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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한 시대가 바뀔 때 우리는 격동의 시기를 맞는다.

그 선택이 진일보든 퇴보든 혼란의 시기는 찾아온다. 단지 그 시기가 짧은지 짧지 않은 지의 차이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혼란을 목도한 바 있다. 세계 각지에서 정권 교체나 혁명이 일어날 때도 그랬고 우리나라 또한 그랬다. 광복이나 4.19 혁명 이후 겪었던 혼란을 생각해보라. 그렇게 세상은 한 번씩 흔들리면서 바뀐다.

안산그리너스가 21일 저녁 이흥실 감독의 자진사퇴를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박공원 단장이 자신의 SNS를 통해 단장 직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안산그리너스의 창단, 더 과거로 가면 안산경찰청의 토대를 마련한 두 주인공이 이제 퇴장한다는 뜻이다. 박 단장은 2014년 안산경찰청의 사무국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이 감독은 1년 뒤인 2015년 부임해 지금까지 안산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들의 퇴장을 보며 안산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축구단, 특히 시·도민구단에서 단장이나 감독이 바뀌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구단의 비전이나 방향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시대를 열고 닫는 존재가 아닌 그저 시대를 이어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안산경찰청의 마지막 시대를 잘 마무리하고 시민구단 안산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꽤 큰 임무가 주어졌다. 그렇기에 그들의 존재감은 꽤 커보인다.

안산 이미지 구축한 박공원 단장

지금 축구팬들에게 "안산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사회공헌활동 하는 팀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이미지를 구축한 것은 박 단장의 작품이다. '반포레 고후 덕후'인 박 단장은 고후의 사회공헌활동 시스템을 안산에 옮겨왔다. 그리고 강하게 추진했다. 구단 직원은 물론이고 선수도 감독도 동원됐다.

당시에는 생소했다.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 하지만 안산이 관중 유치에 조금씩 힘을 내기 시작하자 바라보던 시선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안산 지역 초등학교들에서 안산 마스코트의 인기를 실감하며 무릎을 쳤다. '정말 씨앗 많이 뿌리고 있구나. 이게 사회공헌활동의 힘이구나.' 박 단장은 사회공헌활동에 미쳐 있었다. 심지어는 취재 온 내게 "오후에 뭐하냐"더니 "빵 공장 가서 빵 만들 건데 같이 가자"고 했다.

ⓒ 안산 그리너스 제공

물론 박 단장의 역할을 단지 사회공헌활동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공도 있고 과도 있을 것이다. 과거 지역 내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안산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름대로 이미지에 맞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단지 장기간 바라보고 투자해야 하는 것이 사회공헌활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비교적 일찍 떠난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안산에 생존법 심은 이흥실 감독

박 단장이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이 감독은 안산이 살아남는 법을 구단에 심고 있었다. 안산은 K리그를 통틀어 가장 운영비를 적게 쓰는 축에 속한다. 운영비는 결국 선수 몸값이다. 좋은 선수, 많은 선수를 데려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적시장이 열릴 때였다. "안산은 영입 안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이 감독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한 명 데려오려면 한 명 나가야해."

열악한 환경이다. 그래서 이 감독은 훈련장에서 그렇게 선수들에게 소리를 질러도 기자회견장에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내 탓이다. 패했지만 선수들에게 고맙다." 이겼을 때도 비슷하다. 사실 이 때문에 이 감독의 기자회견은 생각보다 별 내용이 없다. 그나마 이기고 나서 "감독이 선수들 고기 사주겠다는 말 꼭 써달라" 정도가 독특한 수준이다. 아니면 기자 옆 자리에 앉거나 말 안하고 눈빛으로 기자회견 하는 정도다.

그렇게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한 가지 확실한 DNA를 심었다. '홈에서는 공격하고 원정에서는 안정적으로 간다'는 것이다. 홈에서는 지더라도 무조건 재밌는 축구를 하고 원정에서는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뜻이다. 최하위권 전력이라 평가 받는 안산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초기에는 '이게 지난주 그 팀이 맞아?'라고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안산의 생존법이었다.

둘의 시너지 효과로 이끌었던 안산

사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충돌할 수 있었다. 관중 유치라는 단장의 과제와 성적 상승이라는 감독의 과제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꽤 호흡이 잘 맞는 모습이었다. 박 단장은 없는 살림에서 이 감독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줬고 이 감독은 박 단장의 사회공헌활동에 적극 협조했다. 서빙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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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두 사람은 유쾌했다. 경기 전 라커룸에 방문한 박 단장은 이 감독의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박 단장은 정장 등 홈 경기를 준비하는 직원들에게 깔끔한 옷차림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감독은 그날 따라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박 단장은 웃으며 큰 소리로 "아니 감독님. '추리닝' 입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감독도 씩 웃더니 "아니 팀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뭔가 변화를 줘야할 거 아니야"라며 받아쳤다. 날 서있지 않은 유쾌함이 말에 들어있었다.

수 년 간 산전수전 다 겪은 동지애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박 단장은 종종 "이 감독 덕분에 사회공헌활동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많이 도와줬다"라고 말했고 이 감독 역시 "그래도 박 단장이 고생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 덕에 안산은 연패에 빠져있고 성적이 좋지 않아도 오히려 다른 팀에 비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성적 그 이상의 가치를 바라본다는 둘의 시너지 효과 덕분이었다.

안산의 다음 시대, 진보일까 퇴보일까

이제 그들은 떠난다. 안산의 키 작고 재밌는 지역 인사 이 감독과 수다쟁이 아저씨 박 단장의 여정은 마무리됐다. 그렇다면 다음 주역이 그들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사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구단주다. 당은 바뀌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장이 안산의 구단주를 맡았다. 이제 안산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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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시즌 중에 떠난다. 혼란이 예고된다는 이야기다. 먼저 구단주에게는 이 혼란을 빠르게 수습해야 한다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를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감독과 단장을 선임해야 한다. 내부 취재 결과 새로운 단장은 곧 부임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신임 감독이다. 현재는 이영민 수석코치의 대행 체제로 운영되지만 일찌감치 내년 시즌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발빠르게 감독 선임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안산은 진정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지금까지 안산은 시민구단치고 꽤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를 유지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다. 과연 새로운 인물들이 안산을 한 단계 도약시킬 것인지, 아니면 퇴보시킬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아직까지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에 상당히 불안하다. 안산의 진짜 위기는 8연패나 최하위가 아니라 이제부터가 아닐까. 난세에 영웅이 나오듯이 혼란에 접어들기 시작한 안산을 구할 새로운 인물은 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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