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도 처음이 있고 성장한다, 우리가 잘 모를 뿐

심판 여자축구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는 선수도 성장하는 대회지만 심판들도 성장하는 대회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합천=김현회 기자] 어제(25일) 경남 합천 광장 1구장에서 벌어진 제17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대전대양초등학교와 경북상대초등학교의 경기. 경기장 한 켠에서 키 큰 한 중년 여성이 어린 친구들에게 스텝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렇지. 사이드 스텝.” “아니. 그럴 땐 앞을 보고 뛰어야지.” 하프타임을 이용해 신입 심판들에게 짧은 레슨을 마친 이 여성은 후반전이 시작되자 곧바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 명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심판평가관 권남순’ 이번 대회에서 심판을 심판하는 중책을 맡은 이다.

배구선수가 WK리그 심판이 된 이유는?
권남순 평가관은 배구선수 출신이다. 1987년부터 3년간 한국도로공사 배구단에서 선수로 뛰었다. “국가대표도 못 하고 그렇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고 웃는다. 그는 실업배구를 3년간 경험했지만 이후 무릎 부상으로 은퇴한 뒤 도로공사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며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축구에 빠지게 됐다. 생활 체육으로 축구를 즐기면서 재미를 느낀 그녀는 특히나 심판의 매력에 강하게 끌렸다.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심판 자격증을 따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준비했다. 그렇게 2005년 축구 심판 3급 자격증을 따냈다.

그녀는 10년 동안 심판을 했다. 차근차근 급수를 올리며 큰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3급 심판으로 2년간 활동한 뒤 2급 심판 자격을 얻었고 2010년에 1급 심판으로 승급했다. 1급 심판이라고 누구나 WK리그 심판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1급 심판 중에 평가가 좋은 심판만이 WK리그에 갈 수 있다. 권남순 심판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WK리그에 서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어느덧 40대 중반을 넘어섰고 결국 체력 테스트의 벽을 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2015년 이후 결국 심판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체력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끝이다. 잘 봐달라고 로비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에도 축구를 놓지 않았다. 1급 심판 자격증을 따고 5년차 이상이 지나야 응시할 수 있는 심판평가관에 도전해 합격한 것이다. 비록 체력이 다해 심판으로 그라운드에 더 이상 서지는 못하게 됐지만 심판을 심판하는 아주 독특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권남순 평가관은 이번 대회에서도 자신을 롤모델로 삼는 신예 심판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특히나 어린 심판들을 보며 자신의 첫 심판 도전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 여자 초등부 경기에 나선 심판은 4급 심판과 3급 심판이었다. 이제 심판을 시작한지 짧게는 2년, 길어야 3년이 된 심판들이 주관하는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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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순 심판평가관은 심판을 평가하는 심판이다. ⓒ스포츠니어스

이제 막 시작한 신예 심판들을 바라보다
심판평가관이라고는 하지만 평가보다는 노하우 전수에 더 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나 초등부부터 WK리그에 참가하는 일반부까지 다 모인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는 심판도 4급심판부터 국제심판까지 총집결하는 축제다. 3,4급 심판은 국제심판을 보며 배울 수 있는 무대다. 국제심판은 이 대회에서 주로 일반부 경기에 배치된다. 1급 심판과 2급 심판은 대학과 일반부를 주로 맡고 3급 심판과 4급 심판이 저학년 대회를 담당한다. 한창 초등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권남순 심판평가관과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초등학생들은 이제 축구를 배워하는 입장이다. 사실 얘네들은 축구 규칙도 잘 모른다”면서 “이럴 때 심판은 아이들이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축구화 끈이 풀리면 묶어주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큰 몇몇 선수들이 전방을 훅훅 휘젓고 다녔고 그 친구들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작은 소녀들도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뛰어다녔다. 권남순 평가관은 “거의 뛰어 노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웃으면서 “아직 선수들도 완성되지 않은 단계인데 심판들도 경험이 부족할 때라 서로 성장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 경기는 상대초등학교의 일방적인 경기로 진행됐다. 치열함은 다소 덜한 경기였다. 그녀는 “오늘은 실력차가 많이 나는 경기”라면서“ 이런 경기는 그다지 판정 논란이 없다. 하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판정에 다들 예민해진다. 그러면 심판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도 심판 경력이 짧을 때 자주 겪었던 기억”이라고 웃었다. 전반전이 끝난 뒤 대기 중인 어린 심판들에게 스탭 교육부터 시키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그녀의 10여년 전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경기에 투입된 심판 외에도 많은 3,4급 심판이 이 경기를 지켜보며 공부하고 있었다. 권남순 평가관은 “나도 이런 무대에서 처음 심판을 시작했다. 그런데 설명을 해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에 투입돼 경험을 쌓아야 실력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대한축구협회와 생활체육이 통합되면서 5급 심판도 생겨났다. 이들은 체력 테스트 기준이 다소 헐겁다. 5급 심판은 생활체육계에서 활동할 수 있고 엘리트 축구는 4급 심판부터 투입된다. 심판이 활동할 수 있는 분야는 조금씩 더 늘어나고 있다. 여자부 대회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 심판의 수요도 늘어났다. 남자와 여자의 체력 측정 기준이 다르게 때문에 여성 심판의 경쟁력도 충분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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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순 심판평가관은 심판들을 위한 걱정이 많았다. ⓒ스포츠니어스

그녀가 바라보는 열악한 심판의 세계
하지만 걱정도 있다. 권남순 평가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심판은 직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1급 심판이 되도 경기 수당만으로 생활해야 한다”면서 “3급 자격증을 따고 2년을 활동한 뒤 2급을 따고 2년 후 다시 1급을 달고 2년차 이상 심판으로 일해야 WK리그에도 간다. 그 경쟁에서 계속 이겨내며 국제심판 시험도 봐야한다. 그런데 나이 제한도 있고 선의의 경쟁도 있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니 직업이 될 수는 없다. 1급 심판들은 체대 출신들이 많아서 대부분 체육회에 근무한다던지 개인적으로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한다던지 아니면 백화점 매장에서 근무를 하기도 한다. 나도 주부이면서 심판으로 활동하는 동안 수원 영통에 커피숍을 열었다”고 덧붙였다.

권남순 평가관은 “심판계가 너무 열악하다”면서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건 가장 큰 문제다. 4급부터 1급까지 다 수당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래도 자부심만을 가지고 하는 일이다. 엘리트 체육에 기여한다는 마음이 아니면 심판으로 살아가기가 어렵다. 돈을 못 벌어도 늘 몸 관리를 해놓아야 한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땡볕에서 여자가 얼굴을 이런 햇빛에 노출시키고 일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열정 없이는 못하는 일이다. 심판 없으면 축구가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하는 일이다. 이에 맞게 우리 어린 심판들의 여건 개선도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권남순 평가관은 경기가 끝나자 마치 10년 전의 자신과도 같은 어린 심판들에게 이번 경기에서의 미흡했던 점을 전달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렇게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 또 다른 어린 심판들은 열악한 환경을 딛고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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