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현대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K리그 여름 이적시장이 열렸다.

많은 선수들이 새 둥지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새로운 팀에 이적한 선수는 새로운 등번호를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번호를 갖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K리그의 여름 이적시장은 한창 시즌 중일 때 열린다. 각 팀의 주요 선수들은 이 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 차지한 등번호를 여름에 들어온 새로운 선수가 차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름에 팀을 옮긴 선수들의 대부분은 속칭 '무거운' 등번호를 달고 있다. 일단 남는 번호를 달고 다음 시즌에 번호를 바꾸는 식이다. 그런데 최근 이적시장을 보다가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유난히 등번호 79번이 부쩍 늘어난 것이었다. 명단을 뽑아보니 이재안(수원FC), 이으뜸(광주FC), 이창용(울산현대)이다. 확실한 단서가 하나 등장했다. 아산무궁화의 전역자들이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의문도 들었다. 아산의 전역 동기는 총 5명이다. 박형순(수원FC)와 한의권(수원삼성) 또한 '79번들'과 동기다. 그런데 그들의 등번호는 다르다. <스포츠니어스>가 뒷 이야기를 알아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약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창용 방에서 시작된 말년들의 작당 모의

당시 아산의 '말년 수경'들은 훈련이 끝난 후 자유시간에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이창용의 방이었다. 아산의 최고참들은 이창용의 방에서 온갖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후임들 걱정을 했고 때로는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약 21개월의 군 생활을 함께 해온 그들은 돈독한 전우애로 맺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헤어짐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함께 생활한 다섯 명은 전역을 하게 되면 각자의 소속팀으로 흩어져야 한다. 전역은 기쁘지만 전우와 헤어진다는 것은 아쉽다. 그래서 그날 '말년 사랑방'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군 생활을 기념할 수 있을까?'였다. 사실 예비역이 바라본다면 참 쓸 데 없는 주제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꽤 진지하게 토론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아이디어를 꺼냈다. "어차피 원 소속팀 돌아가면 각자 원하는 등번호도 받지 못하는데 우리 등번호를 맞춰볼까?"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각자 소속팀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등번호를 달아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정확히 누가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들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반색했다"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다.

등번호는 쉽게 결정됐다. 말년 다섯 명은 의경 1079기다. 그래서 79번을 자신들의 등에 새기기로 결정했다. 마치 전역하는 육군 병장이 전역모에 온갖 추억을 새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들은 한 가지 더 약속했다. "우리가 원 소속팀으로 돌아가서 서로 맞붙게 된다면 열심히 뛰고 서로 유니폼을 교환하자."

박형순과 이재안, 둘 중 하나는 빠져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박형순과 이재안이 문제였다. 이 둘은 원 소속팀이 같다. 전역하면 수원FC로 돌아간다. 축구에서 두 사람이 똑같은 등번호를 달고 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 중 하나는 다른 번호를 달아야 했다. 그렇다고 한 사람만 동기들의 추억에서 제외할 수도 없었다. 원래 전우애라는 것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아야 제대로 발휘되는 법이다.

다시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한 사람은 71번을 달기로 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71번일까? 알고보면 굉장히 단순했다. '1079기'라는 단어에서 '기'를 형상화한 것이 71번이었다. "79번과 71번이 같이 나란히 서면 '79기'가 되잖아요"라며 이재안은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하나였다. 71번을 누가 달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동반입대 같은 느낌이랄까 ⓒ 수원FC 제공

그 때 박형순이 과감히 손을 들었다. "내가 골키퍼고 나머지는 다 필드 플레이어잖아. 내가 71번을 달테니까 네 명이서 79번으로 맞추는 게 어때?" 그러자 동기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러자." "우리 (이)재안이 형 욕심 많고 잘 삐쳐서 71번 달라고 하면 서운해할 거야." 박형순에 대한 미안함을 이재안을 향한 농담으로 전하는 동기들이었다.

이재안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가 그럼 79번을 할게."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이 장난 삼아 저에 대한 농담을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박)형순이에 대한 배려도 있었고 워낙 투덜대면서도 저를 잘 따라준 동생들이라 그 정도 농담은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죠." 그렇게 다섯 명의 말년은 등번호로 군 생활을 추억하자고 다짐했다.

어쩔 수 없었던 막내 한의권의 배신 아닌 배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다섯 명의 동기들은 함께 마지막 추억을 만들었다. "함께 휴가를 맞춰서 가평에 여행도 갔고 (이)재안이 형 웨딩 촬영 때 동기들이 참여해서 같이 찍었어요." 이창용은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더 빨리 가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전역증을 받았다. 그것은 곧 다섯 명의 이별을 의미했다.

그래도 지금은 첨단 사회다. 몸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어도 스마트폰으로 다 연락할 수 있었다. 다섯 명의 동기들은 전역 이후에도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었다. 각자 원 소속팀 생활이나 '민간인'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물론 당시 이적시장 최대어였던 한의권의 거취도 주요 화제였다. "우리가 농담 삼아서 '돈 많이 벌면 다 형이니까 이제부터는 막내 (한)의권이가 형이다'란 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막내가 배신을 했다. 어느 날 단톡방에 "형들 죄송하다"는 한의권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알고보니 그가 79번을 달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미 다른 동기들은 71번 또는 79번으로 등번호를 확정한 상황이었다. 다들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의권의 이야기를 듣고 동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쩔 수가 없네."

동반입대 같은 느낌이랄까 ⓒ 수원FC 제공

수원으로 이적한 한의권은 구단에 79번을 달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수원 서정원 감독이었다. 그는 한의권에게 제안했다. "79번 말고 14번을 다는 것은 어때?" 14번은 서정원 감독이 선수 시절 수원에서 달았던 번호다. 자신에게 애착이 큰 번호를 한의권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서 감독이 한의권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의권은 서 감독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14번을 달았다. 동기들은 어쩔 수 없다면서도 진한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때 이재안이 맏형답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럼 너는 나중에 우리 만날 때 사비로 유니폼에 '79번 한의권' 마킹해서 가져와." 막내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이재안의 농담 섞인 말이었다. 그리고 한의권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예비역이 유쾌하게 군 생활을 추억하는 방법, 등번호

물론 K리그에 갑자기 등장한 79번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전망이다. 내년 시즌이 되면 선수들의 등번호는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번호는 앞 쪽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70번대 등번호를 받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들 또한 반 시즌 동안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이런 일을 계획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한다. '예비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또다른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생각보다 막중하다. 이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아산과 상주상무라는 군경팀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군대를 '고마운 곳'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그들이 보답하는 방법은 지금 자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 동기들의 우정도 영원하길 바란다. 제대하면 늘 연락하고 자주볼 것만 같지만 막상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군대 동기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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