, 수천 명의 목소리보다 나를 싫어하는 분 한 명의 글이 더 가슴에 꽂혔다. 하지만 주변에서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그래도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게 다 박성호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도 있었다.
기억한다. 내가 대전에서 뛸 당시였는데 개그맨 박성호 씨의 유행어를 따라 ‘이게 다 대전시티즌 박성호 때문이다’라는 패러디가 돌 때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래도 나름대로 대전에서 활약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만약에 내가 부진했더라면 나쁜 의미로 들었을 텐데 그때는 그냥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당신이 은퇴하면서 ‘가을 전어’도 이제 K리그 경기장에서는 볼 수 없게 됐다. 그래도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전어 형’이다.
못 하려면 나처럼 확 못하다가 잘 할 때는 확 잘해야 이런 별명이 생길 수 있다. 요즘 술자리에서도 가끔 지인들이 “야, 전어야”라고 부른다. 기억을 해주셔서 감사하다. ‘전어’라고 불러도 좋다.

앞으로는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나.
처음에 지도자 제안을 받은 뒤 여차저차 해 U-12 감독을 하게 됐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과연 이 어린 선수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서 선택하게 됐다. 어린 시절 반복적인 훈련을 많이 해왔는데 지금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마 요즘 다른 지도자들도 다 비슷하게 생각할 거다. 더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창의적인 선수를 키워내고 싶다. “넌 이렇게 해야 돼”가 아니라 “넌 이 상황에서 어떤 플레이를 할래? 한 번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 과거에는 감독이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진학 문제까지도 책임을 졌다.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선수들의 의견을 묻고 소통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박성호는 이제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도전 중이다. ⓒ프로축구연맹

이제 가을이 왔다. 새벽녘엔 제법 쌀쌀한 바람이, 어느덧 당신이 좋아하던 그 가을이 왔다. ‘가을 전어’인 당신이 가을을 잘 즐기는 법을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가을이 되면 K리그 순위 경쟁이 치열해진다. 여름엔 경기장에 가면 더워서 힘들지만 가을에는 축구를 보기에도 딱 적합하다. 전북과 울산의 선두 경쟁이 올해는 유난히도 흥미롭다.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 가셔서 축구를 즐겼으면 한다. 그리고 시원해지면 맛있는 게 많아진다. 소래포구에서 대게와 대하 축제도 한다. 가을에 가족과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 아, 전어도 꼭 드시라.

마지막 질문이다. 가을이 오면 당신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은퇴식을 하지 못해 팬들에게 그 동안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 그렇게 벌써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는데 이 자리를 통해서라도 나를 좋아해주셨거나 아니면 욕하셨던 모든 K리그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K리그에서 17년 동안 활약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팬 여러분들이 성원해주신 덕분이다. 17년 동안 K리그에 있으면서 많은 응원을 받았다. 앞으로 좋은 지도자가 돼 다시 K리그에서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박성호는 K리그에서 조용히 은퇴했다. 17년 간 뛰었던 선수치고는 화려하지 않은 퇴장이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 여전히 박성호가 떠오른다. 문득 그의 근황이 궁금해져 찾아갔다가 또 한 번 그 때 그 시절 박성호가 썼던 ‘가을의 전설’을 떠올리게 됐다. 아마 내년 가을에도 박성호가 떠오를 것이고 내후년에도 이 무렵이 오면 박성호를 떠올릴 것이다. ‘가을 전어’ 박성호의 임팩트는 시간이 지나도 K리그에 계속 남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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