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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이 있다. 독보적으로 강한 팀 앞에 붙는 수식어다. 가까운 K리그로는 전북현대, KBO 쪽은 두산 베어스의 시즌 성적을 이야기할 때 이 말이 따라온다. 해외리그로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물론 이번 시즌은 안 좋지만), 이탈리아 세리에A의 유벤투스 등이 있다. 이들이 패배하는 장면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즌 성적을 예상할 때 간혹 깃털처럼 흘러가듯이 가볍게 얘기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우승은 어디겠지."

흔히 '프로 스포츠는 결과'라고 말한다.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팀이 '언제까지 몇 승을 달렸고, 몇 경기 연속으로 지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왕좌를 내주지 않았다' 같은 기록들. 물론 이는 '절대 강자'가 세운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 위함이고, 좀 더 과장을 섞자면 '칭송'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러나 최종 스코어, 최종 순위, 최종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그 승리의 기록에 빠지면 놓치는 과정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절대 강자'가 승리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한 것들

나는 지난 5일 '절대 강자'가 6년 연속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현장에 있었다. 우리나라 여자축구에서 인천현대제철이라는 팀은 그런 팀이다. 항상 우승하고, 항상 트로피를 들고, 시즌 내내 지지 않으며, 혹시 지더라도 우승에는 큰 지장이 없는 팀. 그래서 이번 시즌에도 매우 가볍게 흘러가는 식으로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이번에도 현대제철이 우승하겠지."

하지만 축구란 변수가 많은 종목이다. 이변과 기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스포츠다. 창단 2년 차 팀 경주한수원이 인천현대제철을 꺾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경주한수원이 이변을 일으켰다. 지난 2일 황성 3구장에서 열렸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WK리그 5연속 챔피언 인천현대제철을 3-0으로 꺾었다. 5년 동안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팀이 불과 창단한 지 2년밖에 안 된 팀에 대패를 당했다.

인천현대제철로서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이번 시즌 부상자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걸 변명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큼 현대제철이라는 팀은 '지는 것'에 너그럽지 않다. 최인철 감독은 패배 이후 인천으로 올라오면서 곧바로 대역전극이 일어났던 경기를 찾았다. 작년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바르셀로나가 파리 생제르망과 벌어졌던 4점 차를 5점 차로 뒤집어 역전한 경기. 그 경기를 앞두고 당시 바르셀로나에 있던 네이마르는 "1%의 가능성만 있다면 우리는 99%의 믿음으로 움직인다"라고 말했다.

최인철 감독은 패배의 쓰라림을 느낄 새도 없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2차전에서 어떻게든 뒤집어보려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했다. 20분에 한 골, 5분 쉬고, 또 20분에 한 골. 최 감독은 이렇게 하면 네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훈련 프로그램을 시간별로 쪼갰다. 경주한수원을 분석하는 회의와 팀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영상을 함께 보며 3일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에 더해 선수들에게 위닝 멘탈리티를 불어넣으려 애썼다. 최 감독은 "분위기를 잡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혼도 많이 냈다"라고 말했다.

장슬기 ⓒ 대한축구협회

챔피언과 도전자는 없었다. 갈망만이 남았을 뿐.

그리고 5일 인천 홈에서 열린 2차전. 인천현대제철은 20분 만에 한 골을 넣으려는 계획은 실패했으나 꾸준하고 침착하게 경주한수원의 골문을 노렸다. 경주한수원도 조직력으로 맞서며 밀리지 않는 양상이었다. 인천현대제철은 전반 종료 직전 장슬기의 천금과 같은 선제골로 전반을 1-0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골마저 들어가지 않았다면 인천현대제철로서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의 양상을 보면 후반도 쉽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후반 이른 시간 정설빈의 페널티킥 골이 들어간 이후 분위기는 인천현대제철 쪽으로 넘어왔지만 좀처럼 마지막 골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인천현대제철로서는 두 골이 더 필요했다. 일단 연장전을 위해서라도 한 골이 필요했다. 홈구장이기에 연장에 돌입하면 인천현대제철이 분위기를 몰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경주한수원 선수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윤영글은 열정적으로 수비수들에게 라인을 지시하면서 어떻게든 1점 차 우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고문희 수석코치와 김풍주 코치는 테크니컬 지역을 벗어나면서까지 소리치며 선수들의 위치와 역할을 지시했다.

한 골. 그 한 골을 넣으려는 팀과 지키려는 팀이 엉킨 그 경기는 정말 치열하고도 처절했다. 인천현대제철과 경주한수원의 엠블럼을 지우면 누가 챔피언이고 누가 도전자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배경을 지우자 22명의 선수와 코치진, 감독만이 남았다. 무릎을 붙잡고 쓰러지는 선수들, 다리를 붙잡고 일어나 절뚝거리는 선수들, 달려드는 선수들, 몸을 날려 막는 선수들, 깊은 태클과 주심의 휘슬, 몸이 부딪히는 소리, 공 소리가 남았다. 심리전, 전략, 전술은 형태만 갖췄을 뿐이었다. 경기장 안에는 트로피를 향한 갈망만이 남았다.

그 이후로는 비슷했다. 정설빈의 페널티킥 골이 들어갔고, 연장전 따이스가 앞서 나가는 골. 그리고 연장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얻은 아스나의 깔끔한 마무리. 그 순간마다 팬들의 환호와 탄식이 섞여져 나왔고 현장을 지켜본 기자들의 입도 벌어졌으나 경기 스코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려는 선수들만이 보였을 뿐. 경기는 결국 김정미가 승부차기에서 세 번의 선방을 보여주며 인천현대제철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기뻐하며 우는 사람들과, 슬퍼하며 우는 사람들이 뒤섞였다. 그랬다. 모두 울고 있었다.

장슬기 ⓒ 대한축구협회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의 무게

그 장면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어차피 우승'이 어딨어. 이렇게 간절한데." 5연패를 하든, 창단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팀이든 우승을 향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어차피 시즌이 새로 시작되면 모두가 동일한 승점 '0점'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끝은 결국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역사는 인천현대제철의 6연패를 건조하게 기록하겠지만 이 경기는 그렇게 건조하게 볼 경기가 아니었다고.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은 그렇게 가볍게 붙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인천현대제철이나 경주한수원을 향한 존중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유니폼 색을 떠나서 이세은이나 김담비, 임선주, 이금민, 박세라, 따이스, 이네스가 뛰는 모습은 그 정도의 가벼움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고문희 코치의 말처럼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릴 수밖에 없었던 게 선수들에게 너무 가혹한 경기"였다.

이날 세 번의 선방으로 경기 MVP에 뽑힌 김정미는 '6번째 우승해도 여전히 좋으냐'라는 질문에 "진짜… 너무 좋다. 이번 시즌 선수들이 많이 다쳐서 로테이션도 그렇고 많이 힘들었다. 오늘 경기로 보상받은 게 아닌가. 기쁨을 표현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김정미는 이런 극적인 경기를 2015년에도 경험했었다. 이천대교와의 챔피언결정전 2차전도 연장까지 가는 혈투가 있었다. 이천대교의 김상은이 연장 전반에 선제골을 넣었고, 연장 종료 직전 비야의 페널티킥 골이 있었다. 극적으로 승부차기까지 갔던 인천현대제철은 승부차기 점수 4-3으로 트로피를 들었다. 그때도 참 어렵게 우승했다.

전반 종료 직전 선제골을 기록했던 장슬기는 경기 소감을 묻는 말에 "너무 슬펐다"라고 말했다. 장슬기는 "경기 뛰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모르겠다. 되게 복받치더라. 묘한 감정이 많이 올라왔다"라고 말했다. 다른 선수들은 다 다리에 쥐가 나도 "아직 스물 다섯 살이라 건강해서 괜찮다"라고 말했던 장슬기도 뛰는 내내 경기가 주는 분위기에 빠졌던 거다. 장슬기는 WK리그에서 뛴 3년 동안 모두 우승을 경험했다. 장슬기와 같은 인천현대제철 선수들에게는 어쩌면,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은 그들을 버티게 했던 힘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연장전 선제골에서 그렇게 침착하게 머리로 따이스에게 돌려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연장 후반 실점으로 승부차기까지 가면서도 결국은 승리하는 모습이 나온 걸지도 모른다.

장슬기 ⓒ 대한축구협회

이날 우승 현장에 '어차피'라는 가벼움은 없었다.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이 생각났다. 그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전북을 이끌며 스플릿 라운드 이전에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하지만 최 감독은 트로피를 들기 전부터 늘 고비가 있었다고 했다. 이겼지만, '어렵게' 이겼다고 했다. 우승을 결정하기 전에도 강원FC를 만났을 때 선제골을 내주면서도 기어코 역전했고, 우승을 확정한 울산과의 경기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동국의 페널티킥 골로 동점을 기록하면서 어렵게 우승을 확정했다. '어차피 우승은 전북'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릴 수 있었던 결과였지만, 경기 내용과 리그 전체를 복기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도 어쨌든 겨우 이겨냈고, 결국은 이겨냈을 뿐.

그래서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은 무겁게 느껴진다. 수식어가 붙는 팀에는 그만큼의 자존심과 자부심도 따라오니까. 그 팀의 팬들에게 '어차피 우승'이라는 말처럼 자부심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를 제외한 다른 팀에는 그만큼의 동기부여를 주니까. 이제 '어차피 우승은 어디'라고 마냥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북현대도, 인천현대제철도 다음 시즌에는 다른 팀들과 똑같이 승점 0점으로 시작한다. 다음 해에도 '어차피 우승은 그들'일까. 분명 쉽지 않을 거다. 챔피언은 그 쉽지 않은 고비를 넘으려 할 거다. 도전자들은 그런 챔피언의 위기를 노릴 거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 SK의 로맥이 두산 이용찬을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쳤다. '어차피 우승은 두산'일 줄 알았는데. 역시 가볍게 말할 만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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