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의젓한 청년이 된 조민호는 또 다른 슛돌이를 키워내는 지도자로 성장하는 게 목표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과거 한 예능프로그램이 방영과 함께 큰 히트를 쳤다.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 축구를 즐기는 순수한 모습에 시청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도 경기에 패한 뒤 흘리는 닭똥 같은 눈물엔 뭉클함을 느꼈다. 그렇게 ‘날아라 슛돌이 1기’ 종영 후 대부분 평범한 학생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방송을 계기로 축구선수의 길을 택한 경우도 있다. 특히 명실상부 ‘슛돌이’ 에이스로 활약한 조민호는 성남일화천마 유소년 팀에 입단하며 팬들의 기대감을 샀다.

인생을 뒤바꾼 ‘슛돌이’와의 만남

다섯 살이던 2004년 당시 성남일화천마 유소년 취미반에서 축구를 시작한 조민호는 어느 날 코치의 제안을 받고 ‘슛돌이’ 오디션에 도전한다. 실력과 카메라 테스트를 통해 선수 선발이 진행됐는데 미니 경기에서 세 골을 넣으며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사실 이날 컨디션은 정말 별로였어요. 설 연휴를 앞두고 유치원에서 한복차림에 송편을 빚고 있다가 어머니랑 코치님을 따라 급히 경기 뛰러 갔거든요.”

“슛돌이 1기는 예능에 콘셉트를 뒀어요. 캐스팅 된 친구들을 보면 저마다 캐릭터가 뚜렷했죠. 그걸 보면서 ‘나는 오로지 실력으로 뽑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승준이처럼 잘생기지도 성우처럼 귀엽지도 않았으니까요. 방송출연이 확정되자 제 콘셉트를 두고 부모님의 고민도 깊어졌어요. 결론은 ‘실력으로 뽑혔으니 실력으로 보여주자’였죠. 그날로 아버지와 함께 리프팅과 패스, 킥 위주의 기본기 훈련에 몰두했어요.”

ⓒ 방송 화면 캡쳐

조민호의 아버지 또한 축구선수 출신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때 축구를 그만둬야 했기에 아들만큼은 꼭 성공한 축구선수로 키우고 싶었다. 손수 집에 골대를 만들어 축구를 가르칠 정도였다. 그렇게 그는 걸음마도 떼기 전에 축구를 먼저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접하고 연습도 많이 했기에 방송에서 실력이 도드라졌던 거 같아요. 어린 나이에 방송을 타고 게다가 가장 인기 있던 프로그램이었으니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봤어요. 그런 관심이 처음엔 마냥 좋았죠.”

성장통 그리고 감당할 수 없었던 부담감

종영 후 조민호는 감독과 선수로 연을 맺은 유상철을 따라 ‘유비 사커’에서 축구를 배웠다. 감독 유상철의 지도 아래 기본기는 날로 탄탄해졌고 실력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성남 집에서 센터가 위치한 서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왔다 갔다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집과 가까운 팀을 찾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테스트를 통해 성남일화천마 유소년 U12팀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축구를 한다면 꼭 성남에서만 하고 싶었어요. 원하던 팀으로 다시 돌아와 너무 행복했어요. 이때만큼 축구가 재밌었던 적도 없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초등학교 때만큼은 실력이 정말 좋았거든요. 또래에 비해 킥이 좋아 중앙 수비수와 미드필더 포지션을 겸하며 경기를 뛰었어요. 근데 풍생중 진학을 앞두고 키가 도통 크질 않더라고요. 결국 측면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포지션 변화와 함께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어려서는 축구에 자신이 있어 경기장에서 말도 많았고 리더십도 발휘했지만 중학교 진학 후 새로운 포지션에서 뛰려니 서투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앙 포지션에서만 뛰다보니 측면에서 수비하는 방법도 서툴렀고 오버래핑 타이밍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스로인 하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 방송 화면 캡쳐

스스로 돌아봐도 전국에서 스카우트를 받아 진학한 또래들에 비해 실력에서 객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동급생과의 경쟁에서 마저 뒤처지기 시작하자 축구를 향한 흥미는 점차 사라졌고 회의감도 깊어져만 갔다. 사춘기까지 찾아와 시도 때도 없이 축구하기 싫다고 떼를 썼다. 하지만 부모님은 축구선수 조민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관심은 이미 부담감으로 바뀐 상태였어요. 또래 친구들은 태권도나 수영,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반면 저는 하루 종일 축구만 해야 했어요. 친구들이 어울리고 놀러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일찍이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죠. 저를 향한 주변의 시선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가 느껴졌으니까요.”

“할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억누르고 참으면서 축구를 계속하는 것 말고는 없었어요. 기대와 부담감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제 처지가 서럽기까지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저보다 더 힘드셨을 거예요. 아들이 어렸을 땐 분명 재능 있어 보였는데 갑자기 축구하기 싫다 떼쓰고 근데 또 주변에서 거는 기대는 크고.. 부모님도 제가 축구 그만두는 걸 쉽게 포기할 수 없으셨을 거예요.”

다시 재밌어진 축구 하지만 이내 찾아온 시련

남모를 고충에 힘들었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도중에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없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안 나가던 새벽운동도 나가기 시작했고 훈련장에서도 간절함으로 무장해 최선을 다했다. 감독과 코치도 변화한 그의 노력과 성실함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부족한 실력을 하루아침에 메울 수는 없었다. 결국 풍생고 진학에 실패한 그는 중랑FC U-18에서 새 출발에 나섰다.

“주변의 시선과 부담감이 사라진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형들도 축구를 정말 잘했어요. 저희가 2016년엔 클럽팀 최초로 춘계연맹전에서 우승까지 차지했거든요. 가끔 고학년 경기에도 투입됐는데 결국 스스로 문제를 일으켰어요. 중랑은 운동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규율이 없으니 경쟁의식도 적었고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놀면서 쉬엄쉬엄 운동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분위기에 휩쓸린 거죠.”

“그러던 와중에 박형용 코치님이 팀에 새롭게 부임하셨어요. 오시자마자 가장 먼저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으셨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규율이 생겨났고 훈련장에서도 경쟁을 유도하셨어요. 자연스레 팀 전체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축구하면서 어디서도 배워보지 못한 부분을 저희 눈높이에 맞춰 쏙쏙 이해되도록 상세히 지도해주셨어요. 측면 수비수로서 필요한 능력과 움직임 등을 코치님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기 싫던 축구도 다시 재밌어졌다. 하지만 팀과 문제가 생겼다. 축구에 새롭게 눈뜬 시기였기에 팀을 옮겨서라도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축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억울한 부분이 있어요. 결국은 제가 축구를 그만둬야 해결되는 문제였어요. 어쩔 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복잡한 문제로 속 썩을 일이 사라져 후련하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로 축구를 할 수 없단 생각에 아쉬움도 컸어요.”

슛돌이에서 체대생 조민호로

이듬해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의 삶을 시작한 조민호는 체육대학 진학을 목표로 세우고 야탑고등학교에 전학을 갔다. 하지만 평생 해본 적이 없었던 공부를 막상 시작하려니 방법을 몰라 막막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좀이 쑤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만큼은 진학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체육부를 찾아갔다.

“체육대학 입시반을 맡고 계신 선생님께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선생님의 첫 질문이 ‘대학도 운동처럼 힘들면 포기할 거야?’였어요. 없던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오기도 있었지만 축구가 아닌 다른 운동은 처음해보는 거라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선생님께서도 제가 의외로 잘 따라오니까 어떻게 하면 체육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지부터 수행평가, 교내시험까지 상세히 챙겨주셨어요. 선생님께서 하라는 건 정말 다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했어요.”

“수시전형으로 5군데에 지원했는데 그 중 3개 대학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어요. 말 그대로 대학을 골라 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한 곳은 학과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대학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근데 다음날 담임 선생님께서 칠판에 큼지막한 종이를 붙이시곤 나가셨어요. 부실대학교 리스트였는데 거기에 세명대학교만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세명대 생활체육학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 방송 화면 캡쳐

그렇게 원하던 체육대학에 진학한 조민호에겐 예전부터 간직해온 소소한 바람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일반학생들과 어울리며 축구를 해보는 것이었다. “축구동아리에 가입해 새롭게 사귄 사람들과 함께 교내 리그도 뛰었고 전국 대회에도 나가봤어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기분도 새로웠지만 선수로 뛰면서 느껴야했던 경쟁의식도 또 누군가 지켜보며 기대하고 있다는 압박감도 사라져서 운동을 그 자체로 재밌게 즐길 수 있었어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같은 과 심지어 축구동아리 사람들 아무도 제가 슛돌이 조민호라는 걸 몰라요. 얼굴도 변했고 그렇다고 특이한 이름도 아니고 세월까지 많이 지났으니 잊혀지는 건 당연하죠. 그렇다고 제 입으로 말하기도 웃겨요. 한 번은 적당히 취했겠다 술자리에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용기 내 ‘사실 나 슛돌이 조민호야’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다들 취한 상태긴 했는데 다음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어요.”

아이들의 꿈을 심어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지난 1년 누구보다 신나게 대학생활을 만끽한 그는 올해엔 목표를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려 한다. 자신에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 학업을 병행하며 체육대학 입시강사부터 골프장, 스키장, 카페, 편의점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하지만 결론은 축구만큼 흥미를 느낀 건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 축구만 했으니까요. 그만두고 나니 오히려 흥미가 더 커지고 있어요. 작년 8월엔 대한축구협회 지도자 D급 과정을 수료했고 올해는 심판자격증에 도전해보려 해요.”

“이제 막 사회에 발걸음을 내딛은 만큼 뭐든 도전해보고 싶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군 입대가 예정돼 있어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최전방 부대에요. 사실 운동할 때부터 슬개골에 문제가 있었어요. 부분적으로 비어있고 닳기도 많이 닳았어요. 병원에서 증빙서류를 떼서 재검사를 받으면 3급 판정이 나온대요. 3급으로 분류되면 최전방은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가 군대에 가야 하는데 이왕이면 빡센 곳으로 다녀오고 싶어요.”

ⓒ 방송 화면 캡쳐

“9년 전 김종국 감독님께서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신 적이 있어요. 당시 제작진에서 깜짝 만남을 준비해 제가 오디션 지원자로 등장했는데 옛날에 같이 찍었던 사진과 함께 뒷면에 편지를 적어 전달해드린 적이 있어요. 시간도 워낙 많이 지나 당연히 버리셨을 줄 알았는데 그때 그 사진과 편지를 아직까지 지갑에 보관해서 다니신다는 걸 몇 년 전 방송을 통해 알게 됐어요.”

“아주 잠시 그것도 스쳐지나간 인연이었는데도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주시고 계서서 너무 감사했어요. 비록 그때 약속한 것처럼 훌륭한 축구선수로 성장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이제는 축구선수 조민호가 아닌 지도자 조민호가 되어 그때 김종국 감독님과 함께 쌓은 소중한 추억만큼 특별한 기억을 다른 유소년 선수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지도자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스포츠에는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축구로 인생을 배우며 성장한 어린 소년은 14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축구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어 한다. 축구가 지닌 그 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동시에 축구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어린 아이들은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슛돌이 조민호는 오늘도 축구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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