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광주 박진섭 감독의 ‘겨울 양복’을 따라 입어봤습니다

"아 덥다" ⓒ구독자 제공

[스포츠니어스 | 안양=김현회 기자] 20일 안양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FC안양과 광주FC의 하나원큐 K리그2 2019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이 경기는 올 시즌 K리그2의 판도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승부였다. 광주는 올 시즌 개막 이후 19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 중이었고 안양은 4연승 중이었다. 광주가 이기면 올 시즌 승격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고 안양이 승리를 거둘 경우 광주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승부였다. 두 팀에는 물론 K리그2 전체를 놓고 봐도 중요한 승부였다.

이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셨다. ⓒ스포츠니어스

그는 정말로 견딜만 했을까
이 경기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 대목은 또 있었다. 바로 박진섭 감독의 겨울 정장이었다. 올 시즌 무패 행진이 이어지자 박진섭 감독은 개막전 때 입었던 겨울 정장을 계속해서 입고 있었다. 7월 한 여름 더위에도 겨울 정장은 물론 스웨터에 겨울 양말까지 겨울 복장 그대로다. 그에게는 이 옷이 행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면 땀에 찌든 이 옷을 세탁소가 잘 맡겨 두었다가 다음 경기 때 또 다시 입는다. 그는 “덥지 않느냐”는 질문에 늘 “별로 덥지는 않다”면서도 연신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정말 덥지 않을까. 견딜만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박진섭 감독과 똑같이 입고 같은 공간에 있어보기로 했다. 안양으로 나서기 전 집에서 겨울용 정장을 꺼냈다. 겨울용 양말을 신고 옷장 깊숙이 박아둔 스웨터까지 꺼냈다. 조끼로 대신할까하다가 박진섭 감독의 고통을 함께 느껴보기 위해 긴 팔 스웨터를 꺼내 들었다. 알러지에 민감한 나는 스웨터를 입자마자 재치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뭐 집에서는 참을 만했다. 그런데 집밖으로 나가기 위해 에어컨을 끄고 신발을 신는 순간 느꼈다. “아, 이거 오늘 큰일났다.” 잠깐 신발을 신는 사이 땀이 주르륵 흘렀다.

경기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동차에 에어컨을 켜 둬 살만 했다. 그리고 경기장에 도착해 취재석으로 가는 길에 만난 이들이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말 하지 않아도 겨울 정장을 꺼내 입은 이유를 아는 이들이 많았다. “박진섭 감독 코스프레네요”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를 하며 “안 더워요?” “괜찮겠어요?”라는 걱정의 말을 전했다. 아무 말 없이 웃는 이들도 있었다. 옷의 두께를 만져보고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이들도 있었다. 경기장에 입장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7월 복날에 이런 옷을 입고 온 나를 주시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스포츠니어스

앉아만 있어도 땀이 차오른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딱 박진섭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트랙에서 방송사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웃으며 나를 맞았다. 보자마자 내 옷을 만져보더니 “오늘 고생 좀 하시겠다”고 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종희 캐스터도 “와, 보통 아니네”라고 웃었다. 박진섭 감독에게 “이런 두꺼운 옷 입고 그라운드에서 버틸 수 있는 비결이 있느냐”고 묻자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90분 동안에는 더운 거 별로 몰라요. 그런데 경기가 딱 끝나면 그때부터 더워요.” 박진섭 감독은 웃으면서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나는 자켓은 계속 벗고 있다가 경기가 시작할 때 입는다. 오늘 고생하시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고생’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상윤 해설위원은 “아, 나도 이렇게 입고 올 걸. 김현회, 남바완이에요”라고 껄껄 웃었다.

경기 전 만난 안양 김형열 감독도 “오늘 날도 더운데 고생많겠다”고 말했다. 김형열 감독은 “박진섭 감독의 징크스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좋은 기운을 이어가려면 세탁소에 맡기지 말고 안 빤 옷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웃었다. 경기 전 잠깐 만난 조규성은 “안 그래도 오늘 우리가 박진섭 감독 겨울 정장을 벗겨드리러 왔다”면서 “기자님도 오늘 우리가 한 골 넣을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으시면 된다. 아마 몇 겹은 벗겨 드릴 것”이라고 웃었다. 아마 그와 이 약속을 했더라면 나는 일곱 겹의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을 것이다. 무서운 사람 같으니.

경기 내내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나마 터치라인 앞에 서 계속 선수들을 지휘한 박진섭 감독보다는 활동량이 덜했지만 여기저기 취재를 위해 움직이고 앉아서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7월의 겨울 정장은 아무리 장마철이라 바람이 분다고 해도 고문에 가까웠다. 도시락을 먹는데 이게 땀인지 밥인지 모를 정도였다. 잠깐만 움직여도 땀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정장은 그렇다 쳐도 스웨터는 몸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서 박진섭 감독은 이 옷을 입고 시종일관 서서 선수들에게 소리쳤다. 아 목석 같은 사람.

3월 사진이 아니다. 7월 20일 사진이다. ⓒ스포츠니어스

90분의 ‘겨울 정장’, 인생 돌아보는 시간
경기 내내 물을 세 통이나 들이켰다. 도저히 가만히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잠깐 자켓을 벗으려고 하니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조성룡 기자가 옆에서 잔소리를 했다. “벗으시면 반칙이죠. 저기 박진섭 감독은 계속 자켓 입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할 말이 없어 물을 한 통 더 들이켰다. 바로 옆에서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쭈쭈바를 빨며 경기를 지켜보는 한 초등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나에게는 가장 부러운 녀석이었다. ‘아 쭈쭈바 먹고 싶다, 아 옷 벗고 싶다, 아 집에서 누워서 에어컨 틀어놓고 유튜브로 ‘인피쉰’ 빨무 동영상 보고 싶다’ 행복이란 건 특별하지 않았다.

33도의 이 더위에 스웨터와 겨울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양의 경기력은 대단했다. 무려 7골이나 퍼부으며 광주를 7-1로 제압했다. 골이 터질 때마다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며 들썩이는 관중 사이에서 더위는 극에 달했다. 좀 덜 움직여 주시지…. 관중이 일어설 때마다 뜨거운 바람이 내 주위를 돌았다. 후반전 들어서는 숨 쉬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심판의 민트색 옷이 포카리 스웨트로 보였고 주심의 휘슬은 아이스크림처럼 보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옷을 입고 7골이나 허용한 박진섭 감독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박진섭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괜히 내가 이런 짓을 해 부정이 탄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경기가 7-1로 끝나고 내 복장을 한 번 더 살펴본 뒤 기자회견장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이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대패를 당한 박진섭 감독에게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자회견장에 들어간 조성룡 기자가 이런 말을 전했다. “감독님이 그래도 이렇게 져 시원하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이제 그는 일찌감치 챙겨놓았던 여름용 정장을 입고 선수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19경기 연속 무패를 상징하던 겨울 정장과는 작별할 시간이다. 그는 속이 쓰릴 법도 하지만 ‘겨울 정장 징크스’를 취재하러 온 한 방송사 매체와도 친절히 인터뷰에 응했다. 대패가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얼굴에 흐르는 건 땀이 아니라 눈물이다. ⓒFC안양

박진섭의 ‘간절함’을 체험해 본 시간
경기가 끝난 뒤 나는 그대로 녹초가 됐다. 대승을 거둔 안양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는 아무리 에어컨을 세게 틀어도 몸의 열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19경기 동안 이런 옷을 입고 선수들을 지도한 박진섭 감독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경기력과는 전혀 무관한 징크스라지만 그는 이런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패를 지키고 싶어했다. 막상 겨울 옷을 입어보니 이 날씨에 이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진섭 감독은 이걸 매 경기 해냈다. 얼마나 무패가 간절했으면 이런 징크스에라도 기댔을까. 그리고 그는 K리그2 새 역사를 썼다.

그가 고집스럽게 입었던 겨울 양복은 단순한 징크스를 넘어 그의 간절함을 표현했던 것 아닐까. 19경기 무패 행진에 제동이 걸린 그가 이제는 좀 더 시원한 옷차림으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길 바란다. 또한 노약자와 임산부, 어린이들은 절대 이 여름에 이런 옷차림을 따라하지 않길 바란다.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참고로 안양 김형열 감독도 최근 연승을 이어가며 매 경기마다 같은 옷차림을 이어가고 있다. 여름 옷이다. 징크스가 알려지는 걸 대단히 조심스러워하지만 그도 한 번 분위기를 탈 때 입었던 옷은 계속 챙겨 입는 습관이 있다. 이대로 날이 추워질 때까지 안양의 연승이 이어진다면 ‘박진섭의 겨울 버전’이 등장할 수도 있다. 승부의 세계는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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