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동안 아홉 번의 도전 나서는 광주FC 박정수 이야기


[스포츠니어스|광양=조성룡 기자] ‘야… 이걸 어쩌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인터뷰이가 ‘오프 더 레코드’에 해당하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정말 쓸 내용이 없을 때, 그리고 사연이 구구절절 너무 많아서 쓸 내용이 버거울 정도로 많을 때다. 후자의 경우는 별로 없다. 과거를 돌아보면 전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을 만났다. 광주FC에 새로 입단한 박정수다. <스포츠니어스>는 광양에서 전지훈련 중인 그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박정수가 지금까지 거쳐온 구단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대전 한수원에서 시작해 사간도스, 부산교통공사, 스좌장 융창, 차이낫 혼빌, 고양 자이크로, 포천시민축구단, 강원FC를 거쳐 광주에 왔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일 안하고 쉬고자 그의 이야기 중 일부를 편집하고자 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뺀다면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죄책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래서 아예 다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광주 박정수가 소개하는 파란만장 축구 인생을 돌아보자.

자존심 셌던 신인, 일본에 진출하다
박정수의 축구 이야기는 2008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그는 프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2009 시즌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2009 시즌 드래프트는 408명이 지원해 160명이 뽑혔다. 이슬기가 대구FC에 갔고 김신욱이 울산 현대, 유병수가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명을 받았다. 특히 새로 창단하는 강원FC가 창단팀 우선지명 권한으로 14명을 무더기로 뽑기도 했다. 김영후, 곽광선, 김근배 등이 강원에 합류했다. 하지만 드래프트 현장에서 박정수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다.

박정수는 낙담했다. 한 시즌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며칠 뒤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일부 구단들이 박정수를 ‘연습생’으로 뽑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박정수는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에 금이 갔다. ‘이럴 거면 그냥 드래프트 때 뽑지 이제 와서 연락하는 건 뭐야?’ 당돌한 신인 박정수는 연습생으로 프로에 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내셔널리그 대전 한수원에서 좋은 조건으로 그를 원했다. 결국 박정수는 내셔널리그에서 성인 무대 경력을 시작했다.

ⓒ 한국실업축구연맹 제공

하지만 박정수는 대전 한수원에 만족하지 않았다. 비록 대전 한수원이 당시 내셔널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엄연히 프로 팀은 아니었다. 실업이었다. 그는 실업 무대의 비교적 열악한 환경을 경험하며 다시 프로 진출을 꿈꿨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에서는 이렇게 조언했다. “빨리 군대를 갔다오면 프로에 가기 더 수월할 거야.” 박정수는 조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회복무요원 대상자였다. 이왕 가야 하는 군대 빨리 해결하고 프로에 다시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대전 한수원의 생활을 이어가면서 군 복무를 준비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K3리그에서 뛰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삼척 신우전자(현재 해체)가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입대를 하게 되면 삼척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박정수의 계획은 착착 들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이 등장했다. 입대 경쟁률이 워낙 센 탓에 군 입대에서 떨어진 것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바로 근무하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군 입대를 실패했으니 삼척 입단도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박정수는 또다시 낙담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박정수에게 꽤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지금 일본 프로 팀에서 입단 테스트를 한다는데 해볼래?” 박정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본으로 날아가 입단 테스트에 응시했다. 그리고 그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내가 프로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격했어요.” 그는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J2리그에 있던 사간도스였다. 박정수는 이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것이 속칭 ‘해외 유랑 생활’의 시작이라는 것을.

또다시 날아간 드래프트, 그리고 새로운 도전
사간도스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모든 면에서 프로라는 것을 알게 해줬어요. 환경도 정말 좋았죠. 게다가 매 경기에 관중이 5,000명 이상씩 들어차니 그야말로 ‘뛸 맛’ 나는 나날이었죠.” 하지만 그는 사간도스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제대로 경기에 나서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박정수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사간도스와 그의 계약은 1년이었다. 조금 더 버티기 위해서는 사력을 다해 살아남아야 했다.

내셔널리그에서 갓 일본에 온 박정수에게 사간도스는 충격이었다 ⓒ Waka77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사간도스는 그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다. 날벼락이었다. 심지어 K리그 드래프트에도 지원할 수 없었다. 사간도스가 통보를 한 시기에 이미 K리그 드래프트는 끝난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 규정에 의거해 박정수는 K리그 무대에 입성할 수 없었다. 눈 앞이 깜깜했다. 그는 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는 과거 은사에게 찾아가 읍소했다. “운동만 같이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고등학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불투명한 나날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은사는 박정수에게 말했다. “고등학생들과 훈련하면 어디 몸이나 제대로 만들겠어? 여기 가서 성인들과 같이 훈련해봐.” 그가 소개해준 곳은 부산교통공사였다. 그는 은사의 도움으로 부산교통공사에서 훈련을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부산교통공사의 정식 선수가 아닌 ‘깍두기’였다. 하지만 연습 경기를 몇 경기 뛰고 나니 부산은 그에게 계약을 제의했다. 박정수는 이를 수락했다. “제가 또 고향이 부산이었으니까요. 감사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다시 내셔널리그로 돌아온 박정수는 부산교통공사에서 한 시즌을 무사히 마쳤다. 이렇게 내셔널리거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축구의 신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또다시 테스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번에는 중국이었다. 테스트를 보기 위해 날아갔지만 일정이 꼬이면서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겨우 테스트를 보게 된 곳은 갑급리그(2부리그) 푸젠 쥔하오라는 팀이었다. 팀 관계자는 그에게 말했다. “너가 제일 잘한다면 뽑겠다.” 박정수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 포지션에 무려 네 명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박정수는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는데 성공했다. 한 차례 연습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그러자 푸젠은 그에게 “한 경기만 더 뛰어보라”고 제안했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그는 충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연습경기를 치르고서야 푸젠은 박정수에게 말했다. “우리 계약합시다.” 박정수는 일본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이라는 낯선 세계로 떠났다.

첫 번째 재계약, 그런데 또다시 짐을 싸야 했던 이유
푸젠 쥔하오가 위치한 중국 푸젠성은 한국에서도 한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계지도에서도 대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박정수에게 푸젠이라는 곳은 낯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푸젠에서 뛰는 한국인은 박정수 혼자였다. 한국인이 제법 있었던 사간도스와는 차이가 컸다. 박정수는 머나먼 중국 땅에서 홀로 외로이 버텨내야 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음식이 제일 힘들었어요. 중국이 워낙 음식이 기름져서 쉽지 않더라고요.” 처음으로 겪는 중국 음식은 박정수를 힘들게 했다. 입에 맞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온 중국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 음식을 피하기 위해 살면서 거의 입에 대지 않았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어요. 맥도날드와 KFC가 구세주였죠. 탄산 음료도 마시지 않았는데 그 때는 열심히 마셨어요.” 겨우겨우 찾은 한국 음식점은 그에게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점차 박정수는 중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특히 통역의 도움이 컸다. 당시 박정수의 통역은 푸젠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중국 동포가 맡았다. 유일하게 한국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일주일에 몇 차례 푸젠 구단에 찾아와 통역을 담당했다. 하지만 박정수는 그를 많이 찾았다. 단순히 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교감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박정수는 통역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 놀러갔다. 그곳에서 그는 통역이 머무르고 있는 기숙사도 방문했다. 박정수가 본 중국 대학의 기숙사는 상당히 열악했다. “4인 1실인데 화장실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혀를 내두른 박정수는 통역에게 말했다. “너 당장 짐 싸서 우리 집으로 와. 같이 살자.”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통역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통역 또한 이를 반겼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박정수는 한 시즌을 무사히 마쳤고 처음으로 재계약 제의를 받았다. “항상 1년 계약 인생을 살다가 2년을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그것이 푸젠에 머무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2012년 12월 푸젠 쥔하오는 연고이전을 발표했다. 남쪽의 푸젠에서 북쪽 허베이 성의 스좌장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이름도 스좌장 융창 쥔하오로 바꿨다. 이는 곧 통역과의 이별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지금도 둘은 종종 연락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옛 팀 동료와 페라리의 유혹, “같이 뛰자”
박정수는 2013 시즌을 스좌장에서 보내면서 중국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큰 문제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잘 뛰고 있었고 중국 생활도 적응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국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오면 그것은 박정수답지 않다. 2014 시즌을 앞두고 박정수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과거 부산교통공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조태근이었다. 그는 박정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태국으로 올래? 우리 같이 뛰자.”

ⓒ 스좌장 용창 제공

그곳에는 조태근 뿐 아니라 과거 ‘수원의 페라리’라고 불리던 이현진도 함께 있었다. 외로운 타지 생활을 2년 째 하던 박정수에게 조태근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태국 구단 또한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수는 소속팀과의 의리를 먼저 지키고자 했다. 소속팀이 그를 잡지 않는다면 이적을 결심했겠지만 소속팀이 붙잡는다면 쉽게 떠나기 어려웠다. 그는 일단 조태근에게 말했다. “먼저 지금 구단과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사실 2013 시즌을 마지막으로 박정수와 스좌장의 계약은 끝이었다. 처음 입단했을 당시 1년 계약을 제의 받았고 재계약 또한 1년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수는 구단에 먼저 선택권을 줬다. “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도록 재계약 여부를 알려주세요.” 만일 스좌장이 재계약을 제안한다면 남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좌장은 차일피일 미뤘다. 박정수가 데드라인을 정하고 막상 그 날이 다가오자 스좌장은 “사흘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박정수는 기다렸다.

알고보니 당시 스좌장은 선수에게 썩 좋지 않은 영입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 선수 재계약을 놓고 최대한 시간을 끈다. 그 동안 스좌장은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불러 계속해서 테스트를 한다.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선수가 있으면 기존 선수를 내치고 새로운 선수를 데려온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기존의 선수와 재계약을 한다. 문제는 만일 재계약에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스좌장에서 버림 받을 경우 이미 대부분의 구단이 선수 구성을 완료했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스좌장 뿐 아니라 일부 다른 구단에서도 가지고 있는 악습이었다.

박정수는 사흘을 기다렸지만 또다시 스좌장으로부터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결심했다. “그래, 떠나자.” 그가 향한 곳은 당시 태국 1부리그에 있던 차이낫 혼빌이었다. 그렇게 박정수는 또 하나의 여권을 적립했다. “제가 병역의무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수 여권 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매년 여권이 하나씩 생기는 거죠. 받았던 여권을 모아둔 것이 수북해요.” 이 정도면 대한민국 상위 1% 여권 부자다.

ⓒ 차이낫 혼빌 제공

수비형 미드필더가 두 골을 넣는 법, 사랑
차이낫 혼빌은 당시 1부리그에 있었지만 그리 특출난 팀은 아니었다.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그런 팀, 딱 중간에 있는 팀이었어요.” 그 때도 태국리그는 부리람 유나이티드와 무앙통 유나이티드가 양분하는 곳이었다. 태국은 더운 곳이었다. 하지만 박정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푸젠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제 해외에서 적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같은 팀에 조태근과 이현진이 있는 것도 큰 힘이었다.

게다가 그는 태국에 오면서 오랜 기간 동안 교제해 온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7세였다.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해 그와 여자친구는 자주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이참에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혼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다들 양가 상견례와 스드메 등을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먼저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 법이다.

박정수는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기획했다. 축구선수 다운 아이디어였다. 프로포즈 D-데이는 여자친구가 태국에 그의 경기를 보러 오는 날로 잡았다. 2014년 5월 4일이었다. 이날은 차이낫 혼빌이 BEC 테로를 상대로 홈 경기를 갖는 날이었다. 그는 골 뒷풀이로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드필더였다. 쉽게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누구든지 골을 넣으면 프로포즈를 할 수 있게 도와줘.” 동료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전반 11분 만에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BEC 테로의 골망이 흔들린 것이다. 프리킥 상황에서 BEC 테로의 페널티박스로 길게 넘어온 공을 골키퍼가 잡으려다가 실수로 놓쳤다. 그 공은 차이낫 혼빌 선수의 발 앞에 떨어졌고 그는 절묘하게 공을 밀어넣었다. 첫 번째 골의 주인공은 바로 박정수였다. 프로포즈를 시작하기 위한 골을 직접 만든 것이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동료들과 함께 “지은아 사랑해”라고 적힌 팻말을 들었다. 여자친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원맨쇼’를 펼쳤다 ⓒ 차이낫 혼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반 14분 차이낫 혼빌의 코너킥 상황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그 순간 공격에 가담했던 박정수가 다시 한 번 번뜩였다. 페널티박스 안에 붕 떠있던 공을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두 번째 골을 기록한 것이다. 경기장은 또다시 열광했다. 축구선수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프로포즈에 성공한 셈이다. 지금도 박정수는 그 때를 지금까지 겪어온 축구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한다.

이후 박정수는 여자친구와 결혼에 골인해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제는 아내가 됐다. 아내는 태국에서부터 내조에 돌입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한 것이 많아요. 처음 태국에서 약 3개월 가량 적응을 못해 힘들어할 때부터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강원에서 광주로 이적하면서 집을 강릉에서 목포로 이사했거든요. 정말 우리나라의 끝에서 끝으로 이사한 것인데 제가 전지훈련으로 인해 거의 도와주지 못했어요.” 그래도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그날 두 골을 넣은 박정수는 그 해 시즌을 통틀어 네 골을 넣었다. 한 시즌 득점의 절반을 프로포즈를 위해 쏟아부은 셈이다.

끝난 줄 알았던 해외 생활, 또 떠난 이유는?
태국에서의 생활을 이어온 그였지만 이제 더 이상 군 복무를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K3리그에 가면 됐지만 박정수는 약간의 욕심이 생겼다. 바로 안산경찰청에 입단하는 것이었다. “제 나이에 축구선수로서 군 복무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경찰청 입단이었어요. 내친 김에 한국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뛰어보고 싶었어요.” 경찰청에서 뛰려면 일단 한국에 돌아와 1년 이상을 뛰어야 했다. 마침 그에게 고양자이크로(현재 해체)가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뛰고 경찰청에 가는 것이 어때?” 박정수는 고양자이크로에서 첫 K리그 무대를 밟았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하지만 그에게 안산 입단은 꿈이었다. 지금까지 외국을 떠돌다 온 선수는 내세울 실적이 별로 없었다. 약간의 가능성을 잡기 위해서는 안산과의 경기에서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했지만 바로 직전 경기에서 경고누적에 걸리며 출전조차 못했다. 미련 없이 안산에 대한 욕심을 버린 그는 홀가분하게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사회복무요원인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축구를 했다. 그가 향한 곳은 K3리그에서도 강호로 꼽히는 포천시민축구단이었다.

당시 포천은 그야말로 막강한 팀이었다. 박정수 또한 좋은 선수들과 함께 뛰며 군 생활을 할 수 있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팀이었다. 그렇게 해외에서의 생활은 잠시 접어두고 군 복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대 후 얼마 되지 않아 포천 구단은 박정수를 비롯한 선수들에게 말했다. “여권 있는 사람 손 들어봐. 우리 휴가 좀 맞춰야겠어.” 알고보니 대한축구협회가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열리는 셰이크 카말컵에 K3리그 챔피언인 포천의 참가를 추진한 것이다. 박정수는 그렇게 또 팔자에도 없는 해외로 떠났다. 이번에는 방글라데시였다.

포천시민축구단
셰이크 카말컵에 나서 기념 촬영을 하는 포천시민축구단의 모습.

포천은 방글라데시에서 악전고투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치안이 무척 좋지 않았다. 1년 전에 IS테러가 발생한 곳이 치타공이었다. 선수들은 호텔과 훈련장만 오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4강까지 진출했다. 이 때부터 주최측은 일정을 제멋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우리가 결승에 올라가면 집에 가는 비행기를 타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수상님이 참석 예정이라 그렇다’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너희 떨어지라’는 얘기 같았어요.” 그래도 포천은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내달렸어요. 대회 주최한 사람이 내준 개인 전용기를 타고 수도로 이동해 겨우 비행기에 올랐죠.”

그는 방글라데시를 돌아보며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못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봤어요. 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본 빈민층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사람이 이렇게도 못살 수가 있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그 정도로 열악했어요.” 그는 방글라데시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그는 열심히 노력한 모양이다. 2017 시즌 K3리그에서 그는 MVP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0년짜리 여권 받으니 9년 만에 이룬 K리그1 데뷔전
소집 해제 후 그는 드디어 유효기간 10년짜리 여권을 받았다. 이제는 여권 갱신 없이 마음껏 해외를 누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해외로 떠나지 않았다. 강원 송경섭 감독이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강원을 통해 K리그1 무대에 입성했다. 2009년 대전한수원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약 9년 만의 일이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죠.”

그는 태국에서의 프로포즈 만큼이나 2018년 3월 11일을 잊지 못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의 K리그1 경기였다. 이날 박정수는 선발로 출전해 후반 38분 김승용과 교체될 때까지 약 83분을 뛰었다. 그는 K리그1에 처음 등장한 신인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겁먹지 않았다. “당시 강원에 정조국을 비롯해 훌륭한 고참 선배들이 많았어요. 든든한 형들이 있으니까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생각보다 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사실 축구선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금전적으로나 명성으로나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고 봐요. 그 종이 한 장은 바로 순간의 번뜩임? 그런 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비록 서울 선수들이 정말 훌륭하지만 저 또한 한 수 접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그렇게 했고 막상 붙어보니 싸워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닌 것 같았어요.” 이날 강원은 서울을 2-1로 제압했다.

송경섭 감독의 본격적인 신임을 얻은 박정수는 2018 시즌 동안 K리그1 25경기를 뛰었다. 과거 드래프트에 지명 받지 못하고 ‘연습생’ 제안을 받을 때와는 상당히 많이 달라진 위상이었다. 그는 강원에서 맥고완과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사람들은 ‘K3리그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포천에서 온 박정수를 주목했다. 하지만 박정수는 수많은 세월 동안 굵은 땀방울을 흘렸고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었다. 기적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한 결과물이었다.

버티고 버텨온 도전의 연속, 박정수는 또다시 도전에 나선다
이제 박정수는 K리그2 광주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사실 박정수는 광주에 오기까지 제법 망설였다. 시민구단이 얼마나 힘든지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진섭 감독이 직접 그의 영입에 나섰다. 박 감독은 포항스틸러스에서 코치를 할 때부터 박정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박 감독은 박정수에게 전화 통화를 하며 진심을 전했고 박정수 역시 그 진심에 마음을 움직여 기꺼이 광주에 합류했다.

아직까지는 광주가 낯설다. 특히 광주는 어린 선수들이 많은 팀이다. 올해 만 32세인 박정수는 벌써 고참이 됐다. “선수들과 열심히 친해지고 있어요. 지금은 여름이나 김태윤 주장같은 30대 고참들과 많이 친해졌어요. 제가 맏형이다보니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라서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많습니다. 저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형들이 어린 선수들을 더 많이 챙겨줘야 하잖아요. 하하.”

그가 광주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승격과 많은 출전이다. “다들 그러더라고요. K리그1보다 K리그2가 더 힘들 거라고.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힘들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죠. 개인적으로도 머릿속에 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0경기 이상 출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 관리를 정말 잘해야 할 것 같아요. 단순히 출전에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경기력으로 나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광주FC 제공

고양에서 뛴 1년까지 합하면 박정수 또한 벌써 K리그 3년차다. 하지만 여전히 팬들에게 박정수란 존재는 낯설다.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도전을 해왔어요.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죠. 항상 1년 계약의 신세였어요. 2년 계약을 해본 적이 없어요. 여러 팀을 옮겨다녔어요. 도전은 힘들어요. 살면서 버거울 때도 있어요.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버틴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버텨온 박정수는 또다시 도전에 나선다. 이번 목표는 ‘승격’이다. “지난해 K리그 늦깎이 신인이라고 기사가 좀 나왔어요. 올해는 새로운 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제가 팀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제가 잘 되려면 팀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팀이 승격을 하는 것이 곧 제가 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특출나게 골을 넣고 특출나게 공을 잘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뛰고 많이 희생하겠습니다. 승격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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