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그리너스 박진섭이 결승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부천=김현회 기자] 무명의 대학을 중도에 포기한 축구선수가 있다. 서울문화예술대 축구부 박진섭이다. 프로팀 입단 테스트를 준비 중이던 그는 프로팀 입성에 실패하자 대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공백이 생겼고 가까스로 내셔널리그를 알아봤다. 인천코레일에서 입단 테스트 기회를 줄 테니 한 번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계약이 보장되지 않은 입단 테스트였다. 박진섭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길로 바로 내셔널리그 인천코레일 입단 테스트에 응했다.

그것도 선수 수급 막바지에 일어난 일이다. 가까스로 입단 테스트를 받은 그는 2017년 2월 대전코레일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박진섭은 이렇게 떠올렸다. “축구를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힘들었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갈 길이 막막했다.” 그렇게 무명 대학 축구선수였던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셔널리그로 향했다. 그에게는 계속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올 시즌을 앞두고 그에게 믿기지 않는 소식이 전해졌다. K리그2 안산그리너스 이흥실 감독이 손을 내민 것이었다. 재정이 풍족하지 않은 안산은 내셔널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비롯해 아직 꽃 피우지 못한 이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흥실 감독은 내셔널리그에서 뛰는 박진섭을 주목했다. 그렇게 박진섭은 올 시즌을 앞두고 안산 유니폼을 입으며 프로 입성에 성공했다. 프로 입단 자체로도 그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박진섭은 줄곧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팀 상황은 좋지 않았다. 9연패를 하며 꼴찌로 내려 앉았고 그를 처음 발탁한 이흥실 감독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사퇴했다. 그를 살려낸 감독은 그렇게 떠나갔다. 팀 분위기는 최악으로 떨어졌다. 박진섭도 힘들었다. “매주 분위기 좋게 다시 시작하자고는 했지만 선수들도 부담감이 컸다. 연패 분위기 속에서 운동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다. 파이팅을 독려해도 쉽게 파이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매 경기 따라와 응원해주는 팬들을 생각해 버텼다.”

무려 9연패를 당했다. 그렇게 2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부천FC를 상대로 경기를 준비했다. 이 경기에서 패하면 10연패라는 최악의 기록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안산은 또 다시 선취골을 내주며 끌려 갔다. 전반을 0-1로 마친 뒤에는 정말 10연패가 눈앞에 와 있는 듯했다. 하지만 후반 들어 안산은 거짓말 같은 역전에 성공했다. 안산은 후반 16분 김현태가 동점골을 뽑아낸 뒤 후반 43분 믿을 수 없는 역전골을 뽑아냈다. 바로 박진섭의 작품이었다. 박진섭은 통렬한 오른발 슈팅을 날린 뒤 벤치로 달려가 동료들과 포옹했다.

경기 후 만난 박진섭은 웃으며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전했다. ⓒ스포츠니어스

“(김)종석이 형이 측면에서 치고 들어왔다. 어제 한일전에서 손흥민이 드리블을 한 뒤 이승우가 넣은 골과 비슷한 장면이었다. 종석이 형의 드리블이 살짝 길어 내가 ‘비켜달라’고 한 뒤 골키퍼의 틈을 보고 자신 있게 때렸다.” 박진섭은 이 짧은 순간을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골로 안산은 9연패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안산은 이렇게 부천에 2-1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안산 선수들 대다수는 그라운드에 쓰러질 정도로 간절하게 뛰었다.

경기 후 만난 박진섭은 가장 먼저 이흥실 감독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 계실 때 더 간절한 마음으로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 감독님이 나가시고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하다. 나를 영입했고 그 이후에는 믿고 기용해 주신 분이다. 안 좋은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다. 감독님이 떠나셔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매주 많이 힘들었다. 연패가 이어지다보니 코치진도 다 힘들어 했다. (장)혁진이 형부터 고참 형들이 분위기를 잡아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한 마음으로 믿고 경기에 나가 승리할 수 있었다.”

박진섭은 간절한 선수다. 무명 대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실업 무대에서 뛰던 선수라 더 그렇다. 그는 이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했다. “나는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못 볼 꼴을 다 보고 프로까지 왔다. 그래서 두려운 게 없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 팀이 매우 소중하고 감사하다. 우리는 항상 개인 기량보다는 조직력으로 축구를 하는 팀이다. 다같이 한 뜻으로 끝까지 믿고 갈 생각이다. 90분 내내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뛰겠다. 오늘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라운드에 서겠다.” 박진섭은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아직 그는 유명한 선수가 아니다. 그를 알아보는 팬들도 없다. 대신 동명이인의 과거 축구 스타이자 광주FC 감독이 훨씬 더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광주FC 박진섭 감독을 뛰어 넘는 것이라고 했다. “포털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박진섭 감독님이 먼저 나온다. 선수 때부터 너무나도 유명했던 분이고 나 역시 대단히 존경하는 분이다. 그런데 요즘은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이제 네 이름이 먼저 떠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 박진섭은 이렇게 연패를 끊는 귀중한 골을 넣으며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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