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산그리너스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K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BBC'라는 은어가 있다.

K리그는 이적 루머에 대한 콘텐츠가 비교적 적다. 하지만 수요는 많다. 팬들은 항상 이적 루머에 목말라 있다. 어떤 선수가 팀을 옮긴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수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BBC'다. 신뢰도 높은 이적 루머를 보도하는 해외 매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그들은 예상치 못할 때 신빙성 높은 이적설을 커뮤니티에 던져놓고 홀연히 떠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BBC'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 반대인 루머의 당사자 입장은 어떨까? 뭔가 은밀한 비밀이 들킨 것 같을 것이다. 얼마 전 이런 기분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이 한 명 있다. 30일 임완섭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내정한 안산그리너스의 홍보팀 직원이다.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봤다. 이 직원, 그동안 마음고생 꽤 했다.

안산에 새로운 감독이 왔다

안산의 홍보 담당인 박현식 사원은 안산의 창단과 함께 축구계에 뛰어든 열정 넘치는 직원이다. 40도를 육박하는 불볕 더위에 항상 셔츠와 까만색 정장 자켓을 입고 일해도 웃으면서 미디어 관계자들에게 얼음 컵을 내미는 열정 넘치는 사원이다. 사실 그는 축구 팬 출신이다. 과거 K리그를 보며 축구 산업 종사자를 지망했고 안산에 입사하며 꿈을 이뤘다.

지난 28일 안산은 아무도 모르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이흥실 감독의 후임으로 임완섭 전 안산경찰청 수석코치를 임명한 것이다. 이날은 신임 임 감독이 안산시청을 방문해 안산시장에게 임명장을 받는 날이었다. 공식적으로 감독의 역할을 맡기 시작한 셈이다. 구단 내부에서는 임 감독 선임 보도자료 배포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감독 선임에 관한 사안은 보안이 필수다."

굳이 공식 발표를 늦추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다음 날 안산의 경기가 있었다. 신임 감독 선임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현재 이영민 감독대행이 팀을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임 감독의 선임이 발표되면 경기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박 사원은 미리 신임 감독 발표에 대한 준비를 모두 끝내고 그 때만을 기다렸다. 이후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한 채.

열심히 팀을 이끌고 있는 코칭스태프를 위해 경기 이후로 발표를 미뤘다 ⓒ 안산그리너스 제공

항상 하던 일을 하다 갑자기 멈춘 이유

29일 아침, 박 사원은 아침 일찍 출근했다. 그는 항상 출근시간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하는 편이다. 미리 업무를 처리하고 여유 있게 뉴스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 중에는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 '눈팅'도 있다. 그는 단순히 기자를 응대할 뿐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 또한 만들어야 한다. 팬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알아야 더 좋은 홍보 자료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눈팅'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날도 박 사원은 어김없이 각종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를 구경 중이었다. 하지만 모든 글을 세세히 살펴볼 정도로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안산'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글을 읽는 편이다. 그날도 그랬다. 근데 그날따라 검색 결과 중 유독 하나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안산도 감독 없어요." 뭔가 감독 없는 팀들에 대한 이야기였나보다. '우리 이제 감독님 오셨는데'라고 생각하며 그는 댓글이 달린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BBC'가 커뮤니티에 뜬 것이었다. 그리고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수도권에 위치해 있고 감독대행 체제인 팀이 새로운 감독 선임을 완료했다. 지역 이해도가 높고 해당 팀 유스 감독 출신이다. 그리고 다수의 코치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승격도 경험해봤다"는 것이 'BBC'가 흘린 내용이었다. 박 사원은 당황했다. 당시 많은 팬들이 FC서울이나 수원삼성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이거 우리 팀인데…'

이후 하나 둘 직원들이 출근하자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축구 커뮤니티의 글이 화제였다. 뭔가 비밀이 새나갔다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축구팬들의 시선이 안산에 쏠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K리그1 팀을 주목하고 있었다. 언론 보도도 아니니 굳이 선임 발표를 앞당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이대로 발표 날짜까지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박 사원의 내적 고통은 시작됐다.

혼자서 끙끙 앓아온 박 사원의 내적 고통

박 사원은 축구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BBC'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잘 안다. 입이 근질근질했다. 사실 가장 '아는 척'을 잘 할 수 있는 당사자가 바로 그다. 박 사원은 'BBC'가 밝힌 내용 중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 '구단 유스 감독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임 감독님이 안산 유스 감독을 맡은 적은 없어요. 예전에 안산에 있는 다문화 유소년 축구단에서 재능기부 형식으로 감독을 맡으신 것이 와전된 것 같았어요."

열심히 팀을 이끌고 있는 코칭스태프를 위해 경기 이후로 발표를 미뤘다 ⓒ 안산그리너스 제공

축구 커뮤니티에다가 "그 분 유스 감독 맡은 적 없다"라는 댓글만 달아도 그는 'BBC'급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입이 근질근질했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머의 파장이 더욱 커질 수록 박 사원의 고통은 심해져갔다. 심지어 지방 매체에서 루머의 당사자로 지목된 이영익 경남FC 수석코치에게 사실 확인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는 매번 심호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린데, 안산인데.'

하지만 그는 프로답게 행동해야 했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쓰지 말라고 했다. 잘못 단 댓글 하나는 실직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대나무숲이 있었다면 찾아가고 싶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조상님처럼 그도 남 모르는 고통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는 인내하고 인내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되자 박 사원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며칠 간 앓아오던 고통이 끝났다.

'BBC'에 가슴 철렁한 사람도 있다

박 사원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아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BBC'의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더 이상 루머는 없을 것이다. 축구팬들의 입장에서는 신분을 모르는 것이 나아 보인다. 물론 구단 입장에서는 민감한 부분이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썩 반길 리는 없다.

어쨌든 박 사원은 좋은 경험을 했다. 홍보 담당자의 입장에서 가슴 철렁한 순간을 넘긴 것은 경험이 될 수 밖에 없다. 안산이라는 팀은 아직까지 많은 축구팬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꾸준히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지역민들에게 다가가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비록 혼자서 내적 갈등을 했지만 박 사원은 오히려 감독 선임 발표 이후 "그 루머가 안산이었구나"라는 네티즌들의 반응에 조금이나마 안산을 알린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프로축구가 있는 이상 이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이적에 대한 관심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BBC'는 이런 관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존재다. 하지만 누군가는 'BBC'의 게시글에 가슴 졸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박 사원에게 '락밍아웃'인지 '펨밍아웃'인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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