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③] 조선 스포츠의 숨겨진 메카, ‘최학기 운동구점’


ⓒ 대한체육회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조선의 스포츠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한국 스포츠사를 이야기할 때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져 오는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때 본격적으로 한국에 근대 스포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수많은 한국 체육 단체의 전신이 그 당시에 설립됐다. 이들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기록과 영상 등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들이 어떻게 스포츠를 즐겼을까?’라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다. 분명 조선의 체육인들이 스포츠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가 필요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장비를 구해야 했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그들이 안정적으로 뛸 수 있는 자금과 환경이 필요했다. <스포츠니어스>는 이 단순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던 중 신기한 곳을 발견했다. ‘최학기 운동구점’이다.

종로구 중학동 최학기 운동구점을 아시나요
최학기 운동구점은 1920~30년대 서울 종로구 중학동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상점이다. 현재 많은 사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학기 운동구점이 한국 스포츠사에서 제법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최학기 운동구점은 말 그대로 운동구, 즉 운동장비를 파는 곳이었다. 하지만 장비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최학기 운동구점이 팔거나 만들어 낸 제품들은 한국 스포츠의 밑거름이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평축구’다. 1929년 10월 8일 경성군과 평양군의 맞대결은 지금도 전설로 전해지는 경평축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사용된 공은 최학기 운동구점이 직접 만든 ‘고려호’였다.

뿐만 아니라 농구, 야구, 정구 등 조선의 각종 스포츠에는 최학기 운동구점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현존하는 국내 산악단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양정산악회 역시 설립 초반 최학기 운동구점에서 장비를 구했다. 당시 양정산악회의 회원이었던 故고희성 선생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에도 등산장비점이 있었다. 호일산장, 최학기 운동구점 등에서 장비를 구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대회 후원에 이어 팀까지 만들었던 최학기 운동구점
최학기 운동구점은 조선 체육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경기를 주선하거나 후원했다. 1934년 조선인 선수로 이루어진 고려야구단과 문사철도야구단의 친선경기를 주선했고 중등정구연맹 교직원대회의 우승컵과 전조선중학급전문학교 농구대회의 팜플렛을 만들어 후원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도쿄 유학생 이주삼과 김유산이 부산에서 함경북도 웅기까지 도보 여행을 떠나자 운동화를 후원하기도 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스폰서 개념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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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야구단’을 만들기도 했다. 최학기 운동구점은 월성구락부라는 야구단을 조직해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조선의 야구단은 대부분 학생들이 중심이 되거나 YMCA와 같은 단체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최학기 운동구점은 기업의 후원을 바탕으로 야구단을 만들었다. 당시 기록 또한 ‘조선 안에서 상점이 야구팀을 조직해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월성이 효시다’라고 전한다.

월성구락부의 실력은 결코 다른 팀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 1932년 열린 제 13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청년부 결승에 진출한 전력이 있다. 조선과 경성에서 열린 수많은 대회를 후원했고 심지어 야구단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최학기 운동구점은 현대의 스포츠 산업을 일제시대에 조금씩 구현한 곳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학기 운동구점을 잘 모르고 있다.

스포츠 좋아하는 조선인들이 모인 공간
최학기 운동구점은 단순히 용품업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조선, 특히 경성 사람들에게는 친목의 장소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승팀 예상 투표’였다. 현재의 스포츠 토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제 12회 전조선축구대회를 비롯해 농구연맹전 등의 대회 우승팀을 맞추는 것이었다. 대회를 개최하는 단체들은 우승팀 예상 투표를 대부분 최학기 운동구점에서 개최했다. 최학기 운동구점은 우승팀을 맞추는 사람들에게 ‘메리야쓰’와 수건 등 각종 경품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좋아하는 조선 사람들은 최학기 운동구점에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상점에서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우승팀을 맞추는 투표에 참여하고 새로운 용품을 둘러봤다. 뿐만 아니라 최학기 운동구점은 ‘예매처’의 역할을 했다. 전조선축구대회를 비롯해 럭비, 역도, 권투 등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던 경기의 입장권은 최학기 운동구점에서 살 수 있었다.

또한 스포츠 소식을 빠르게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32년 조선체육회와 동아일보가 1월 24일 개최하려고 했던 제 8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는 한강이 완전히 얼지 않아 중지를 결정했다. 이 소식은 동아일보와 함께 사람들이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게재됐다. 그 중에는 최학기 운동구점도 있었다. 당시 조선 스포츠계가 최학기 운동구점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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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하이라이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남승룡과 손기정이 마라톤에 참가하자 동아일보는 속보를 대창양화점과 최학기 운동구점에 제공했다. 그리고 손기정이 금메달, 남승룡이 동메달을 획득하자 최학기 운동구점에 모인 조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의 스포츠 팬들이 중계를 보기 위해 각종 펍에 간다면 조선 사람들은 최학기 운동구점에 간 셈이었다.

우리는 이제라도 최학기 운동구점을 알아야 한다
아쉽게도 최학기 운동구점에 대한 기록은 1940년대 이후부터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기록을 찾아보면 최학기 운동구점은 경영 상 여러가지 어려운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방화다. 최학기 운동구점에서 일하던 한 소년이 대금 70여 원(현재 가치 약 3백만 원)을 횡령하고 해고 당하자 복직을 요구하며 용품 제조 공장에 불을 질렀다.

1938년에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당시 미국과 영국 등이 일제에 주요 물자를 수출하지 않자 일제는 가죽, 쇠, 고무 등의 사용을 통제했다. 이는 스포츠 용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언론은 ‘세계 수준에 향상 중이던 반도(조선)운동계에 적신호’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학기 운동구점 역시 “당장은 재고품이 있기에 괜찮지만 1년이 지나면 힘들어질 것이다”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시대 조선의 스포츠를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단체들 또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밑바탕이 됐던 스포츠 용품업체는 잘 모른다. 많은 이들이 최학기 운동구점이 조선의 스포츠 발달에 꽤 큰 역할을 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현대 스포츠 산업에서 용품 시장의 역할은 꽤 중요하다고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조선의 스포츠 역사에서도 용품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최학기 운동구점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평가는 진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수많은 조선의 체육인들이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때 그 뒤에는 최학기 운동구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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