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지는 K리그퀸컵의 스타였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포천=김현회 기자] 25일 경기도 포천축구공원에서 열린 2018 K리그 퀸컵(K-Win컵) 8강 SNUW FC(서울대)와 LION Ladies(한양대)의 경기. 3-0으로 앞서 있는 SNUW FC가 상대 페널티 박스 바로 앞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그리고 SNUW FC의 10번 배혜지(21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달려들어 슈팅을 날렸고 이 공은 LION Ladies 골키퍼 박우린이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 골문으로 꽂혔다. 전문 선수들이 뛰는 경기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프리킥 골이었다. SNUW FC는 이 경기에서 5-0 대승을 거뒀다.

김희태 이사장을 놀라게 한 발재간

배혜지는 4강 INHA WICS(인하대)와의 경기에서도 0-0으로 경기가 끝난 뒤 승부차기 네 번째 키커로 나와 골대를 튕기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날카로운 킥을 성공시키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단 이 두 장면뿐 아니라 배혜지는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하는 맹활약을 이어갔다. 경기 도중 마르세유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두 명은 가볍게 제치는 개인기를 선보였다.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박지성을 발굴해낸 것으로 잘 알려진 FC KHT 김희태 축구센터 김희태 이사장은 쉬엄쉬엄 경기를 보러 왔다가 배혜지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쟤는 정말 물건이네. 진짜 잘한다.” 조금만 축구를 잘하면 ‘XX의 메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게 거북하지만 배혜지를 보니 정말 리오넬 메시가 떠올랐다. 경기가 끝난 뒤 프로축구연맹 관계자들도 ‘서울대 10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압도적인 기량이었다. 경기 진행 요원들도 배혜지가 공을 잡고 믿기지 않는 개인기를 선보일 때마다 감탄했다. 그의 활약을 지켜본 다른 팀 선수들도 “혜지, 나이스”를 외쳤다.

아마추어 여대생들이 모여 펼치는 이 대회에서 배혜지는 군계일학이었다. 서울대는 결승에서 FC천마(한국체대)와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배혜지는 대회를 지켜본 모두가 인정한 최고 스타였다. 중원에서 여유롭게 볼 배급을 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아마추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미드필드에서 공격은 물론 수비에도 적극 가담하며 놀라운 활동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서울대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뭔가 좀 특별해 보이는 그가 사실은 하버드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배혜지의 발재간에 김희태 이사장도 놀라워했다. ⓒ프로축구연맹

하버드대에서 서울대로 날아온 배혜지

배혜지는 미국에서 쭉 살았다. 3살 때부터 축구와 농구를 접했다. “운동을 너무 좋아했고 부모님께서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그는 학창시절 공부로도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축구에도 엄청난 소질이 있었다. “미국은 동아리 팀이 많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마추어 리그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었어요. 농구도 좋아했지만 특히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쭉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뛰었죠. 한국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아요.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도 운동 한두 가지는 다 즐기거든요.” 배혜지는 미국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하버드대학교는 미국에서 공부는 물론 과외 활동도 활발히 하는 수재들만 모인 곳이다. 하버드대학교는 역대 미국 대통령을 8명이나 배출했고 제이미 다이먼 현 JP모건 체이스 회장과 로이드 블랭크파인 현 골드만삭스 회장도 졸업한 학교다.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와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도 하버드대학교 출신이다. 배혜지가 입학한 경제학과는 하버드대학교에서도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그가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부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배혜지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한국에 있는 대학교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한국에 와 좋은 추억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다. 미국에서 줄곧 살아온 배혜지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도전을 즐기는 배혜지는 부모님을 떠나 한국에서 생활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배혜지는 지난 3월 교환학생 자격으로 서울대학교에 다니게 됐다. 이런 배혜지가 서울대에 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교내 축구 동아리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하버드대학교를 다니며 잠시 접어야 했던 축구를 하고 싶어서 축구 동아리부터 찾았다.

배혜지의 발재간에 김희태 이사장도 놀라워했다. ⓒ프로축구연맹

세 시간을 홀로 내달려 도착한 포천

그는 이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거렸다. “학교 웹사이트에 들어가 축구 동아리부터 찾았어요. 여자 축구 동아리 SNUW FC가 있어서 고민할 것도 없이 제 발로 찾아갔죠. 사실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축구를 할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축구를 꼭 하고 싶었거든요.” 제 발로 당당히 찾아온 배혜지를 팀원들은 반갑게 맞아줬다. 배혜지는 SNUW FC에 입단한 뒤 곧바로 에이스가 됐다. 배혜지는 지난 9월 서울대학교가 주최한 2018 제6회 전국 대학여자축구대회 샤컵에서도 5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6연패에 도전한 한국체대를 제압하는 큰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배혜지는 이번 대회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달 2년 간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그는 요새 여기저기 인사를 하러 다니느라 바쁘다. 하필이면 조별예선이 열린 지난 24일은 인천에 있는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대회 규정상 24일 하루 만에 열리는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선수단은 바로 짐을 싸 돌아가야 했다. 배혜지는 8강 토너먼트가 열리는 25일부터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물론 동료들이 24일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면 그에게는 이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배혜지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서도 마음은 이미 포천에 가 있었다.

배혜지는 외할머니 댁에 방문한 뒤 학교에 들렀다가 곧바로 포천으로 향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세 시간을 내달렸다. 그 사이 포천에 있는 동료들에게 실시간으로 경기 상황이 전해졌다. “한양대하고 첫 경기에서 0-0으로 비겼어.” 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한국외대하고도 0-0이야.” 그리고 한참 뒤 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세 번째 경기도 0-0으로 끝났어.” SNUW FC는 조별예선 세 경기를 모두 0-0으로 비겼다. 포천으로 내달리는 길에 계속 메시지를 접한 배혜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PNU LADIES(부산대)와 승점과 다득점은 물론 골득실까지 똑같았던 SNUW FC는 추첨을 통해 8강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배혜지의 발재간에 김희태 이사장도 놀라워했다. ⓒ프로축구연맹

환상적인 프리킥 골, 그리고 결승행

배혜지는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걱정이 되긴 했는데 일단 동료들을 믿었어요. 폭설이 내려 조별예선은 전후반 10분씩만 경기를 하게 됐는데 우리 팀이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팀원들을 믿어야죠.” 배혜지는 숙소인 포천 베어스타운 리조트에 저녁 6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추첨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다시 서울로 향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포천까지 가서 밥만 먹고 돌아올 뻔했죠. 그대로 집에 가긴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50대 50의 확률에서 하늘은 SNUW FC를 선택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우리 주장 ‘금손’이 추첨을 잘 해서 우리가 8강에 간다고 알려왔어요.” 배혜지는 그렇게 25일 8강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배혜지는 8강에서부터 펄펄 날았다.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터트렸고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플레이를 펼쳤다. 배혜지는 8강에서 보여준 그림 같은 프리킥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큰 부담은 없었어요. 3-0으로 이기고 있어서 편하게 찼죠.” 또한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살 떨리는 토너먼트 방식도 즐겼다. “미국에서는 한 시즌을 리그로 치러 이번에 져도 다음 기회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한 경기만 지면 집에 가야하는 방식이라 훨씬 더 재미있어요.” 이 정도면 승부사다.

배혜지는 이제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 아쉬울 법도 하지만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쉽긴 하지만 1년 동안 정말 재미있게 놀았어요. 공부도 하고 축구도 했죠. 후회 없이 즐기다 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1년 동안 정이 든 팀 동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팀이 제일 좋아요. 좋아하는 애들하고 축구하고 훈련이 끝나면 같이 밥도 먹고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학교에서 자주 훈련을 하진 못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발을 맞췄는데 이 시간은 아마 오래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물론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취미로 축구를 할 생각입니다. 축구가 너무 재미있거든요.”

배혜지의 발재간에 김희태 이사장도 놀라워했다. ⓒ프로축구연맹

“공부 만큼 운동도 즐기는 문화 됐으면”

그에게 2018 K리그 퀸컵(K-Win컵)은 좋은 추억이 됐다. “제가 텍사스에서 18년을 살아서 눈 내리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어요. 4년 전 한 번 댈러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 처음으로 눈을 맞으며 축구를 해봤어요. 그때 전반전에 골을 넣고 발목을 다쳤던 기억이 나요. 그때 이후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축구를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저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프로축구연맹에서 하는 이 대회는 밥도 주고 잠 잘 곳도 제공해 줬어요. 이렇게 챙겨주는 대회는 처음 겪어봐 신기하네요. 눈도 신기하고 온통 신기해요. 어제 저녁에 파티를 하는데 춤도 열심히 췄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추운 것만 빼면 다 좋았어요.”

연맹에서 주관하는 이 대회는 올해 9년째를 맞았다. 축구를 사랑하는 아마추어 대학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자는 대회 취지는 쭉 이어지고 있다. 훌륭한 전문 선수를 배출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이들에게 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도 축구계가 해야 할 일 아닐까. 하버드대학교에서 날아온 배혜지는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배혜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에서도 학생들이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운동도 즐기는 문화가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런 무대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뭐든 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시기에 공부만 한다는 건 되게 슬픈 일이잖아요.”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하버드대학생이 말하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더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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