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심판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에서 가장 ‘핫’한 심판은 누가 뭐래도 김성호 심판이다. 팬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주심이기 때문이다. 김성호 심판은 지난 25일에도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을 퇴장시키며 한 번 더 논란의 중심에 섰다. 판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는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녔다. 2005년에는 경기 후 항의하던 이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2007년 내셔널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는 한 팀 선수 여섯 명을 퇴장시키며 몰수패를 선언한 적도 있다. 지난 해에는 FC서울과 광주FC와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오심을 범해 무기한 출장 정지 징계를 당했다가 51일 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심판이다. 항상 팬들로부터 비판 받는 심판 1순위다. 하지만 그가 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강희 감독과 유독 자주 충돌한 그가 지금 전북현대의 모태인 전북다이노스 출신이라는 흥미로운 사실도 세상에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은 ‘심판 김성호’의 자질 문제를 떠나 ‘축구선수 김성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김성호에 관한 이야기를 당시 동료와 감독 등을 대상으로 취재했다. 지금부터 축구선수 김성호는 어땠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국민대 스트라이커 김성호의 프로 입성

프로축구연맹 프로필에는 김성호 심판이 1983년 국민대에 입학해 1987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취재 결과 김성호 심판은 1993년 국민대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1970년생인 김성호 심판은 광주 숭신공고를 졸업한 뒤 1991년 국민대 소속으로 대통령배축구대회 호남대전에서 결승골을 뽑아내기도 했고 가을철 대학축구연맹전 경희대와의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뽑아내며 주목 받기도 했다. 1992년에도 국민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배재대전에서 골을 뽑아냈다. 다만 국민대는 대학 무대에서 그리 강한 팀은 아니었고 김성호 심판도 대학 무대를 주름 잡는 공격수는 아니었다.

1993년 국민대 졸업 예정이던 김성호 심판은 프로축구 드래프트에 도전했다. 당시 프로축구에는 폭풍이 불었다. 창단 예정이던 완산푸마 때문이었다. 재정이 열악했고 운영도 제대로 될 리 없던 완산푸마에 가고 싶은 선수는 없었다.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면 우선 지명권이 있는 완산푸마가 지명할 게 확실시 되던 선수들이 드래프트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양대 졸업 예정으로 대학 최고 선수를 넘어 국가대표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던 초특급 신인 정재권은 미래가 불투명한 완산푸마행에 부담을 느꼈고 결국 드래프트를 포기해 버렸다. 대학축구연맹 회장이자 한양대 체육실장인 김창기 회장의 간곡한 권유도 소용없었다.

정재권은 J리그 히로시마 산프레체를 비롯해 여러 해외팀으로부터 영입 제의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정재권이 드래프트를 포기할 경우 유력한 드래프트 1순위 후보였던 노정윤(고려대)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완산푸마행에 두려움을 느낀 대어급 선수들이 속속 드래프트를 거부하면서 드래프트 시장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결국 대어급 선수들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드래프트에 참가한 김성호 심판은 완산푸마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완산푸마는 황선홍을 지명했다가 포철에 황선홍을 내주면서 무려 8명을 받는 트레이드에 합의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김성호 심판은 1993년 1월 완산푸마 유니폼을 입으며 프로에 입성했다. 당시 완산푸마는 김일진과 정민, 조창근 등을 영입했다.

사실 그는 국민대학교 주전 공격수였다. ⓒ프로축구연맹

그가 속한 완산푸마의 우여곡절

하지만 문제는 창단식 열흘 뒤에 터졌다. 선수들과 코치진이 월급을 물론 계약금 한 푼 받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협회는 완산푸마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하고 다가올 시즌 경기 일정 변경에 대해서까지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완산푸마 측은 계약금과 월급 지급을 계속 미뤘다. 프로축구는 큰 혼란에 빠졌다. 완산푸마가 이렇게 무너질 경우 모든 경기 일정을 변경해야 했고 드래프트를 통해 완산푸마가 선택한 선수들의 진로 해결 또한 골칫거리였다. 협회에서는 곧바로 리그 참가 승인을 취소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호남 연고팀 창단이라는 숙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프로선수 등록마감일을 연기해줬다.

완산푸마는 돈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완산푸마가 구한 건 현금이 아니라 어음이었고 결국 부도처리가 되며 일이 더 꼬였다. 협회는 고심 끝에 3월 20일 개막 예정이던 리그를 일주일 뒤로 미루고 완산푸마를 제외한 채 다시 일정을 짜기로 결정했다. 완산푸마는 이후 부랴부랴 돈을 구해 일시불로 선수단에 지급했지만 이미 선수 등록 기간은 다 끝난 뒤였다. 협회는 이들의 리그 참가 불허를 못 박았다. 결국 김성호 심판을 비롯한 완산푸마 선수들은 리그 참가에 실패했고 아마추어와 프로 2군팀이 참가하는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참가하면서 칼을 갈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김성호 심판이 이흥실에 이어 완산푸마 창단 2호골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이다.

완산푸마의 공식 데뷔전은 1993년 5월 4일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배재대와의 예선이었다. 완산푸마가 열악한 구단이기는 했어도 약체 배재대는 쉽게 제압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 경기에서 완산푸마는 전반 19분 이흥실이 역사적인 첫 골을 뽑아낸 뒤 전반 37분과 후반 1분에는 김성호의 연속골로 여유 있게 앞서 나갔다. 비록 완산푸마가 전북현대의 역사를 계승하지는 않지만 김성호의 골이 조금만 더 빨리 터졌더라면 아예 다른 역사에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채 토너먼트 대회만 참가하는 변칙적인 운영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김성호가 몸 담은 완산푸마는 1993년 ‘엑스터’ 컴퓨터로 유명했던 제우정보가 운영권을 넘겨 받은 뒤 혼란을 겪다가 1994년 3월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사실 그는 국민대학교 주전 공격수였다. ⓒ프로축구연맹

김성호에겐 최고의 시즌, 1994년

이때 탄생한 게 바로 전북버팔로였다. 초대 감독은 김기복 현 내셔널리그 회장이 맡았다. 당시 선수 구성을 책임진 김기복 회장은 김성호 심판을 또렷이 기억했다. “완산푸마에서 전북버팔로로 바뀌면서 성호가 공개 테스트에 지원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선수였는데 테스트에서 보니 플레이가 나쁘지 않았다. 걸음발이 빨랐다.” 전북버팔로는 완산푸마 선수단을 전원 인수한 건 아니었지만 김성호는 팀이 인수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았다. 김기복 회장은 “성호가 당시 기량 면에서 크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면서도 “그래도 장래성을 봤다. 원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는데 당시 우리 버팔로 선수들은 인원이 많지 않아 자기 포지션이 아니어도 아무 자리나 막 투입하고 그랬다. 성호도 꽤 경기에 나갔다”고 회상했다.

1994년 전북버팔로에서 김성호 심판은 무려 33경기에 나서며 5골 5도움의 기록을 올렸다. 최약체 팀 공격수치고는 훌륭한 성과였다. 1994년 4월 1일 대우로얄즈를 상대로 프로 데뷔골을 넣은 김성호는 그해 8월 20일 전북버팔로가 대우를 4-3으로 제압하는 명승부에서도 득점포를 가동하며 역사를 썼다. 당시 이 경기에서 나란히 골을 넣었던 김경래 현 명지대 감독은 “성호가 체격은 왜소했는데 상당히 날렵했다”면서 “50m 달리기 등 단거리에서 스피드가 돋보였다. 같이 투톱으로 선 적도 있고 성호가 측면 공격수로 나선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김경래 감독은 그 해에 11골 3도움을 기록하며 전북버팔로를 이끌었다.

김경래 감독은 “공을 소유하면 간수를 잘했고 돌파도 가능한 선수였다.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성호가 돌파해서 패스 연결을 해줘 내가 골을 넣는 순간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김성호 감독과 함께 뛰었던 백송 고창북고 전 감독 역시 “성호가 공격수를 했는데 그 키에 비해 점프력이 좋았다”고 평했다. 김성호와 김경래, 백송 등 세 명은 전북버팔로가 대우를 4-3으로 제압할 때 모두 골을 넣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김기복 회장은 김성호가 특출난 공격수는 아니었다고 평했다. 그는 “경래가 우리의 주포였고 성호는 실력이 대단히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면서 “그 당시에는 평범한 선수였다”고 덧붙였다. 가능성은 보인 선수지만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팀에서 기회를 부여 받았을 뿐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축구선수 김성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성호 심판은 2005년 그라운드에서 관중을 폭행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한 팀에서 여섯 명을 퇴장시켜 몰수패를 선언한 적도 있다. 그라운드에서의 충돌과 논란이 잦은 편이다. 그렇다면 그의 선수 생활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떤 말을 할까. 김기복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원칙적인 사람이다. 옆에서 누가 좋게 좋게 하자고 해도 그런 게 안 통하는 성격이다.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하면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지 않은가. 공격수는 늘 쫓아다니는 수비수가 있다. 그런데 성호는 상대가 몸싸움을 걸면 슬기롭게 넘기지 못하고 속된 말로 보복을 할 때가 있었다. 상대가 조금만 건드리고 심하게 파울을 하면 몸싸움을 해서라도 안 지려고 하는 그런 고집이 있었다.”

그와 함께 뛴 백송 감독은 “욱하는 성격이 있는 건 맞다”면서도 “운동선수라면 다 똑같을 것이다. 욱하지 않는 선수가 어디 있겠나. 나는 더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백송 감독은 “성호가 원래 심성은 착하다. 선수 시절에도 친했고 요새도 가끔 만나는데 나쁜 행동을 하는 애는 아니다”라며 “그래도 예전에 한 번 사고를 크게 친 후에 이제는 나이도 먹어가고 많이 자제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사고란 2005년 관중 폭행 사건이었다. 김경래 감독은 “승부욕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해코지하는 선수는 아니었다”면서 “상대에게 돌파가 되지 않으면 꼭 그걸 넘어서려는 승부욕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를 평하는 과거 감독과 동료들의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그는 요즘에도 늘 형광 축구화를 신고 주심으로 나선다. 축구팬들에게는 이 형광 축구화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라운드에서 가장 튄다. 이제는 형광 축구화가 김성호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 김경래 감독에게 “원래 김성호 심판이 이렇게 선수 시절에도 튀었느냐”고 묻자 껄껄 웃으면서 답이 돌아왔다. “대놓고 튀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래도 나름대로 외모는 신경 쓰는 애였다. 당시 선수들이 뒷머리를 기르는 게 유행이었는데 성호도 그러고 다녔다. 얼굴도 나름대로 잘 생기지 않았나. 성호가 당시 막 출시된 ‘무쏘’를 뽑은 것도 기억난다. 인기 있는 차였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은근히 튀게 하고 다녔다. 생각해 보니 그때 형광 축구화는 신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그는 국민대학교 주전 공격수였다. ⓒ프로축구연맹

김성호와 형광 축구화, 그리고 스타킹

또한 김성호 심판은 선수의 스타킹에 유독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경기 도중 선수의 스타킹이 조금만 내려가 있어도 이를 지적하고 고치도록 지시한다. 전북의 로페즈가 특히나 자주 지적을 받는다. 이 이야기를 전하자 김경래 감독은 웃으며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호도 스타킹을 자주 내려 신었던 것 같다. 원래 선수들이 다 스타킹이 불편해 내려 신지 않느냐”고 했다. 은퇴하기 전까지 전주의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는 백송 감독은 “같이 집에서 가끔 밥도 먹고 그랬는데 애가 성실했다”고 했다. 지금의 김성호 심판 이미지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1994년 전북버팔로는 구단주도 없이 재정난을 겪으며 근근이 버텨와 동료애가 더 돈독했다. 동료들은 김성호 심판을 그리 나쁘지 않게 기억했다.

1994년 한 시즌만 소화하 뒤 전북버팔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동료애로 끈끈하게 뭉쳤던 선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전북버팔로는 그렇게 한 시즌 동안 3승 5무 22패라는 성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 전북버팔로 해체 2주 뒤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주식회사 현양을 대주주로 하는 새로운 전북팀의 창단이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현대 계열사도 아니고 연간 매출이 60억 원에 불과한 운송업체인 비상장 기업 현양이 현대의 주선으로 전북 축구 살리기에 나서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현양은 현대자동차 협력 업체로 정몽준 의원의 강력한 추천을 받고 전북 축구 살리기에 뛰어들었다. 이미 자본금 10억 원을 확보했고 구단 정상화까지 현대자동차에서 광고 스폰서로 20억 원을 지원하기로 합의까지 한 상태였다.

그렇게 1994년 12월 13일 전북다이노스가 출범했다. 전북 버팔로 선수들을 모두 다 품을 수는 없었지만 무려 11명의 선수들이 버팔로에서 다이노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수 있게 됐다. 다이노스는 드래프트에서 부산공대 장철민을 1순위로 지명했고 2순위로는 상무 제대를 앞둔 김도훈을 선택했다. 차경복 감독이 다이노스의 초대 감독이 됐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북버팔로에서 전북다이노스로 넘어간 이 11명의 명단에 김성호 심판도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연맹에서는 전북버팔로는 이미 해체한 구단으로 규정했고 전북다이노스를 신생팀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전북다이노스는 이후 운영 주체가 바뀌고 팀명도 바뀌었지만 지금의 전북현대가 그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사실 그는 국민대학교 주전 공격수였다. ⓒ프로축구연맹

전북 원년 멤버 김성호를 아시나요?

김성호 심판은 전북현대의 원년 멤버다. 이 사실은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놀랍다. 아마 지난 주말 최강희 감독과의 격전 등으로 김성호 심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전북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일 수도 있다. 김성호 심판은 1995년 전북 유니폼을 입고 김경래, 백송, 오동천, 이경춘, 김도훈, 정종선 등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특히나 1995년 7월 포항과의 원정경기에서는 결승골을 뽑아내며 전북의 2-0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이 경기 승리로 전북은 4연패를 끊을 수 있었다. 이 골은 김성호 심판이 전북다이노스, 그러니까 전북현대의 전신인 팀 유니폼을 입고 기록한 유일한 골이었다. 김성호의 골로 전북이 포항을 이긴 적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김성호 심판은 1995년 19경기에 출장해 1골 1도움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버팔로와 다이노스를 함께 경험한 김경래 감독은 “성호가 무릎이 안 좋았다”면서 “대학교 때부터 고질적으로 무릎이 아파 지속적인 운동을 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계속 무릎 때문에 고생하다가 은퇴했다”고 전했다. 백송 감독 역시 “기억난다. 나와 같은 해 은퇴를 했다. 나도 무릎이 안 좋아서 같이 은퇴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지금은 너무나도 생소한 ‘전북 선수’ 김성호는 그렇게 전북에서 딱 두 시즌 동안 52경기 출장 6골 6도움의 기록을 남겼다. 이 중 지금의 전북현대 소속으로 인정받는 기록은 1995년 기록 뿐이다. 이후 전북다이노스는 전북현대가 됐고 ‘축구선수 김성호’를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현역에서 물러난 김성호 심판은 이후 심판 자격증을 따고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선수 시절부터 심판에 대한 꿈이 있었을까. 김경래 감독은 의외였다고 했다. 그는 “선수 시절 심판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 우리끼리 심판 판정이 잘못되면 우스갯소리로 같이 심판 욕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백송 감독 역시 “심판의 꿈을 가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성호가 다시 심판으로 돌아와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김기복 회장 역시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면서 “어느 날 보니 심판 쪽에 얼굴을 보이더라. 그래서 프로 쪽에 계신 분들한테 관심 있게 지켜봐 달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그는 국민대학교 주전 공격수였다. ⓒ프로축구연맹

그를 향한 옛 동료들의 메시지

그를 가까이에서 겪은 이들도 그가 심판으로 오랜 시간 K리그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흥미롭게도 프로 무대에서 딱 2년간 선수 생활을 한 그가 가장 오랜 시간 K리그에 남아 있다. 김성호 심판은 K리그에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가장 큰 이슈를 몰고 다닌다. 논란의 판정도 많았고 안티 팬들도 대단히 많다. 이제는 K리그를 떠난 옛 동료들에게 김성호 심판을 위한 한 마디를 부탁했더니 “또 무슨 사고를 쳤느냐”고 했다. “예전 만큼 대형 사고는 아니지만 이번 주말에도 최강희 감독과 충돌이 있었다”고 하니 김경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최강희 감독 퇴장 뉴스를 보긴 했는데 그 퇴장이 또 성호가 내린 거였나. 허허.” 백송 감독도 “또 그랬나. 한참 선배한테 왜 또 그랬는지 통화 한 번 해봐야겠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김경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도 강원도 태백에서 추계연맹전을 하는데 거기에 성호가 왔더라. 하루 전에 슈퍼매치를 했는데 부지런히 태백까지 왔다. 아마 친한 대학 감독 경기를 보러 온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 나도 잠시 만났다. 판정 이야기를 따로 하는 편은 아니다. 성호가 공정한 판정으로 한국 축구 발전에 이바지해주고 심판 인식 개선도 이끌었으면 한다. 욱하는 것도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백송 감독 또한 격려와 걱정을 했다. “자기 주관이 너무나도 뚜렷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누구와 충돌할 때도 강하게 부딪힌다. 그래서 마찰도 생긴다. 소신 판정을 하더라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으면 한다. 욱하면서 표출해 버리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자제하면 훌륭한 심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성호 심판은 늘 논란의 중심이다. 선수나 지도자들과도 강하게 충돌한다. 그 역시 선수 출신이라는 걸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오늘 칼럼이 그를 옹호하는 것도,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심판 김성호’가 아니라 ‘축구선수 김성호’도 있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 지금껏 많은 축구 이야기를 전해 왔지만 나 역시 생소했던 ‘축구선수 김성호’를 탐구하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가 ‘전북 선수’였다는 건 지금 떠올려봐도 대단히 생소한 일이다. 독자들에게는 ‘축구선수 김성호’를 알아가는 유익했던 시간이길 바란다. 또한 김성호 심판 역시 자신이 선수였던 시절을 잊지 말고 모두에게 공정한 판정을 내려주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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