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은퇴’ 오장은 “발가락 절단 장애도 신이 주신 선물”

오장은과 수원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눘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에서 오랜 시간 헌신하고도 은퇴식도 없이 사라지는 선수들이 많다. 은퇴식이 열린다는 건 그만큼 K리그에서 존경받았다는 것이고 모범이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행운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팀 상황과 선수 개인의 상황이 모두 잘 맞물려야 성대한 은퇴식이 치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장은은 성공한 선수다. 그가 뛰었던 두 팀에서 은퇴식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K리그에서만 무려 291경기에 출장한 이 전설적인 선수를 직접 만나 은퇴에 대한 소감을 물어봤다. 오장은의 얼굴 표정은 무척 좋아보였다.

반갑다. 은퇴를 축하(?)한다.
고맙다. 요즘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더 바쁘다. 은퇴를 발표하고 현역 시절을 뒤돌아보고 있다. 현역 시절에 고마웠던 스승과 지인 분들을 찾아 뵙고 있다. 쉴 틈이 없다. 아마도 지인들을 만나고 인사드리는 이 시기가 지나면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다.

누구 누구를 만났나.
수원삼성과 울산현대에서 은퇴 행사를 열어줬다. 그래서 경기장에 가 예전 구단 직원 분들과 단장님, 선수들, 감독님 등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수원삼성 시절 스승이었던 서정원 감독님도 찾아 뵙고 왔다.

서정원 감독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감독님은 집에서 푹 쉬고 계신다. 편안해 보이셨다. 앞으로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 같다. 워낙 좋은 감독님이셔서 빨리 현장으로 복귀해 그 노하우를 선수들에게 전수해주셨으면 한다. 김호곤 단장님도 만날 예정이고 오늘은 현역 시절 같이 축구를 했던 조진수 형도 만날 계획이다.

오장은은 수원과 울산에서 은퇴식을 열었다. ⓒ프로축구연맹

은퇴 발표 시기가 애매하다. 원래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신은 7월에 은퇴를 발표했다.
내 생일이 7월 24일인데 그날 얼떨결에 은퇴했다. 생일이라 지인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다. 요즘 통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나는 여름 이적시장에서 팀을 알아보고 있었고 7월 말까지가 여름 이적시장이라 새 팀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올 시즌 막판까지는 선수로 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몸도 정말 열심히 만들었는데 7월 말이 가까워질 때까지 팀을 구하지 못해 ‘이제는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하려는 건 내 욕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에 지인들에게 연락이 와 안부를 묻기에 ‘이제 선수는 그만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게 은퇴 발표가 돼 버렸다. 그래도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니 마음이 놓아지더라. 이 사실이 알려져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하게 됐다.

마음을 놓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시즌을 홀가분하게 마무리하고 은퇴를 발표한 게 아니라 새 팀을 알아보다가 여의치 않아 은퇴한다는 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할 것 같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는 새 팀을 최선을 다해서 알아봤다. 지난 달까지도 새 팀에서 뛰고 싶어 내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고 있었다. 현역 시절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을 때 몸 만들던 곳으로 찾아가 계속 개인 훈련을 했다. 그래도 새 팀을 못 찾으니 미련이 없더라. 새 팀을 알아보기 위해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서 내가 여러 구단과도 접촉했다. 에이전트를 통하기보다는 내 일이니까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직접 찾아가서 무릎만 안 꿇었지 사정까지 해봤다. 그 정도로 했는데도 안 된 거라 미련은 없다. 내 자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새 팀을 알아보며 몸 관리를 해서 그런지 지금도 몸이 좋아 보인다.
몸을 엄청 만들어 놨다. 은퇴 행사에 가면 다들 “몸이 어떻게 현역 때보다도 더 좋냐”고 한다. 그만큼 준비를 했었다.

이제는 현역 선수가 아니다. 은퇴 이후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내가 마지막 3~4년은 부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하루하루 훈련을 할 때나 경기에 나갈 때면 ‘오늘 또 아프면 어떻게 하지’라는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렇게 3~4년을 지냈다. 그런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마음이 너무 편하다. 아내도 너무 좋아한다. 아내는 내 얼굴만 봐도 오늘 컨디션을 안다. 인상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 ‘오늘 몸이 안 좋았다보다’라고 알 정도다. 내 마음도 편하지만 아내가 마음이 편해 보인다.

이제 금전적인 고민도 해야 한다. 더 이상 선수로서 연봉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 하지만 선수 시절에 열심히 했고 돈은 또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거다. 지금은 돈을 쫓다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판단이 냉정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은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사람도 만나보고 정보도 듣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 싶다.

오장은은 대구와 울산, 그리고 수원에서 활약했다. ⓒ프로축구연맹

대구에서 데뷔했고 울산에서 4년을 뛰었다. 수원에서는 5시즌 동안 활약했다. 이 팀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팀은 어디인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현역 시절 받았던 그 어떤 질문보다 은퇴하고 받는 이 질문이 더 어렵다.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만큼이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대답해 달라. 사실 이게 가장 궁금해서 당신을 찾아왔다.
대구는 일단 나를 K리그에 데뷔시켜준 고마운 팀이다. K리그에서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해준 팀이고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이 됐다.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울산에서는 국가대표 생활도 쭉하고 주장도 했다. 여러 의미가 있는 팀이다.

울산에서 뛸 때가 가장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 대구 시절에는 젊은 패기로 뭣도 모르고 축구를 했는데 울산은 축구선수로서 전술적인 면이나 여러 가지가 성숙됐다. 나의 전성기 시절이었다. 수원은 다 갖춰지고 나서 마지막에 여유 있게 베테랑다운 활약을 할 수 있었던 팀이었다. 그런데 사실 수원에서는 힘들었던 기억도 많긴 하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울산이나 대구에서 뛰었을 때 수원 원정을 가면 부담이 별로 없었다. 수원은 무조건 상대를 이겨야 하는 강팀이었고 그 상대는 오히려 그런 부담이 덜했다. 수원을 상대하는 팀은 동기부여가 200%다. 항상 상대는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수원에서 뛸 때는 상대 마음을 잘 알아 더 부담이 됐다. 한 경기 한 경기 할 때마다 열정적인 팬들이 있으니 힘이 나지만 그런 압박감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많은 사랑을 받는 팀이니 비난과 비판도 당연히 감수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돌아오는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수원은 최고의 팀이었으니 이런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했다.

그런 부담감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 시절 나와 호흡이 가장 잘 맞는 파트너와 뛰었다는 건 행복했다. 바로 (이)용래다. 포지션상 나와 가까이 있어야 했던 용래하고는 호흡이 정말 좋았다. 용래도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는데 나하고 잘 맞는다고 이야기하더라. 생각하는 것과 추구하는 게 모두 다 나와 비슷한 선수였다. 같은 포지션에서 서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정말 잘 맞는 동료였다.

당신의 국가대표 시절 활약은 어땠다고 자평하고 싶나.
국가대표로 14경기를 뛰었다. 2007년 아시안컵에도 나갔고 동아시아선수권대회도 뛰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만족스러운 활약은 아니었지만 대표팀에서 뛸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화력하고 긴 경력은 아니었다. 그래도 경기에 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 못지 않게 싸우려고 했다. 특히 대표팀 경기는 더 그랬다.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성실하고 잘 싸우는 선수였다고는 생각한다.

K리그에서 데뷔하기 전에는 J리그에서 먼저 뛰었다. 당시 16세 8개월의 나이로 J리그에 데뷔해 최연소 출장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엄청난 기록이다.
FC도쿄 소속이었다. 그때는 아시아 쿼터가 없었다. 외국인 선수 세 명은 항상 최고의 선수들로만 채워졌다. FC도쿄에는 브라질 선수만 세 명이 있었고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FC도쿄와 준프로 계약을 맺었다. 그 어린 선수가 최고의 브라질 선수 세 명의 자리를 넘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시기에 정말 축구를 많이 배웠다. 어린 나이에 수준 높은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수비 가담부터 전술적, 기술적인 능력도 많이 키웠다. 2군에서 훈련하면서 브라질 선수 중에 한 명이 징계를 받거나 부상을 당하면 언제 한 번 경기에 나가볼까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어린 나이에 J리그 무대에 데뷔하지 않았나.
브라질 선수들이 빠져도 내가 경기에 나갈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나는 나이 어린 2군 선수였다. 그런데 당시 FC도쿄 하라 감독이 나를 좋게 봐줬다. 브라질 선수 한 명이 갑자기 엔트리에서 빠지게 되면서 나에게 “1군 선수단으로 합류하라”고 해줬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감바오사카와의 원정경기였다. 당시 감바는 J리그에서 강팀이었다.

오장은은 K리그에서만 291경기에 출장했다. ⓒ프로축구연맹

16세의 나이에 프로 무대에 서게 된 심정이 어땠나.
그때 우리가 감바를 상대로 0-5로 지고 있었다. 감독님은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 나에게 기회를 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 16세,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였다. 경기 종료 20분을 남기고 그라운드에 투입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뛰어만 다녔다. 경기를 하다가 내 머리가 터져서 붕대를 감고 뛰었다. 팬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경기였다고 했다. 0-5로 지고 있는데 저런 한국 꼬맹이가 나와서 머리에 붕대까지 감고 뛰니까 FC도쿄 팬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다. 이 경기가 참 기억에 남는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홀로 생활하는 게 참 힘들었을 것 같다.
일본 생활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일본에 가기 전 벨기에에서 6개월 동안 혼자 생활했다. 그때 많이 힘들어 봐서 일본 생활은 벨기에 생활에 비하면 수월했다. 벨기에에서는 아침에 혼자 빵에 초콜릿 발라 먹고 어학원 갈 때 그 빵을 또 싸 갔다. 그래서 점심도 빵으로 대신하고 오후에 훈련을 하러 갔다. 저녁에는 혼자 밥을 차려먹었다.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외로워서 울기도 많이 했다. 그 나이면 다들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을 나이 아닌가. 힘들었지만 벨기에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쳤다. 일본에서는 그나마 살만했다.

존경스럽다. 역시나 선수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경기는 FC도쿄에서의 그 데뷔전인가.
그 경기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경기가 정말 많다.

그렇다면 정말 기억에 남는 한 경기만 꼽아달라.
한 경기만은 못 꼽는다. K리그에서 뛴 경기만 291경기다.

그러면 팀별로 한 경기씩만 말해보자.
대구 시절부터 이야기해보자. 2006년 9월 전북과의 경기였다. 당시 핌 베어백 국가대표팀 감독이 전북에서 뛰는 (염)기훈이 형을 보러 왔었다. 그런데 그날 내가 해트트릭을 했다. 이후부터는 베어백 감독이 나를 보러 대구로 오더라. 그리고는 대표팀에 뽑혔다. 그 경기를 잊을 수 없다.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와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대표팀에 갔다. 대표팀 경기 중에는 가나와의 평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6년 10월에 열린 내 국가대표 데뷔전이었다. 대구 소속이었던 시절인데 자신감이 넘칠 때였다. 대구에서의 활약도 좋았고 성인 대표팀에 뽑히며 자신감이 올라 있는 상태에서 생각보다 긴장도 안 하고 경기에 임했다. 경기평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가서 내 결승골로 베이징궈안을 이겼던 경기를 잊을 수 없다.

오장은은 현역 시절 내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다. ⓒ프로축구연맹

그렇다면 수원삼성 시절에는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나나.
2012년 FC서울과 슈퍼매치를 하는데 내 ‘슈터링’으로 우리가 1-0으로 이겼다. 멋진 골은 아니었지만 라이벌을 잡는 결승골을 넣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자랑스러웠다. 이날 관중만 해도 4만 4천여 명에 육박했다. 그런 관중 앞에서 결승골을 넣는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다.

짧게 생활한 성남과 대전에서의 좋은 기억은 없나.
그 시절에는 아픈 기억밖에 없다.

무려 15년의 기나긴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다. 돌이켜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기뻤던 순간도 있지만 아쉽거나 후회되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경기에서 지거나 실수를 한 기억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건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내 몸만 괜찮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가장 아쉬운 건 역시 부상이다.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안 좋으면 그것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2014년에 갑상선에 이상이 생겼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었다. 질병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는 건 너무나도 힘들었다. 계속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게 무릎 부상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몸 관리를 그래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관리를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게 아니라 질병이 찾아온 건 정말 예기치 못한 일이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 판정을 받고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쉬기만 하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하면 안 됐다. 운동선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 아닌가. 이 병은 심리적인 게 크다고 들었다. 그래서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물 속에 들어가 명상을 하기도 했다. 6개월 진단을 받았는데 그렇게 노력한 끝에 3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 3개월 동안 웨이트트레이닝도 못하고 몸 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근력을 비롯해 몸의 기능이 다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후 조급하게 마음을 먹고 무리하게 복귀를 하다 보니 바로 무릎에 무리가 왔다.

그때 더 푹 쉬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고 쉴 수가 없었다. 3개월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쉬었는데 구단 눈치도 보이고 감독님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래서 참고 했는데 그러다보나 덧나더라. 결국 무릎 수술까지 하게 됐고 수술 이후에도 무릎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현역 시절 마지막에 고생을 많이 했다.

오장은은 이제 기나긴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프로축구연맹

질병으로도 오랜 시간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당신은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한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발가락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줄 수 있겠나.
사람들이 보기엔 장애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장애? 뭐 정확히 말하면 장애이긴 하다. 나는 왼쪽 엄지발가락이 절단됐고 두 번째 발가락도 일정 부분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유치원 때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는데 그곳이 외벽 공사 중이었다. 나는 그걸 구경한다고 외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공사 현장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벽이 무너졌다. 그런데 벗겨진 외할아버지 슬리퍼를 다시 신겠다고 발을 내미는 순간 내 발 위로 한 번 더 벽이 붕괴됐다. 엄지발가락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다면 붙여서 회복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발가락이 깔려서 뭉개지면서 엄지발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엄지발가락이 조금만 더 잘렸다면 걷는데도 이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발가락도 발톱 부분은 절단했다. 축구를 할 때 디딤발인 왼쪽 발이 중요한데 나는 왼쪽 발이 온전하지 않다.

장애를 극복하고 선수로 성공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 상황에서 축구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대단하다.
어렸을 때는 그런 고민은 전혀 없었다. 이거 때문에 불편했던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들하고 놀이로 하는 축구에서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힘든 순간을 겪은 적은 있지만 어렸을 때는 괜찮았다.

그런 발로 계속 축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축구를 하면서 많이 뛰니까 충격이 오더라. 운동이 많이 하거나 비가 오면 아직도 발가락 쪽이 쑤신다. 성장기에는 그 통증이 더 컸다. 그래도 나의 이런 발가락 역시 신이 주신 선물이다. 그만큼 운동하는 내내 관리를 해야 했다. 일본에 있을 때도 무릎이나 허리가 아파서 검사해보면 아무런 원인이 없을 때가 많았다. 늘 주치의는 “발가락이 이래서 신체 균형이 틀어져서 그렇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계속 관리를 해야 했다. 지금까지 이런 발가락으로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더 부지런하게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축구를 하면서 왼쪽 발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늘 오른발은 축구화가 딱 맞는데 왼발은 축구화가 컸다. 왼발에는 축구화가 딱 맞는 느낌이 안 들어서 늘 고생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도 이것도 다 적응이 됐다. 발가락 쪽이 쑤시는 걸 빼면 참을 만했다.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소감이 어떤가.
은퇴 행사를 한 팀도 아니고 두 팀에서 열어줬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했다. 정말 복 받은 선수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게 은퇴 행사 없이 현역을 마무리하는 선수들이 많은데 수원과 울산에서 나를 초대해 주고 그런 자리를 마련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더군다나 울산에서 치른 은퇴 행사의 상대팀은 대구였다. 대구 주장에게 꽃다발도 받았다.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진 세 팀에서 축하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다.

아직 현역 중에 동갑내기 선수들이 많다.
그렇다. 울산에 내려가서 동갑내기인 (이)근호와 (김)창수, (강)민수를 만나 이야기했다. 먼저 은퇴한 선수로서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줬다. “너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선수 생활하라”고 말했다. (박)주영이, (김)승용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여전히 활약 중이다. 몸이 괜찮다면 오래오래 선수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염)기훈이 형도 어제 만났는데 그 형이 현역 때는 나보다 선배였지만 은퇴는 내가 선배다. 그래서 덕담도 해주고 응원도 해줬다. 은퇴 해보니까 지금 현역으로 활약 중인 선배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들이다. 내 친구들과 내 선배들이 더 오랜 시간 선수로 활약했으면 한다.

오장은과 수원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스포츠니어스

이제 현역에서 물러났다.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은퇴를 선언하기에 앞서 독일에 잠깐 다녀왔다. 일단은 선수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였는데 거기에서 유소년 시스템을 연수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서 독일에 있었다. 현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독일 5부리그에서 두 달 정도 훈련하면서 유소년 시스템을 관찰했다. 선수 등록 기간이 지나서 등록은 못하고 운동만 했다. 독일 축구를 잠깐 경험해보니 오히려 한국 축구가 더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리블과 잔기술은 오히려 한국이 더 화려한데 독일은 기본기가 좋다. 기본적인 컨트롤과 패스가 되니 전술이 매끄럽게 소화가 된다. 반면 한국은 기술은 좋은데 독일에 비해 기본기가 약해 전술적인 매끄러움이 부족하다. 독일에서 느낀 걸 가지고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의미인가.
지금은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그게 현실적으로 다 되는 건 아니다. 일단은 자격증을 차근차근 따야한다. 지금은 어디에서든 경험을 쌓고 싶다. 돈을 쫓는 것보다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 경험해 보고 싶다. 선수와 지도자는 또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보는 눈을 길러보고 싶다. 차근차근 경험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일단은 가족에게 충실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최근 3~4년 동안 나 때문에 아내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내와 가족들, 부모님들께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목표를 가장 먼저 세웠다.

당신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훗날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두 구단에서 은퇴 행사를 치러주셔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도 이 팀에서 뭔가 기억에 남아 있으니 이런 행사를 해주신 것 아닌가. 내가 골을 많이 넣고 화려한 플레이를 했던 공격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벽 수비를 했던 수비수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성실했고 한 경기를 하더라도 모든 걸 쏟아냈던 선수라고 이야기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한 선수였다. 그렇게 기억해 주신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다.

오장은은 그의 말처럼 화려한 선수가 아니었다. 몸을 날려 가장 극적으로 골을 막아내는 선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묵묵히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다. 성하지 않은 몸 상태로도 이렇게 오랜 시간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선수 생활은 존경받을 만했다. 그에게 찾아온 장애마저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극복해낸 이 선수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의미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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