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FC의 로컬 보이이자 원클럽맨 여름을 만났다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광주FC의 구단 역사는 길지 않다. 2010년 창단식이 열리고 2011년부터 지역의 이름으로 축구를 했다. 그러나 다른 구단에서는 갖고 싶어도 갖기 어려운 상징적인 선수가 있다. '야구 도시' 광주 지역에서 나고 자란 로컬 보이이자 원클럽맨 여름이다.

바이에른 뮌헨의 필립 람도 슈투트가르트에서 2년 동안 있었지만 원클럽맨 소리를 들었으니 여름도 군 복무를 제외하면 원클럽맨이나 다름없다. 학창 시절 잠깐 외도 아닌 외도로 숭의고에 진학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광주에서 나고 자라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모두 광주에서 다녔다. 심지어 신인 드래프트에서 광주의 선택을 받았고 연습생 신분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광주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

언젠가는 광주의 상징 하면 이종범과 함께 이 선수가 거론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광주에서 나고 자란 로컬 보이 원클럽맨 여름을 <스포츠니어스>가 만났다.

광주시가 키운 로컬 보이

반갑습니다. 잘 지내나요?

잘 지내야죠. 못 지내고 있더라도 잘 지내야죠. 지금은 분위기도 좋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름 선수, 혹시 겨울이라 힘들지는 않나요?

겨울엔 항상 힘들었어요. 8년 동안 쉬어본 적이 없네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실 광주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연이 궁금했어요. 보통 광주 아이들은 이종범을 보면서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우지 않나요? 어떻게 축구를 하게 됐어요?

저도 어렸을 때 공부에 관심 있던 아이는 아니었어요. 야구랑 축구를 많이 했죠. 야구에 조금 더 흥미가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사실은 어렸을 때 합기도 관장이 꿈이었어요. 막막하고 할 게 없었어요. 그때 다니던 체육관 관장이나 해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작은아버지께서 제가 축구를 하길 원하셨어요.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작은아버지가 설득하셨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공차는 걸 보고 "조카가 소질이 있겠구나" 하셨대요. 부모님은 차라리 합기도 관장을 하라고 하셨죠.

부모님 반대에도 작은아버지의 설득으로 축구를 시작하셨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광주에서 축구를 했는데 갑자기 숭의고는 왜 간 거예요?

축구를 좀 더 잘했더라면 금호고를 갔겠죠. 그때 저도 많이 부족했어요. 그때는 금호고에 못 간 학생들이 숭의고로 가는 식이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뱀의 머리가 된다는 심정으로 숭의를 갔죠. 그렇다고 숭의고 출신이란 걸 단 한 번도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외도 아닌 외도였죠.

사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서울에서 축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위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고 도전도 해보고 싶었죠. 동북고로 테스트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제가 워낙 신체조건이 작고 왜소하다 보니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오는 선수로 오해를 받았어요. 저를 보고 "이제 중학생 올라오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간 합숙하고 테스트를 받았지만 떨어졌죠.

그렇게 외도 아닌 외도를 한 뒤에 다시 광주대학교로 돌아왔어요. 사정이 있었나요?

그것도 사정이 좀 있었어요. 원래 진주국제대 쪽으로 진학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생각이 많아진 거죠. "내가 저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때 딱 광주대학교 창단 소식을 들었어요. 저 초등학교 때부터 당신을 큰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셨던 정평렬 감독님께서 지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광주대 진학을 선택했죠.

정평렬 감독님이 초등학교 때부터 지도해주셨던 분인가요?

그분은 축구협회 높으신 분이었을 거예요. 제가 지금은 좀 흐지부지해서 그렇지 초등학교 때는 잘 나갔거든요. 전혀 일면식이 없었는데 대회에서 뛰고 나니까 "큰아빠라고 불러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정평렬 감독님의 팀에 가면 더 희망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도 인연이겠다 싶었죠.

부모님은 광주로 다시 온다니까 좋아하셨죠?

좋아하시죠.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제 선택에 항상 힘을 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도 광주대학교로 가고.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어요. 그땐 광주대가 지금처럼 인정받는 학교가 아니었거든요. 사실 그때 집이 많이 어려워서 축구를 그만두려고도 했었어요. 저는 대학교 1학년, 스무 살 때부터 조기축구를 나갔는데 조기회가 광주대에서 항상 축구를 했거든요. 그때 만난 형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었나요?

네. 그래서 부모님에게도 용돈 달라는 말을 절대 안 했어요. 그런데 조기회 형님들이 제 생활비를 정말 풍족하게 주셨어요. 저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축구화도 제일 좋은 거로 사주시고. 그때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고 그랬는데 형님들이 꿀리지 말라고 돈도 쥐여 주시고 그랬어요.

정말 광주 '시'가 키운 선수네요.

그렇죠. 광주FC 유스팀도 아니었을 때니까. 그분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여름은 연습생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뽑히며 광주FC의 선수가 됐다 ⓒ 광주FC

광주FC의 창단, 연습생으로 꿈의 구단에 들어가다

그렇게 대학교 재학 중에 팀 창단 소식이 들렸죠. 다음 단계에 대한 꿈이 생겼겠어요.

저 3학년 때 김대중 컨벤션 센터에서 창단식을 했어요. 우리 대학교 선수들도 가서 구경했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유니폼도 입고 나오고. 광주상무가 아닌 광주팀이 생긴다는 게. 그때부터 저는 오로지 광주FC였어요. 어두웠던 미래가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죠.

광주FC 입단할 때도 드래프트로 뽑혔잖아요. 정말 기적적으로 꿈에 그리던 구단에 들어갔는데.

상상도 못 했죠. 그전까지 전혀 얘기가 없었거든요. 운이 좋았던 게 광주대와 조선대가 체전 예선을 붙었어요. 속된 말로 그때 제가 좀 '섰어요.' 그 경기를 광주FC 관계자분들이랑 수석코치님이 보러 오셨는데 저희 고등학교 감독님하고 당시 여범규 수석코치님하고 절친한 사이였어요. 여 코치님이 "쟤 광주대 8번 뭐냐"라며 많이 물어보셨나 봐요.

사실 진주국제대로 진학하지 않고 광주대로 오면서 고등학교 감독님하고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프로팀에서 그렇게 관심을 보이니까 감독님이 "내 제자다"라고 말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럼 그때 고등학교 감독님과는 사이가 괜찮아진 건가요?

네.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죠. 제가 갑자기 학교를 바꿨으니 제가 잘못한 거죠. 선생님을 원망한 적은 없어요.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렸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1순위, 2순위 이름이 다 지나가고 번외 연습생으로 불렸어요. 제가 축구하면서 우승을 한 번도 못 해봤는데 그 짜릿함을 그때 느꼈던 거 같아요. 연습생으로 들어갔지만 "해냈구나"하는 마음. 바로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작은아버지에게 바로 연락 드렸어요. 저 축구 시키면서 마음고생 심하셨던 게 작은아버지였으니까요. 그때 전화 통화하면서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작은 아버님이.

그분 자녀도 셋이 있는데 그 친구들은 공부에 뜻이 있어서 축구를 안 했어요. 그래서 욕심을 저에게 품으셨던 거 같아요. 많이 우셔서 저도 깜짝 놀랐죠. "됐다. 진짜 자랑스럽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우시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으로 프로팀에 들어갔는데 첫해는 출전이 어려웠었죠. 2년 차에는 강등도 돼서 신인으로서 혼란스러웠을 것 같아요.

솔직히 저도 제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 출전에 대한 불만보다는 처해 있는 상황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그때 (김)호남이도 경기를 많이 못 뛰었었고 서로 의지하면서 운동도 많이 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아홉 살 넘는 선배들이랑 장난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1년 선배도 무서워서 눈치 보기 바빴고 패스 실수라도 한 번 하면 너무 무서웠거든요.

패스를 해야 하는 포지션인데?

맞아요. 신인 때는 훈련하는 게 무서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재밌는 경험이었죠.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선수들이 대거 빠져나간 대신 출전 기회는 많이 늘어났죠. 승격도 경험했는데 그때 짜릿함은 어땠어요?

드래프트 뽑혔을 때보다 5배? 10배 이상? "아, 이래서 우승을 하는구나" 싶었죠. 비록 플레이오프로 올라가서 우승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1부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었잖아요. "나도 1부 리그에서 경기를 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진짜 좋더라고요. 힘들었던 거 생각나면서 눈물도 나고. 조기회 형님들도 1부, 2부 안 가리고 홈 경기 때마다 응원하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여름은 연습생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뽑히며 광주FC의 선수가 됐다 ⓒ 광주FC

상주상무, 그리고 세 번의 플레이오프

그분들도 자랑스러워했겠어요. 그렇게 정든 광주를 떠나 상주상무로 갈 때 마음이 복잡했겠어요.

일단 군대 간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내가 진짜 군대를 가는구나. 너무 힘들고 추웠어요. 어린 애들이 반말도 쓰고. "17번 훈련병 뛰어옵니다!" 그러면 또 부른다고 뛰어가고. 기분 나쁠 법도 한데 단체 생활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게 또 재밌긴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김호남 선수와 같이 들어갔죠?

맞아요. 대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프로 때도 오래 같이 있었고 거기서 또 만났죠. 지금은 울산에 있는 (김)태환이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라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정말 쟁쟁한 멤버들과 같이 뛰었는데 두 번째 플레이오프가 K리그1에서의 플레이오프였어요. 그때 김태완 감독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 그때 계셨나요? 저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추억이니 재밌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정규리그 마지막 인천전에서 태클로 퇴장을 당했죠. 그래서 플레이오프까지 하게 됐고. 그때 한석종 선수에게 태클 들어가던 상황이 기억나나요?

제가 원래 변명하는 걸 안 좋아하는데, 사람이 비겁한 게 변명을 찾게 되더라고요. 제가 그 전날 저녁에 너무 많이 아팠어요. 스트레스로 위궤양이 생기더라고요. 혈액 주사를 맞고 경기를 뛰었죠. 그날 경기 자체가 잘 안됐어요. 머리는 이미 가서 공을 빼앗았는데 몸 반응이 조금씩 느렸어요. 퇴장 상황에서도 그랬어요. 공을 뺏고 나서 치고 나가는 상황이었는데 터치가 길었어요. "내 볼 같은데" 하면서 발을 쭉 뻗었는데 공이 아니라 한석종 선수 정강이가 있더라고요. 하자마자 퇴장이라고 생각했죠.

그 퇴장으로 리그를 11위로 마치고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죠.

선수들한테도 미안했어요. 그 경기를 비기기만 했어도 바로 그다음 날 휴가를 갈 수 있었는데… 그 다음날 회복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애들을 쳐다볼 수가 없더라고요. 날씨도 되게 추웠어요. 미안하다는 소리조차 못했죠.

저번에 FC서울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하실 때 김태완 감독님도 "그때 정말 추웠는데"라고 하셨어요.

그러셨어요? 감독님께 빵모자 하나 사드려야겠네요.

꼭 사드리세요. 어쨌든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골도 넣으면서 절치부심했죠. 멘탈이 정말 좋다고 느꼈어요.

전 그 경기만 생각했어요. 상주가 K리그2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부대가 중국으로 동계훈련 간다는 얘기도 있었고. 휴가도 다 잘린다는 얘기도 있었고.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래서 정말 죽으라고 뛰었죠.

다행히 K리그1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좋죠?

제대하고 나서는 좋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거 같아요.

어떤 면에서요?

제가 2018년에 몸이 되게 좋았어요. 시즌 초반 다섯 경기 뛰고 몸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인천전에서 한석종 선수와 경합하다가 내측 인대가 파열됐어요. 4개월을 쉬다가 제대하기 전에 다섯 경기를 뛰고 제대했죠. 마음은 잘하고 싶은데 오히려 폼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광주로 돌아와 본인의 세 번째 플레이오프를 경험하게 됩니다. 승격과 강등 사이를 계속 오가는 거 같은데 멘탈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요.

한 번도 축구를 편하게 해본 적이 없어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죠.

두 번째 플레이오프까지는 좋은 결과를 얻었고, 세 번째 플레이오프에서는 자신감도 있었을 텐데 대전에 패배했죠. 많이 아쉬웠겠어요.

지금은 제가 나이가 있으니 중심도 잡아주고 경험을 전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작년 플레이오프가 더 책임감이 컸죠. 제가 남기일 감독님하고 있었을 때 (임)선영이 형이 다쳐서 그다음 경기를 못 뛰게 됐어요. 제가 "선영이 형 없으면 안되는데"했다가 되게 크게 혼났던 적이 있어요. 남 감독님이 "너는 선영이 없으면 경기 안 뛸래?"라고 하셔서 '아차' 싶었죠. 그게 기억났어요.

대전하고 플레이오프 경기를 해야 하는데 (나)상호가 못 뛰는 상황이었어요. 애들이 경기 앞두고 "상호라도 있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애들 모아놓고 "상호 없으면 경기 안 뛸 거냐"라고 물었죠. "상호 잘 되면 내년에 무조건 팀 옮길 텐데 상호만 의지할 거냐. 상호 대신 들어갈 선수는 뭐가 되겠냐. 우리는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서 11명이 뭉쳐서 뛰어야 한다"라고 말했죠.

역시 플레이오프를 경험해본 만큼 좋은 경험을 그대로 물려줄 수 있었네요.

기회는 우리가 정말 많았는데 정말 아쉬웠어요. 골만 들어갔다면 좋았을 텐데. 기회가 다섯 번 이상은 나왔는데 안 들어가더라고요. 박준혁 선수 위치 선정이 되게 좋았어요. 애들한테 "대전만 이기면 승격할 수 있다. 첫 경기가 고비다"라고 얘기했는데 개인적으로도 팀으로도 아쉬웠죠.

여름은 연습생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뽑히며 광주FC의 선수가 됐다 ⓒ 광주FC

로컬 보이는 '김기동'처럼 뛰고 싶다

안타깝지만 어쨌든 2부 리그에서 이번 시즌을 치르게 됐습니다. 주장이 아니라 부주장을 맡았네요?

오히려 잘 됐어요. 주장은 (김)태윤이 형처럼 무게가 있는 편이 좋아요. 저는 태윤이 형을 방패막이로 삼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요. 저는 애들이랑 소통하고 장난도 치고.

미드필더다운 생각입니다. 광주FC라는 팀의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쭉 보고 있는데 어때요? 팀의 변화도 보일 텐데.

우리는 항상 여건이 좋았던 적은 없었어요. 구단 직원분들도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엄청 노력하고 있는 걸 전 옆에서 보고 알고 있어요. 광주시에서도 도움을 많이 못 주고 그래서 구단도 힘들어하는 걸 많이 지켜봤고요.

2부 리그에 있으면 밖에서 흔드는 얘기나 안 좋은 얘기들이 너무 많이 나와요. 이번에도 매각 이야기도 나왔고요. 1부에 있으면 안 나오거든요. 우리가 경기장에 나가서 보여주고 성과를 얻어오면 밖은 달라지더라고요. 관심도 가져주고 후원도 들어오고.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본인이 나고 자란 지역의 팀이라서 더 자부심이 클 것 같아요.

크죠. 광주에서 은퇴도 하고 싶어요. 상주에 있을 때도 광주에 와서 경기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골도 넣고 욕도 먹었죠.

로컬 보이만의 자랑거리는 있나요?

월드컵경기장이랑 집이 가까워서 한 번 집까지 걸어간 적은 있는데 다음부터는 안 하려고요. 캐리어도 무겁고 손도 시리고. 다음부터는 택시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거 말고는 경기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저를 알아봐 주셔서 영화를 공짜로 본 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국가대표가 아니면 알아보시는 분들이 적죠?

맞아요. 그리고 광주는 야구 도시라.

그런데 영화관에서 알아봐 주시고 공짜로 본 건 자랑거리가 맞습니다.

그때 극장에서 저 영화 공짜로 보여준 친구가 지금 광주FC 직원으로 들어와 있어요.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자기도 꿈을 이뤘다고 해야 하나. 밥 한 번 사줘야 하는데 숙소가 목포에 있어서 직원들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 친구가 구단에 들어왔을 때 먼저 아는 척도 했어요?

서로 알아봤어요. 원래 저를 되게 좋아했대요. 그래서 저한테 장기계약 맺자고, 여기서 은퇴하시자고 하기에 "그래. 나도 그런 마음이 있다. 가서 너의 의중을 전해드려 봐라. 나도 여기서 200, 300경기 뛰고 싶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고 그랬죠.

광주에서 여름이라는 선수는 점점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아요. 원클럽맨으로서도 그렇고.

자부심은 굉장히 커요. 제가 더 잘하고 유명했다면 광주도 홍보하고 자랑하겠는데 그게 구단에 죄송하죠. 2년 밖에 없었던 (나)상호가 역대급으로 떴으니. 저는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상호 형이라고 불렀어요. 기분 안 좋으면 경기 안 뛸까 봐 '우쭈쭈'도 해줬고. 그런데 도쿄로 갔네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인사도 나눴나요?

광양에 한 번 인사하러 왔어요. 장난으로 "승격시키고 가라"라고 농담도 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랑 예비군 동기더라고요. 기분이 너무 나쁘던데요.

여름은 연습생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뽑히며 광주FC의 선수가 됐다 ⓒ 광주FC

대신 나상호 선수는 그 나이부터 '아저씨'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번 시즌 목표는 역시 다이렉트 승격인가요?

그렇죠. 크게 잡아야죠. 전용구장도 지어지고 승격하면 내년부터 뛸 수 있으니까요. 대구처럼은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라도 지어지는 게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월드컵경기장은 너무 크고, 누가 온 지도 모르겠고, 바람 소리가 장난 아니에요. 휑~하다고 해야 하나. 많이 오셔도 그러더라고요. 전용구장 허가가 떨어져서 다행이죠. 12월에 완공이 된대요.

역시 전용 구장에서 1부리그를 뛰고 싶죠?

쭉 1부 리그에서 뛰다가 여기서 은퇴하는 게 꿈이 됐어요. 아직 만 나이로는 28살인데, 여기 애들이 너무 어려서 그런지 베테랑 아닌 베테랑 취급을 받아요. 그게 좀 서럽긴 하죠. 100경기 뛰고 인터뷰할 때도 롤모델로 김기동을 꼽았어요. 오래 뛰고 싶어요. 박진섭 감독님도 "김기동처럼 오래 뛰려면 쉬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해요. 저는 밑바닥부터 시작했고 지금도 노력을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꿈이 있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팀에서 살아남는 거 아닐까요.

맞아요. 만약에 진짜 힘들어져서 방출통보를 받으면 "로컬 보이인데 나가라고 할 거냐"라며 바짓자락이라도 잡으려고요.

로컬 보이 원클럽맨이 흔하지 않잖아요.

그걸로 밀고 나가야겠어요. 자르려고 하면 "안 된다"고. "팬들을 생각해달라"고.

반대로 로컬 보이로서 광주FC는 어떤 팀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 라이벌은 KIA라고 생각해요. 야구 도시니까. 야구 팬 중에 반만 축구 보셔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데 솔직히 잘 안돼요. 홍보해도 부족하고. 성과를 내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1부 리그 올라가서 경남처럼 2위도 해봐야 팬들도 다시 관심을 보이실 거고.

광주 시민들이 또 그런 끈끈함이 있더라고요.

그렇죠. 시에서도 더 투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발전할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하는데 2부 리그에 있는 게 조금 아쉬워요. 동계훈련 분위기도 좋고 형들도 다 좋으신 분들이라 신인들하고도 장난도 잘 치고 좋은 거 같아요. 분위기는 가장 좋아요. 저희가 감독님 전술을 따라가면 훨씬 재밌는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계훈련 때 제대로 배우고 선수들이 이해하고 적응하면 더 재밌는 축구가 나올 것 같아요.

광주시가 키운 로컬 보이는 광주의 전설로 남기를 원한다. 대학 시절 창단식 때 봤던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김기동처럼 오래 뛰길 원했다. 여름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이 광주FC의 로컬 보이 원클럽맨으로 K리그 역사에 새겨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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