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의 다양한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부산 골대 뒤로 모였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00년대 초반 K리그 올스타전은 선수는 물론 팬들에게도 1년 중 가장 큰 축제였다. 경기장에서 서로 맞서 으르렁대던 팬들이 다같이 골대 뒤에 모여 서로의 응원가를 부르고 기념 사진을 찍으며 즐기던 잔치였다. 자신이 응원하는 형형색색 유니폼을 입고 와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부르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독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팀 간의 라이벌 의식이 강해졌고 리그 도중 팬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까지 생기며 이제는 다같이 즐기는 축제를 더 이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더군다나 연고이전으로 FC서울과 제주유나이티드가 탄생하면서 팬들끼리의 갈등은 더더욱 커졌다. 이들과 함께 골대 뒤에서 즐기는 올스타전은 사라졌다. 이후에도 K리그 올스타전은 계속 이어졌지만 더 이상 함께 응원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서울월드컵경기장 S석에서 벌어진 ‘작은 축제’

그런데 오늘(9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원정 응원석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KEB하나은행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 FC서울과 부산아이파크의 경기를 앞두고 서울 팬을 제외한 나머지 K리그 팀 팬들이 원정 응원석으로 모여 들어 부산을 응원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사라진 K리그 올스타전에서의 분위기가 매우 비슷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이 풍경을 직접 취재했다. 염기훈부터 문선민, 이동국까지 부산 원정석에 등장한 유니폼은 마치 K리그 올스타전을 보는 듯했다.

경기 한참 전부터 원정석 골대 뒤로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 꽁꽁 싸맨 모습이었지만 그 사이로 각 팀 머플러가 보였다. 가만히 앉아 지켜보니 팀도 참 다양했다. 강원 머플러를 두른 팬부터 수원 머플러를 펼치고 들어오는 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들은 각 구단 점퍼를 입고 있었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어? 왔어?” “오랜 만이네.” 1년 내내 경기장에서 싸우던 이들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맥주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서도 유니폼만 입은 채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팬들도 많았다.

K리그 유니폼 컬렉션 같은 느낌이었다. K리그1 우승팀 전북 팬부터 K리그2 꼴찌 팀 서울이랜드 팬까지 다양하게 모였다.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이부터 도르트문트 점퍼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도 보였다. 물론 부산 유니폼을 입거나 점퍼를 입은 이들이 가장 많았고 그들이 중심에 서 조직을 구성했다. 외국인 팬들도 보였다. 이들은 경기 시작 전 부산 서포터스의 리딩에 따라 구호를 외쳤다. 가장 먼저 외친 구호는 이랬다. “정의구현 북패박멸.” 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경기장을 울렸다.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각기 다른 유니폼 입고 외치는 “승리하라 부산”

응원석을 다른 팀 팬들에게 개방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응원석을 누빈다는 건 불쾌한 일일 수도 있다. K리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축구 경기장에서는 타 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석에 입장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다. 하지만 부산 서포터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SNS 공지사항을 통해 “타 팀 서포터스가 골대 뒤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 함께 외쳐주신다면 감사하겠다. K리그 모두가 우리 편이다”라고 입장을 정했다. 이 공지사항 덕분에 부산 응원석에는 다양한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모여들 수 있었다.

부산 서포터스에서 응원 리딩을 담당한 문대준(37세) 씨는 이 결정을 내린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팀 팬들이 많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다른 팀 팬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연락을 받기도 했다. 이왕 오시는 거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서울 팬들과 섞여 있어서 문제가 생기느니 좀 안전하게 경기를 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공지사항을 전달했고 우리끼리 안전 수칙을 잘 지키자고 규율을 정했다.” 경기가 시작하자 형형색색의 다른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수원삼성 유니폼을 입은 이와 수원FC 유니폼을 입은 이가 함께 “승리하라 부산”을 외쳤다.

대전 유니폼을 입고 머플러를 두른 이성욱(32세)씨는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충주에서 올라왔다. 그는 이 경기를 축제라고 표현했다. “올해 K리그 경기장을 자주 다녔는데 우리팀 경기가 일찍 끝나 아쉬웠다. 그런데 올 시즌 마지막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돼 좋다. 더군다나 상대가 서울이다보니 다른 팀들끼리 대통합의 축제 분위기가 생겼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지만 목표의식은 다 똑같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1차전을 부산이 패하면서 분위기가 좀 가라 앉았지만 어제(8일) FA컵 결승 2차전에서 대구가 울산을 3-0으로 이긴 것처럼 기적이 한 번 일어났으면 좋겠다.”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안양 팬 돕는 인천 팬, 부산 팬에 술 따르는 대전 팬

바로 옆에 앉은 수원 팬 이강준(34세)씨도 “같이 이렇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좋다”면서 “이렇게 다른 팀 골대 뒤에서 내 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건 처음이어서 새롭다”고 말했다. 서울이랜드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팬 한 무리는 경기 내내 맥주를 계속 마시며 부산 응원가를 불렀다. 이들은 또렷한 목소리로 “최강부산”을 외쳤다. 인천 문선민 유니폼을 입고 응원석을 지킨 정민우(28세)씨는 한껏 여유롭게 말했다. “우리는 올해도 살아남았다. 이렇게 여유 있게 남의 팀 경기를 지켜볼 수 있어 행복하다. 서울이 시즌 내내 우리 팀을 향해 강등 당하라고 외쳤다. 우리는 그래도 살아남았다. 서울이 강등되길 바란다.”

경기 시작 후 곧바로 안양 팬들이 준비한 걸개를 들었다. 그들이 준비한 걸개에는 아무런 문구 없이 안양LG 시절 마스코트의 그림만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걸개를 펼치자마자 안전요원이 달려와 제지했다. “당장 이 걸개를 내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양 팬들이 “어떤 문구도 써 있질 않은데 왜 내려야 하느냐”고 항의하면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러자 몇몇 인천 팬이 달려와 안양 팬 편을 들었다. “여기에 무슨 항의성 문구라도 써 있어요? 도둑이 제발 거린 거지.” 인천 팬이 안양 팬의 편을 들며 하나가 된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경기 도중 한 대전 팬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상 제대로 차려 축제를 즐기고 있는 대전 팬들은 “부산이 우리를 이기고 올라가 배가 아프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겼으니 서울도 이겨주길 바란다”며 족발과 함께 소맥, 아니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 50대 부산 팬이 대전 팬들에게 다가와 한마디 했다. “마, 한잔 주이소. 경기가 안 풀리네예.” 그러자 이 대전 팬들은 깎듯하게 이 부산 팬 아주머니에게 소맥, 아니 맥주를 따랐다. 그러자 부산 팬 아주머니는 벌컥벌컥 소맥, 아니 맥주를 들이키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대전 팬에게 “아는 사이냐”고 묻자 이런 말이 돌아왔다. “처음 봤는데 여기서 만나면 다 친구지.”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가장 눈에 띈 안양 팬들의 심정은?

이 응원석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부산 팬들이었다. 부산에서 직접 올라왔다는 구태양(30세)씨는 이 분위기에 고마운 마음이 커보였다. 그는 “1차전 홈 경기 때도 구덕운동장에서 직접 응원을 했다. 그날도 울산과 포항, 대구, 경남 등 다양한 팀 팬들이 응원을 와 주셨다”면서 “과거 열기가 뜨거웠던 구덕운동장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더 많은 팬들이 와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예전 K리그 올스타전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좋다. 팬인 나도 이렇게 감사함을 느끼는데 우리 선수들은 정말 감동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원정석에는 가슴 속에 한 팀씩을 품고 있지만 평소 대놓고 말하고 다닐 수 없는 축구계 관계자와 언론인도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그래도 역시나 원정 응원석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안양 팬들이었다. 추위 탓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그들의 외투 사이로 보이는 보라색 머플러는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가장 복잡미묘했을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안양 서포터스 A.S.U RED 회장 유재윤(35세)씨는 이렇게 말했다. “K리그 팬이라면 오늘 경기가 당연히 축제라고 생각한다. 저 팀이 떨어지건 말건 쟤네들이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와서 자존심 상하는 걸 지켜보려고 왔다. 나는 축구팬이다. 축구팬이라면 당연히 와서 이 모습을 봐야하는 것 아닌가.”

유재윤 씨는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저 팀이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러 온 거다. FA컵뿐 아니라 리그에서도 언제든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다. 1부리그에서건 2부리그에서건 언젠간 만날 것이라는 그 각오로 살고 있다. 집에서 봐도 되는 경기인데 굳이 시간을 내서 온 건 쟤네들이 허우적대는 꼴이 재미있어서다. 오늘 경기에서 굳이 패해 강등 당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보다는 그냥 꼴 좋다는 생각이다. 사실 저 팀이 2부리그로 떨어지면 해체도 고려하지 않나 그런 기대감도 있다. 오늘 이 경기장에 오면서 느낀 기분? 그냥 이 경기장에 오는 건 기름이 아깝다는 것뿐이다.”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강원 팬도 왔다. ⓒ스포츠니어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적이 될 것이다

이날 안양 팬들은 따로 공지사항도 없었고 소모임별로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30여 명이 원정 응원석을 찾았다. 경기가 무르익자 골대 뒤에 모인 각양각색의 팬들도 하나가 돼 부산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전반 32분 김진규가 첫 골을 기록하며 앞서 나갔지만 1차전 1-3 패배의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 시종일관 서울을 몰아쳤지만 결국 후반 종료 직전 박주영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1-1 무승부를 기록, 2년 연속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이 자리에 모인 각 팀 팬들은 하나 같이 인사를 하러 온 부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다같이 “최강부산”을 외쳤다.

목이 쉬어라 경기 내내 메가폰을 들고 응원을 리드하던 문대준 씨는 마지막으로 메가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마, 고맙십니더. 비록 우리가 내년에 1부리그로는 못 가게 됐지만 더 빠짝해가 그 다음 시즌에는 꼭 1부리그로 올라 가겠심더. 오늘 감동했습니데이. 우리가 내년에도 2부리그에 있지만 FA컵에서 만나서 부산 원정 오시면 회 한 사라씩 대접하겠심더. 꼭 반겨드릴 테니 연락주이소. 마, 오늘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데이.” 그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90분간의 짧았던 ‘위 아 더 월드’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들은 이제 다시 내년 시즌이 되면 서로 상대팀으로 만나 으르렁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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