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①] “첫 골이 터지면 가슴 속 태극기를 꺼내자”

오늘은 광복 74주년이다. 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짚어 봐야 한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오늘(15일)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한지 74주년이 되는 날이다. 핍박과 억압 속에서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도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있었기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광복절을 맞아 일제 강점기를 주목하려 한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시골 마을에서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펼쳤고 그 중심에는 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를 하나로 묶은 건 축구였다.

사천까지 전해진 3·1 운동 소식
1919년 3월 경남 사천. 3월 1일 전국적으로 펼쳐진 만세 운동은 마침내 사천까지 퍼졌다. 특히나 천도교 사천교구 책임자였던 장태영은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장태영은 아버지가 동학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천도교 손병희 선생과도 친분이 있었다. 서울로 향한 그는 천도교총본부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받아 다시 사천으로 향했다. 그는 혹시라도 사천으로 오는 길에 일본 순사를 만날 것을 대비,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왔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감추고 내려오다가 삼랑진역에서 일본 순사들의 삼엄한 검색을 당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이 버선 속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지 못해 가까스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장태영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사천으로 내달렸다. 독립선언서가 사천으로 돌아온 건 큰 의미가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만해 한용운은 사천 다솔사에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 독립선언서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크게 울려 퍼진 뒤 사천으로 돌아온 건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 시기 곤양면에서는 김진곤을 비롯한 네 명이 하얀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뒷면에서 ‘독립만세’라고 새겨 흔들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실제로 일제 고등경찰관계적록에는 ‘1919년 3월 13일 곤양면 송전리(松田里) 출신의 김진곤(金鎭坤)외 4명이 백지에 태극기를 그려서 한쪽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곤양주재소(昆陽駐在所)에 투입한 후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서부경남 최초의 독립운동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들의 만세 시위는 일본 경찰들을 당황시켰고 결국 주동 인물은 검거되고 말았다.

3.1 운동 당시 군중의 모습 ⓒ역사편찬위원회

“첫 골이 터지면 태극기를 꺼내주세요”
장태영은 사천에 무사히 돌아와 진주의 천도교 인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진주 쪽에서의 독립운동은 강대창과 황순주 등에게 맡겼지만 문제는 사천에서의 독립운동이었다. 장태영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사천시민들을 하나로 모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 김진곤을 비롯한 이들의 만세 시위 이후 일본 경찰의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장태영은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의 아들은 사천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의 졸업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태영은 이날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졸업식에는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윤조를 비롯한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을 따로 모아 독립운동 계획을 설명하자 이들 역시 비장한 각오로 장태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 등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임순백, 윤수상, 윤수, 김성언 등은 이윤조와 함께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들은 몰래 태극기 200여장을 손수 만들어 독립운동에 앞서 재학생들과 졸업생, 학부모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전했다. “내일 졸업식이 끝나고 축구경기를 할 예정입니다. 첫 골이 터지면 이 태극기를 꺼내 목 놓아 ‘독립 만세’를 외쳐주세요.”

일제는 3·1 운동 이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군중이 모이는 행사를 대부분 불허했고 그나마 열리는 행사 역시 일본 경찰들을 대거 배치해 독립 운동을 막고자 했다. 졸업식 행사 역시 안할 수는 없어 허가는 했지만 일본 경찰들이 배치돼 삼엄한 경비를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졸업식 이후 조금은 풀어진 상황에서 열릴 수 있는 행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축구였다. 사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졸업식 이후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친선 축구 경기를 열겠다고 학교 측의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사천초등학교에서는 이 역사적인 날을 기리기 위해 이런 재현 행사를 개최한다. ⓒ사천초등학교

역사엔 없지만 한국 축구사에 남을 가슴 벅찬 골
독립운동은 일제히 약속된 순간 물 밀 듯 밀려 나오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일본 경찰이 손 쓸 틈도 없이 대한 독립을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중이 이렇게 한 순간 폭발하기 위한 모두의 암묵적인 약속을 정하는 건 어려웠다. 다들 시계만 들여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누구 한 명이 “이제부터 독립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이들이 생각해 낸 게 바로 축구였다. 누구나 다 약속할 수 있는 ‘그 순간’을 축구 경기 도중으로 정하기로 했다. 애초에 축구는 정말 졸업생과 재학생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축구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은 독립 운동의 시작을 ‘첫 골’로 정했다.

첫 골이 터지면 다같이 가슴 속에 있는 태극기를 꺼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약속했다. 무려 200여 명이 뜻을 모았다. 물론 현장에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이 일을 알 리 없었다. 군중이 모이는 걸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업식이 조용히 마무리됐고 이어 친선 축구 경기가 열렸다. 졸업생과 재학생, 학부모들은 아무렇지 않게 축구 경기를 준비했다. 축구는 일제 강점기에도 막을 수 없는 행사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주는 출구였고 군중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축구, 아니 축구를 가장한 독립운동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긴장감이 흘렀다. 사람들은 언제 첫 골이 터질 지에만 집중했다. 첫 골이 터지는 순간 물 밀 듯 밀려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생각 뿐이었다. 이보다 더 첫 골을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이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첫 골이 터지자 약속처럼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그들은 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꺼내 들고 한이 서린 외침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첫 골이 터지고 한꺼번에 밀려온 이들을 보며 학교 측과 일본 경찰들은 당황했다. 무려 200여 명이 첫 골이 터지는 순간 하나로 뭉쳐 행동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역사에는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지만 한국 축구사에 이토록 뭉클했던 골이 또 있었을까.

오늘은 광복 74주년이다. 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짚어 봐야 한다.

‘그 골’과 ‘그 정신’을 기억하자
독립 만세 함성에 놀라 뛰어 나온 일본인 교장은 급하게 교직원들을 호출했다. 그리고는 “주동자인 이윤조를 잡아오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이후 사천헌병분대장 집으로 가 “우리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살육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철퇴하라”라고 쓴 종이를 돌멩이에 묶어 던지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 당시 출동한 헌병대에 박기현이 붙잡혔고 그는 고문을 당한 후 진주감옥에서 징역 3월형의 처벌을 받기도 했다. 사천공립보통학교에서 터진 첫 골 이후 이들의 용맹함은 지역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또한 학생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지역민들의 분노도 커졌다.

이후 사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더더욱 거세졌다. 한 달 뒤 인부 100여 명이 기습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펼쳤고 이 독립 운동은 더더욱 번져 수백여 명 규모로 커졌다. 사천읍과 가까운 정동면과 삼천포 지역에서도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삼천포공립학교 졸업식에서도 청년대 등 5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4000여 년의 역사국으로 오늘날 이 지경이 웬일인가! 천부의 자유권은 사(私)가 없거늘 우리 민족은 무슨 죄로 욕을 받는가!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의 우리 소리에 바다가 끊고 산(山)이 동(動)하네’ 라는 독립가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런 이들의 목숨을 건 독립 운동이 있었기에 우리는 광복 74주년을 맞을 수 있었다. 현재 사천 기미년독립만세운동재현추진위원회는 매년 3·1절을 맞아 사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독립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펼치고 있다. 한 시골 마을의 축구 경기에서 터진 한 골로 가슴 속에 품은 태극기를 꺼내들고 수백 명이 독립 운동을 시작했던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과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맞은 광복절에 우리의 이런 대단한 역사를 한 번쯤 기억해 보면 어떨까.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인 골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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