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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합천=홍인택 기자] 대구FC의 류재문은 퇴장당한 조현우 대신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단국대 김지현은 킥 오프 휘슬이 불리기 전부터 골키퍼 유니폼에 자신의 등 번호를 덧붙이고 골문을 지켰다. 무슨 사정이 있던 것일까?

제17회 전국 여자축구 선수권대회가 펼쳐지는 24일 경남 합천공설운동장에서 단국대와 울산과학대의 경기가 열렸다. 울산과학대는 얼마 전 창녕에서 열린 여왕기 대회 우승팀 대덕대를 2-1로 꺾은 강팀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단국대는 강호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팀이라고 평가됐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울산과학대는 단국대를 4-0으로 꺾고 2연승을 달리며 조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는 변할 수 있지만 조별예선 통과가 유력해졌다. 반면 단국대는 위덕대와 울산과학대에 연달아 0-4로 패배하면서 무득점 8실점을 기록하며 2연패에 빠졌고 사실상 조별예선 단계에서 탈락에 가까워졌다.

단국대 선수들은 최종 4선과 3선의 간격을 좁게 유지하며 긴 패스를 통해 역습을 노렸다. 득점은 실패했지만 득점에 가까운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조금은 안타까웠다. '골키퍼만 잘 세울 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슈팅이 모두 실점으로 이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양 팀 선수들이 전반전을 마치고 벤치로 들어오는 순간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의 등 번호가 특이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유니폼 수급이 어려운 팀들의 경우 기존 유니폼에 새겨진 등번호를 수정하는 일들은 있어왔다. 그러나 이 선수는 유니폼 상의뿐만 아니라 하의에도 흰색 바탕에 24번이라는 번호가 덧붙여져 있었다. 대회 안내 책자를 살펴보니 단국대 24번의 포지션은 'FW'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내 책자에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골키퍼 박설아는 왼팔에 깁스를 한 채 사복을 입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골키퍼 이가현은 박설아의 운동복을 입은 채 단국대 벤치에서 선수들을 챙겼다. 모든 퍼즐이 풀렸다. 단국대는 골키퍼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필드 플레이어였던 김지현이 자신의 등 번호를 팀 동료인 골키퍼 이가현의 유니폼 위에 덧붙이며 경기에 출전했다.

김지현은 골키퍼 이가현의 유니폼을 빌려 출전했다 ⓒ 스포츠니어스

단국대 오원재 감독은 0-4 대패를 당했지만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선수들을 격려하며 다독였고 풀타임을 뛰었던 선수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오 감독은 "올해까지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내년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골키퍼에 대해 묻자 오원재 감독은 "우리 팀 골키퍼가 두 명이 있는데 대회에 참가하기 전부터 두 명 모두 부상당했다. 어쩔 수 없이 필드 플레이어를 골문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라면서 "선수들은 잘 뛰어줬다. 골키퍼 부상이 아쉽긴 하다. 오늘 경기만 해도 골키퍼만 있었으면 쉽게 막을 수 있었던 골이었다"라며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오 감독은 "그래도 김지현이 선방했다. 김지현도 몸이 성치 않다. 열심히 해줬다. 아쉽지만 고맙게 생각한다. 기대 이상으로 활약을 해줬다"라면서 익숙지 않은 포지션에서 활약해준 김지현을 칭찬했다.

실제로 김지현은 쉬운 골을 먹히긴 했지만 꽤 여러 개의 유효슈팅을 막아내며 선방했다. 대구의 류재문이 보여줬던 선방까지는 아니지만 선방 수만 따지면 김지현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김지현은 "원래 포지션은 윙 포워드"라면서 "대회에서 골키퍼를 본 건 처음이다. 연습 경기 때는 한두 번 봤었다"라고 말했다.

김지현은 "팀에 피해는 주지 말자는 식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막으려고 했다"라면서 "울산과학대가 슈팅이 그렇게 만만한 팀은 아니다. 골키퍼가 내 포지션이 아니라서 많이 무섭고 그랬다"라면서 어려웠던 골키퍼 체험기를 전했다.

김지현은 "골키퍼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밑에서 보니까 전체적으로 경기가 어떤지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팀 동료들도 격려를 많이 해줬다. 내가 골을 먹혀도 원래 필드 포지션이니까 격려해주고 괜찮다고 말해줘서 자신감 있게 할 수 있었던 거 같다"라고 말했다. 김지현의 활약을 지켜봤던 팀 골키퍼 박설아도 "그래도 뛰어준 게 어딘가. 나름대로 잘 해줬다"라면서 친구의 활약에 고마움을 전했다.

김지현은 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팀을 위해 골키퍼 장갑을 꼈고 골문을 지키려 노력했다.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 자리였고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계속 억누르며 그 자리에 있었다. 단국대는 2연패를 당하면서 다음 대덕대와의 경기가 사실상 이번 대회 마지막 경기가 되는 분위기다. 김지현은 "그때도 골키퍼로 들어갈지는 모르겠다"라면서도 "들어가면 이번 경기처럼 최선을 다해서 피해 주지 말고 열심히 하려고 생각 중"이라면서 어려운 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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