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에서 가장 바쁜 사람, ‘왕년의 국가대표’ 전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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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경 동산정산고 트레이너와 대화를 나눴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전민경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W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골키퍼였다. 그는 2004년 19세의 나이로 A매치에 데뷔해 12년 동안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김정미와 함께 늘 대표팀 골문을 놓고 경쟁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1985년생 전민경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잘 나갔던 왕년의 국가대표는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런데 제17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 열린 경남 합천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전민경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경남 합천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전민경의 공식적인 신분은 동산정산고 트레이너다. 아직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 정식 코치로 임명되지는 못했다. 동산정산고 경기가 열리기 바로 전 골키퍼들의 훈련을 담당했던 전민경은 경기가 시작되자 벤치 한 켠에 앉아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하지만 전민경 트레이너는 동산정산고 골키퍼만 지도하는 게 아니다. 이날은 동산정산고의 경기를 앞두고 진주여중 선수단을 찾아 골키퍼를 지도했고 대덕대 골키퍼들도 가르쳤다. 서울에 있을 때면 오주중학교에 가 골키퍼들에게 레슨을 하기도 한다. 전민경은 소속된 학교 외에도 여기저기를 돌며 아이들을 가르친다. 학교마다 전민경 트레이너에게 연락해 “우리 아이들 경기 전에 몸 푸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어디든 달려간다.

왜일까. 전민경 트레이너는 왜 이리 바쁘게 합천 여기저기를 오갈까. 이유를 묻자 전민경 트레이너가 말했다. “내가 배웠던 걸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여자축구는 골키퍼 코치를 따로 두고 있는 학교가 없다. 대표팀에 가는 애들만 대표팀에서 따로 조금 배워오는 정도다. 그래서 은퇴하면 꼭 골키퍼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뭔가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골키퍼 코치가 필요한 학교라면 어디든 간다. 돈을 따로 받는 것도 아니다. 재능기부의 시간이랄까. 내가 먼저 ‘도와드리겠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필요한 곳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달려가 도와드릴 의향이 있다.” 전민경 트레이너는 진심을 다해 아이들에게 지금껏 배운 걸 물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국가대표로 12년 동안 생활했던 전민경 트레이너는 이제 지도자로서의 고충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선수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이제 와서 보인다. “지금껏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특히나 경기를 앞두고 코치님들이 나한테 공을 차주다가 한 번씩 실수가 나오면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경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그런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나는 선생님들의 그런 작은 실수에도 민감했고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훈련하면서 공 한 번 차주는 것도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선수 시절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께 죄송하고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어렵다는 느낌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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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경은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스포츠니어스

전민경 트레이너는 아직 지도자 자격증이 없다. 스스로에게도 이 시간은 지도자와 새로운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시간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내 미래에 대해 잘 모르겠다. 오랜 친구인 동산정산고 안태화 감독이 도와달라고 해 와 여기에 있긴 한데 내가 아이들을 과연 잘 가르칠 수 있는지, 아이들이 나로 인해 실력이 늘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욕심 때문에, 내가 축구를 해왔으니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실력이 있는 지도자인지 내 스스로 판단을 해봐야 하는 시점이다. 지금이 딱 그런 고민에 놓여 있는 시기다.” 전민경 트레이너는 솔직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도자 자격증보다는 일단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판단이 서면 그때 진로를 확실히 정해도 늦지는 않는다.

전민경 트레이너는 지난 시즌 은퇴를 선언한 뒤 올 4월 동산정산고에 합류했다.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안태화 감독과는 대학교 동기다. 친구는 아니고 동기다. 동기와 친구는 다른데 친구는 아니고 동기다. 내가 선수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 동안 나를 기다려줬다. 오랜 시간 고생했다고 쉬는 시간을 배려해준 고마운 친구, 아니 동기다. 은퇴를 한 뒤에는 여행도 좀 다니고 친구들도 좀 만났다. 축구하느라 하지 못한 것들을 했다. 아직은 은퇴가 실감나지 않고 그냥 아이들을 가르쳐주는 선배 같은 느낌이다. 지도자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아직은 선수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역 시절 열심히 했으니 후회는 없다. 내가 받은 게 많으니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선배가 되고 싶다.”

이 팀과 저 팀을 오가며 합천에서 가장 바쁜 전민경 트레이너는 그러면서 안태화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산정산고만 챙겨도 모자란데 다른 팀에 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배려해줘 고맙다.” 전민경의 별명은 선수 시절부터 ‘감자’였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감자야 도와줘’라고 하면 내가 도울 수 있을 한계 내에서는 골키퍼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다.” 전민경 트레이너는 이렇게 조금씩 더 성숙한 지도자가 돼 가고 있었다. 한국 여자축구는 아직도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다. 전민경 트레이너의 말처럼 골키퍼 코치를 갖춘 학교도 없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풍부한 경험과 실력을 갖춘 전민경 트레이너에게 한국 여자축구가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을까, “감자야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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