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전 직전 만난 황태현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12일 안산~와스타디움. 저녁 7시에 열리는 안산그리너스와 성남FC의 KEB하나은행 K리그2 2018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이 경기 한 시간 20분 전에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가볍게 잔디를 밟는 선수도 있었고 수다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코네는 취재진 앞에서 한글로 된 선수 명단을 줄줄이 읽어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유독 긴장돼 보이는 선수가 한 명 있었다. 딱 바로 앳돼 보이는 이 선수는 이 경기가 생애 최초의 K리그 출전이었다. 처음으로 K리그 그라운드를 밟게 된 이 선수의 이름은 바로 황태현이었다. 1999년생으로 만 19세의 어린 이 선수는 쟁쟁한 형들과 함께 안산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황태현이 간직하게 된 알파인컵 우승

황태현은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다. 광양제철고 시절인 2015년 U-17 대표팀에 뽑혀 칠레에서 열린 청소년 월드컵도 경험했다. 당시 이승우를 비롯해 유주안, 김진야, 박명수, 김정민, 이승모 등이 그와 한솥밥을 먹었다. 당시 한국은 조별예선 두 경기 만에 2승을 거두며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한국 축구가 지긋지긋했던 조별예선 경우의 수를 떨쳐내는 순간이었다. 황태현은 이후에도 계속 연령별 대표팀에 발탁되며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7년 중앙대에 입학한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안산그리너스에 입단했다. 연령별 대표팀에서 쭉 주장을 지낸 황태현이 K리그2에서도 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을 선택했다는 건 의외였다.

하지만 황태현은 “어디서든 능력을 보여주기만 하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저없이 안산을 택했다. 물론 수비진에 경험도 풍부하고 노련한 선수들이 많아 황태현에게 기회가 빨리 찾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정용 감독이 이끄는 U-19 대표팀에서는 줄곧 그를 발탁했다. 지난 4월 JS컵이 열리자 정정용 감독은 그에게 또 다시 주장 완장을 맡겼다. 지난 달에는 미얀마 만들레이에서 열리는 알파인컵에 나설 선수로도 발탁됐다. 큰 대회는 아니었지만 이 대회는 미얀마와 레바논, 태국 U-23 대표팀이 참가하는 대회다. 한국만 U-19 대표팀이 참가하게 돼 쉽지 않은 경쟁이 될 것으로 보였다. 미얀마와 레바논, 태국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점검을 위해 나서는 대회였다.

한국은 완벽한 전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조영욱(FC서울), 전세진(수원삼성), 이강인(발렌시아) 등은 소속팀에서 차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팀 내에서 중용되지 않은 황태현은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선수들을 이끌었다. 어린 나이에는 한 살 차이도 전력차가 상당했지만 한국은 네 살이나 많은 상대팀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3차전 바레인 U-23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도 2-1로 승리하며 3전 전승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준우승은 미얀마(1승 1무 1패), 3위는 바레인(1승 1무 1패), 4위는 태국(3패)이었다. 더군다나 황태현은 한국 수비진을 이끌며 대회 최우수선수에까지 선정됐다. 황태현은 동료들과 기분 좋게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19세의 황태현은 프로에 입성해 데뷔전까지 치렀다. ⓒ프로축구연맹

소속팀 복귀하니 우승은 추억일 뿐

황태현은 늘 정정용호에 좋은 추억이 많다. “알파인컵을 준비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팀이 잘 뭉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감독님의 전술이 너무 좋았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상대가 강하게 나올 걸 대비해 선수비 후역습을 준비했는데 이게 잘 먹혀 들어 세 경기를 모두 이겼다. 비록 큰 대회는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대회에서 우승하는 ‘습관’을 들이면 나중에는 큰 대회에서도 우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대회 우승을 통해 자신감도 생겼고 동료들과도 좋은 추억을 쌓았다. 알파인컵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코치진들도 분위기를 많이 띄워줘 신나게 경기를 했다.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와 안산에 복귀하니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안산은 무려 6연패를 당하며 꼴찌로 추락해 있었다.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동료들과 우승의 기쁨을 누리며 기념 사진을 찍고 추억을 쌓았던 황태현은 안산에 복귀하자마자 침울한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알파인컵 우승을 하고 돌아와 극과 극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래도 훈련 분위기가 알파인컵 때와는 다르다. 연패 중이라 예민하다. 훈련 도중 한 번 눈감아 줄 법한 실수도 짚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냉탕과 온탕을 오간 기분이다. 내가 막내니까 그래도 가장 활기차게 하려고는 한다. 운동장에서 한 발이라도 더 뛰면 형들도 자극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황태현에게 알파인컵 우승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었다. 아직 프로 데뷔전도 못 치른 막내는 곧바로 팀에서의 주전 경쟁을 시작해야 했다.

황태현은 팀에서 가장 어리다. 팀내에 동갑내기도 없다. 한 살 많은 형도 딱 한 명 뿐이다. 대학교를 1학년만 마치고 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프로라고는 해도 아직은 막내가 해야 할 일은 있다. “대단한 일은 아니고 그냥 막내들이 하는 잡일을 도맡아 한다. 훈련을 하거나 그럴 때 모든 뒤처리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막내니까 눈치껏 하는 거다.” 연령별 대표팀 주장도 이렇게 프로팀에 오면 여전한 막내였다. 이흥실 감독은 황태현이 우승 메달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고 돌아오자 선수단이 모여 있을 때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그렇게 상 받았는데 형들 커피라도 한 잔 샀어?” 황태현이 “아직 안 샀다”고 하자 이흥실 감독은 그 앞에서 형들에게 커피 한잔씩을 돌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연패에 빠져 팀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이런 작은 즐거움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다.

만19세의 황태현은 프로에 입성해 데뷔전까지 치렀다. ⓒ프로축구연맹

그에게 찾아온 프로 데뷔전 기회

그런 황태현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FC안양과의 지난 라운드 경기에서 신일수와 최명희가 나란히 경고를 받으며 경고누적으로 다음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흥실 감독은 황태현을 따로 불러 다음 경기 출장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태현은 훈련 도중 주전팀 조끼를 입고 주전 선수들과 함께 땀 흘렸다. 황태현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프로 데뷔가 현실로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불과 일주일 전 알파인컵에서 우승을 거둘 때의 활기찬 분위기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연패를 끊어야 하는 K리그2 경기라는 건 임하는 자세가 사뭇 달랐다. 불과 며칠 사이 황태현은 그가 앞으로 오랜 시간 경쟁하고 버텨야 할 무대로 돌아와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이 무대는 동갑내기 친구도 없는 외로운 곳이다.

12일 성남FC전을 앞두고 안산와~스타디움에 도착한 황태현은 라커룸에 들어간 뒤 이흥실 감독으로부터 선발 출장하라는 지시를 공식적으로 처음 받았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긴장감이 몰려왔다. 경기 한 시간 20분 전 선수들이 잔디 상태를 점검하러 그라운드에 나와 여유를 즐길 때도 황태현은 조금은 긴장된 모습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음악을 들으며 잔디를 밟거나 수다를 떨고 코네는 장난 삼아 떠듬떠듬 한글을 읽을 때였다. 갓 K리그 데뷔전에 출장하라는 지시를 받은 황태현을 만났다. “최선을 다해 경기가 끝난 뒤 후회만 남기지 말자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하던 대로 자신 있게 해볼 생각이다. 그래도 나는 내 나이 또래 선수들에 비해서는 경험이 꽤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경험을 믿고 최선을 다하겠다.”

이제 막 데뷔를 앞둔 선수의 이야기는 풋풋하면서도 새로웠다. 이날 황태현의 상대팀에는 알파인컵을 함께 한 동료가 있었다. 김소웅이었다. 김소웅은 비록 출장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경기장 한 켠에서 팀 동료들과 황태현을 지켜보기로 했다. 황태현은 일부러 경기 전에는 김소웅를 만나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혼자만의 생각도 좀 하고 경기를 준비할 생각이다. 소웅이와는 경기가 끝난 뒤 얼굴을 보려고 한다. 계속 생각하는 건 오늘 수비에 대한 기본만 하자는 것이다. 무리해서 좋은 패스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형들의 장점을 살려주면서 내가 기본부터 해야 한다.” 이흥실 감독은 황태현 기용에 대해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우리 팀이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린 선수들도 기회를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오늘 형편없으면 나하고 같이 욕 먹는 거고 잘해주면 앞으로 더 클 것이다.”

만19세의 황태현은 프로에 입성해 데뷔전까지 치렀다. ⓒ프로축구연맹

만 19세 수비수 황태현의 역사적인 데뷔

경기 전 만난 이흥실 감독은 그러면서도 황태현에게 거는 기대를 나타냈다. “최명희와 신일수가 경고누적으로 빠지면서 측면 수비로 나설 선수가 없다. 태현이가 U-19 대회에 가서도 잘해 ‘한 번 해보라’고 경기에 내보내기로 했다. 클 놈은 이런 기회에 팍팍 커야 한다. 애가 자기 또래에 비해서 수비력도 좋고 몸싸움이나 스피드도 괜찮다. 그래서 이왕 붙는 거 센 놈(성남)하고 붙어서 좀 느껴보라고 했다. 아마 최명희와 신일수가 복귀하면 다시 태현이한테 한 동안 기회가 안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최명희는 측면보다는 그래도 수비형으로 많이 뛰는 스타일이다. 태현이가 오늘 조금만 보여줘도 앞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진다.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라면 나는 계속 경기에 내보낼 생각이다. 물론 본인이 오늘 경기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흥실 감독은 황태현의 약점도 지적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측면 수비수들의 크로스가 부족하다. 과거 김판근이나 박진섭, 현영민 등은 날카로운 크로스는 아니어도 침투하는 공격수를 보고 탁탁 맞춰서 크로스를 넣어줬다. 그런 게 필요하다. 요새 크로스가 좋다는 홍철 같은 선수는 날카롭게 찔러주는 크로스는 좋지만 공격수를 딱 보고 공간에 찍어 넣어주거나 수비수를 찍어 넘겨주는 크로스는 아직 좀 부족하다. 옛날에 김판근이 그런 걸 참 잘했다. 그런데 태현이도 그런 부분이 약하다. 늘 킥 연습을 많이 시키면서 ‘하면 실력이 늘어난다. 크로스만 잘해도 한 골이다’라고 말한다. 19살짜리한테 이런 것까지 바라는 게 무리일 수도 있지만 자기가 오늘 경기에서 무난히만 보여주면 경쟁력은 충분히 있다.”

경기를 앞둔 황태현은 긴장하면서도 자신감을 나타냈다. “오히려 상대가 1위 팀인 성남이라 더 좋다. 내가 잘하면 더 부각될 수 있고 못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못 하더라도 배울 게 많은 상대다.” 당당하게 이날 역사적인 프로 무대 데뷔전을 치른 황태현은 오른쪽 윙백으로 출장해 활발하게 그라운드를 누볐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주장 완장을 차고 U-19 대표팀을 이끌며 우승을 맛봤던 그는 프로 무대에서는 갓 첫 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탈꼴찌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팀은 이날 경기에서 0-1로 패하며 7연패의 수렁에 빠졌고 황태현은 후반 13분 근육 경련을 일으키며 결국 교체됐다. 그의 역사적이었던 데뷔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앞으로 황태현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갈지는 이흥실 감독의 판단에 달렸다.

그는 또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이흥실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황태현의 활약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어린 나이에 좋은 경험을 했다. 안산이 황태현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황태현이 90분 경기를 다 소화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긴장도 하고 경험도 부족하다보니 90분 경기를 조절해 소화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90분 경기를 다 채웠으면 높은 점수를 줬겠지만 오늘은 75점 정도 주고 싶다. 나머지 25점은 프로 무대에서 계속 채워나갔으면 한다.” 황태현은 과연 이 나머지 25점을 채울 기회를 또 얻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관심이 덜한 K리그2 경기였을지 몰라도 황태현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데뷔전이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선수가 K리그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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