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화천=조성룡 기자]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조선시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꽃도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인용할 때가 많다. 특히 '뿌리'를 강조할 때 더욱 그렇다. 한국축구에서 뿌리는 무엇일까. 뿌리가 땅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뿌리를 이야기할 때 아래로 시선이 향하게 된다.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그 아래, K리그보다 더 밑에 있는.

한국 여자축구의 뿌리는 유소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학생 선수들이 여자축구의 뿌리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소연, 전가을, 서현숙, 이민아 등 모든 여자축구 선수들이 학생 시절을 거치며 선수로 성장해왔다. 이번에 할 이야기는 여자축구의 뿌리 이야기다. 과연 한국 여자축구의 뿌리는 탄탄하게 나무를 받치고 있을까?

떠나간 임이 다져놓은 포항의 뿌리

요즘 여자축구는 고민이 많다. 축구는 한국에서 인기 많은 종목이라고 하지만 여자축구는 다르다. 엄연한 비인기 종목이다. 비인기 종목이 최근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자축구 또한 그대로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고민이 바로 교육부의 정책이다. 최근 교육부는 학생 선수들의 합숙소를 폐지하면서 타 시·도 전학에 상당한 제한을 뒀다. 물론 교육부의 의도는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축구를 비롯한 비인기 종목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치명적이다. 선수가 살고 있는 곳에 진학할 수 있는 운동부가 없다면 그것은 선수 생활의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여자축구의 화두는 '지역 육성'이다. 적어도 한 광역 지방자치단체(지자체) 안에 선수가 고등학교까지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만들어 놓아야 제대로 된 선수를 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있는 팀도 운영이 쉽지 않은 마당에 지역에 초-중-고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은 난제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비교적 덜하는 곳이 있다. 포항이다. 포항은 대학 팀과 실업 팀이 없지만 그래도 학생 선수들이 진학 걱정 없이 꾸준히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각 단계별 학교마다 여자축구부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초등학교와 포항항도중, 그리고 포항여전고로 이어지는 포항의 여자축구 시스템은 제법 탄탄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이성천 감독이 있었다.

ⓒ 대한축구협회

故이성천 감독은 포항여전고의 감독이었다. 하지만 한 학교의 감독직만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포항의 여자축구 육성 시스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포항에서 발굴한 여자축구 선수 자원이 꾸준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포항여전고는 여자축구의 강호로 떠오를 수 있었고 지금도 탄탄한 선수 자원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상대초 유효준 감독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故이성천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축구 감독의 입장에서는 다른 학교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지역에서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 해서 자신의 팀 성적에만 신경쓰면 된다. 그런데 故이성천 감독은 그렇지 않았다. 포항 지역의 여자축구 선수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상대초에 다니는 선수들 이름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초, 항도중 감독과 축구 철학을 공유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했다. 함께 대화하며 많은 것이 통했던 지도자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안타깝고 故이성천 감독이 그립다."

ⓒ 대한축구협회

故이성천 감독은 포항의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그가 생각하던 마지막 퍼즐은 바로 실업 팀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포항에서 키운 여자축구 선수들이 꽃피기 위해서는 포항에 실업 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포항에 여자축구 실업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뿌리가 흔들리는 곳들,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여자축구

반면 포항과 대조되는 곳이 있다. 같은 영남 지역의 대구다. 올해가 시작되기 전 대구동부고 범세원 감독은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대구 또한 포항 못지 않게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대구 침산초와 상원중, 동부고로 연결되는 대구의 여자축구 육성 시스템은 좋은 선수들을 다수 배출했다. 하지만 최근 삐걱대기 시작했다. 상원중이 불미스러운 일로 해체됐기 때문이다.

상원중의 해체는 동부고로 안정적인 선수 수급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대구동부고는 올해 자칫하면 선수 부족으로 각종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대구동부고는 정상적으로 대회에 나올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동부고의 어려움을 알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것이 범 감독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 약화는 피할 수 없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구동부고는 연령별 대표팀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던 곳이었다. 이제는 쉽지 않다.

범 감독은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팀을 구성할 때는 지역 선수들을 중심으로 뼈대를 구축하고 일부 전학 선수들을 통해 전력을 강화한다. 그런데 교육부가 합숙소 폐지 등 선수들의 타 시·도 전학을 엄격히 제한한 상황에서 중학교가 해체됐다는 것은 선수 수급에 치명적이다." 평소 유쾌한 모습의 범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할 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대한축구협회

이는 대구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구의 경우 초-중-고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해 선수 수급과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학교가 많다. 여자축구연맹은 열악함 속에서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사실 운동부에 관심을 갖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종의 '보신주의'다. 굳이 운동부를 만드는 것은 위험 부담을 떠안게 된다는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축구연맹은 각고의 노력 끝에 몇 개의 학교와 여자축구부 창단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 미래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한 여자축구 관계자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다"라는 표현을 했다. 실제로 그랬다. 화천에서 만난 감독들은 하나같이 "선수가 부족하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선수 명단에도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숫자가 줄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여자축구의 뿌리는 말라죽을 것을 알기에 모두가 동분서주하고 있다.

K리그와 WK리그로 대표되는 한국 축구의 뿌리는 유망주다. 하지만 접근법이 쉽지 않다. 축구는 분명 체육의 카테고리지만 유망주를 육성하는 일은 체육과 교육의 카테고리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벌써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축구의 뿌리를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고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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