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삼성은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을까.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만의 멋지고도 인상적인 문화가 있다. 이름하여 ‘승리샷’이다.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팀 선수들은 응원하며 90분 동안 함께 뛴 팬들과 함께 승리 기념 사진 촬영을 한다. 정확한 시작을 알 수 없지만 추정하건대 대전시티즌과 이 팀의 명예기자가 처음 시작한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K리그 팀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 ‘승리샷’을 남긴다. 이 사진은 곧 팀의 역사가 된다. 멋진 이 문화는 이제 K리그에 뿌리를 내렸다.

비장하고도 침울했던 빅버드

역사적인 승격을 이룬 팀도, 짜릿한 잔류에 성공한 팀도, 라이벌을 이긴 팀도 팬들과 함께 추억을 남긴다. 선수들은 이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유니폼을 뒤집어 입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하고 팬들은 머플러를 펼쳐 들거나 응원 문구가 잘 보이도록 들어 올리기도 한다. ‘승리샷’을 보면 그 경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계절도 다르고 경기장도 다르지만 ‘승리샷’에는 행복이 묻어있다. 뒤에 선 팬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인상적이다. 다들 이 사진을 찍을 때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지금껏 늘 봐온 ‘승리샷’은 그랬다.

어제(25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수원삼성과 경남FC의 KEB하나은행 2018 K리그1 경기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전남전에서 4-6 참패를 당하는 등 최근 3연패에 빠진 수원삼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어느 경기장보다 빼곡한 응원 걸개가 내걸렸던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이날따라 차가웠다. 실망스러운 연패를 거듭한 선수들을 향해 팬들이 한시적으로 이 경기 응원 거부를 선언한 것이었다. 선수들을 응원하던 그 많은 걸개는 다 사라졌고 단 하나의 걸개만이 경기 전에 내걸렸다. 문구는 이랬다. ‘야망이 없는 프런트, 코치, 선수는 당장 나가라. 수원은 언제나 삼류를 거부해 왔다.’ 이 걸개는 비판적인 의미를 담아 거꾸로 내걸려 있었다.

경기 전 만난 서정원 감독도 이런 팬들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제라면 내가 문제다. 우리 선수들은 절대 나태하지 않다. 요즘 경기마다 몇 번 아쉬운 장면이 있었지만 나는 우리 선수들을 끝까지 믿는다”라면서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항상 책임질 각오는 돼 있다. 내가 이 팀에서만 13년을 있었다. 팬들이 열정적이고 애착이 강한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 팀에서 13년을 있었던 내가 지금 분위기를 가장 잘 안다. 내가 부족하면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지도자가 부족하면 떠나야 한다. 내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기 싫다. 대신에 힘들 때 우리 선수들에게 힘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정원 감독도 팬들의 이런 메시지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프로축구연맹

질책성 걸개만이 나부끼다

분위기는 침울하면서도 비장했다. 팬들은 선수단이 입장할 때는 자신들의 선수를 향한 질책성 메시지를 내걸었다. ‘수원의 선수라면 열정을 보여라. 어찌 이런 팬들 앞에서 나태해졌는가. 이곳에 있어야 할 것 투지 열정, 야망. 나태해진 모습의 결과, 우리의 목소리를 잊지마라.’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수원삼성 팬들은 이날 90분 동안 조직적인 응원을 하지 않았다. 후반 염기훈의 코너킥 기회에서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냈을 뿐 일체의 조직적인 응원을 거부했다. 늘 들썩였던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이날따라 대단히 차분했다. 늘 취재진으로 찼던 수원월드컵경기장을 찾은 취재진도 딱 다섯 명 뿐이었다. 수원삼성의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경기는 결국 신화용의 페널티킥 선방과 곽광선의 결승골로 수원삼성이 경남FC를 1-0으로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수원삼성으로서는 대단히 값진 승리였다. 그리고 수원삼성 선수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관중석을 돌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나는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기자회견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유심히 이 모습을 살폈다. 질책성 걸개만 덩그러니 걸려져 있고 경기 내내 응원을 거부했던 팬들과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선수들이 어떻게 마주하는지 사뭇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일반 관중석에 인사를 마친 선수들이 골대 뒤로 향했다. 그러자 잠시 수거됐던 ‘야망이 없는 프런트, 코치, 선수는 당장 나가라. 수원은 언제나 삼류를 거부해 왔다’는 내용의 걸개가 다시 똑바로 걸렸다.

응원 걸개로 뒤덮였던 여느 경기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박수와 함성은 비슷했다. 골대 뒤로 인사를 하러 온 선수들을 향해 팬들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박수를 보냈다. 단 다른 것이라면 선수들을 향한 질책성 걸개가 걸려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쭉 지켜보는 와중에 지금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장면이 연출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수들과 팬들이 하나가 돼 ‘승리샷’을 찍기 위한 포즈를 취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질책성 걸개와 ‘승리샷’을 한 프레임에서 같이 본 적은 없었다. 이렇게 질책성 걸개와 ‘승리샷’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하나의 사진에 담기게 됐다. 한 동안 멍하니 이 모습을 바라봤다. 뭐랄까.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한 프레임이었다.

서정원 감독도 팬들의 이런 메시지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프로축구연맹

질책성 걸개와 ‘승리샷’의 오묘한 조화

선수들과 팬들의 표정이 대단히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나 선수들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승리샷’처럼 기분 좋게 ‘브이’를 그린 선수도 없었다.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고 라이벌을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것도 아니었다. 3연패 끝에, 그리고 제주까지 갔다가 태풍 때문에 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돌아온 후에 거둔 힘겨운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 내내 응원 한 번 받지 못하고 질책성 걸개를 보면서도 덤덤히 ‘승리샷’을 연출한 선수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응원하는 팀이 못하면 관심을 끊는 게 보통인데 침묵 시위로 의견을 내기 위해 경기장까지 간 팬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질책성 걸개를 ‘승리샷’ 배경으로 내건 뒤 사진을 찍고는 선수들에게 여느 때와 같이 박수를 보냈다.

이 딱 한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선수들을 질타하는 메시지와 ‘승리샷’이 공존하는 오묘한 분위기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마 머나먼 시간이 흐른 뒤 후대에서 K리그의 여러 ‘승리샷’을 뒤져보다가 이 모습을 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 같다. 다른 ‘승리샷’은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걸개와 승리를 기뻐하는 선수, 팬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유독 2018년 8월 25일 수원삼성-경남FC전 ‘승리샷’은 선수들을 질책하는 걸개와 함께 승리한 선수단의 굳은 표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 ‘승리샷’에 대단한 궁금증을 가질 것 같다. 이 경기의 숨은 사연을 알지 못한다면 질책성 걸개와 ‘승리샷’이 공존한 이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침묵 시위로라도 선수들을 질책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팬들도 대단하다. 답답하고 화가 나면 안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지만 직접 현장으로 가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그 메시지가 불쾌할 수도 있지만 꾹 참고 승리한 뒤 이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선수들의 정신력도 대단하다. 한 사진에 담기기 어려울 것 같은 이 장면은 어제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연출됐다. 누가 이런 스토리를 가정하고 찍으라고 하면 아마도 이렇게 찍지 못했을 것 같다. 빅버드의 가장 오묘했던 이 한 장면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다. ‘수원의 선수라면 열정을 보이라’는 걸개 앞에서 ‘승리샷’을 찍은 선수들은 다음 경기에서도 팬들의 요구대로 열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질책성 걸개와 ‘승리샷’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이 장면은 찰나였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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