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어린 선수들이 실력만 있으면 곧바로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매탄고등학교 3학년생인 박지민은 지난 4월 29일을 잊을 수 없다. 2000년생인 그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골키퍼다. 그런 그가 K리그에서도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전북현대-수원삼성전을 ‘선수’로 준비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원정 팀 선수라면 기가 죽는다는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의 경기였다. 이날 박지민은 백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팀에는 신화용과 조원희, 염기훈, 데얀이 있었고 상대팀에는 김신욱과 이동국이 있었다. 박지민은 1979년생 이동국과 무려 21살 차이였다. 이동국이 1998년 프로 무대에 데뷔했으니 박지민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K리거였던 이와 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준비하는 엄청난 일을 경험했다.

비록 이날 박지민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K리그 빅매치에서 2만 관중의 함성을 받으며 경기를 준비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었다. 매탄고등학교 소속으로 초중고리그에 참가하는 박지민에게 K리그 분위기는 엄청난 기억으로 남게 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무대는 몇몇 팬이나 학부형들이 오시는 게 전부죠. 그런데 전북전은 아예 차원이 다른 분위기였어요. 제가 그 가운데에서 몸을 풀고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 경기를 준비하는 하루 하루를 함께 경험하고 전주로 내려가 호텔에 묵고 라커 분위기를 느낀 것 자체로도 엄청난 경험이었죠.” 그런데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이 어린 선수는 어떻게 한국 축구 최고의 무대에 초대 받을 수 있었을까.

수원삼성 박지민은 '준프로계약' 1호가 됐다. ⓒ수원삼성

대선배들과 함께 하게 된 고등학생 선수

이 믿기지 않는 일이 가능해진 건 프로축구연맹이 도입한 새로운 규정 때문이다. 연맹은 지난 1월 고심 끝에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준프로계약’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프로로 계약하기 전 기간을 틈 타 선수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일이 생기자 이 허점을 보완하고 유소년 선수 육성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기로 했다. 구단 유스 소속 고교 2, 3학년 선수들부터 '준프로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소년 팀에서 키워낸 선수가 졸업 후 돌연 유럽행을 추진하면 손 쓸 수 없이 당해야만 했던 프로 구단에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제도였다. 어린 선수들에게도 미래를 보장 받으며 일찍 더 큰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치였다. 선수와 구단 모두에 ‘윈윈’인 제도다.

‘준프로계약’ 제도가 도입된 뒤 박지민은 그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수원삼성 유소년 팀인 매탄고에 속한 그는 수원과 ‘준프로계약’을 맺고 이제 K리그에 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89㎝, 86kg의 좋은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한 박지민은 R리그(2군리그)와 대학팀 연습 경기에 출장해 기량을 검증 받았고 연맹 이사회에서 연령 하한이 이뤄지자 수원삼성과 ‘준프로계약’을 맺었다. 그는 곧바로 수원삼성 성인팀과 훈련에 돌입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박지민보다 17살이나 많은 대선배 염기훈은 이렇게 말했다. “형이라고 할래? 삼촌이라고 할래?” 박지민이 머뭇거리자 염기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형이라고 해. ‘기훈이 형’ 해봐.” 그렇게 박지민은 하늘 같은 선배들과 형, 동생이 됐다. 그에게는 이렇게 기훈이 형과 데얀 형, 원희 형, 상민이 형, 화용이 형이 생겼다.

‘준프로계약’이 아니면 박지민은 이들과 함께 훈련하고 호형호제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늘 같은 골키퍼 신화용과 함께 골 막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다. 박지민은 매탄고와 수원삼성을 오간다. 수원삼성 성인팀과 매탄고가 같은 클럽하우스를 써 큰 혼란이 있는 건 아니다. 같은 곳에서 생활하다보니 따로 방을 빼지 않고 매탄고 동료들과 한 방을 쓰고 있다. 하지만 훈련 여건은 다르다. 매탄고가 클럽하우스에서도 훈련을 진행하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훈련을 하는 경우도 있어 그는 양 쪽 훈련 일정을 잘 조율해야 한다. 고등학교 리그 경기를 앞두고는 이틀 전부터 매탄고 동료들과 함께 훈련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이제 형들과 훈련하는 일이 잦아졌다.

‘준프로계약’ 어떻게 이뤄지나?

지난 달 프랑스에서 열린 툴롱컵이 끝난 뒤에는 줄곧 형들과 함께하고 있다. 박지민은 소중한 경험을 매일 새기고 있다. “고등학교 선수들하고만 같이 훈련을 하다가 기훈이 형, 데얀 형의 슈팅을 경험해 보면 차원이 달라요. 하루 하루 배우는 게 많습니다.” 제도 도입을 앞두고는 우려도 많았다. 고등학생이 프로 무대에 데뷔하는 게 '공부하는 선수'를 강조하는 교육부 정책에도 맞지 않았고 미성년자 근로기준법 강화로 고등학생이 프로 무대에 서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많았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미성년자도 부모의 동의만 있으면 충분히 ‘준프로계약’이 가능했다. 수원삼성도 최대한 박지민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있다. 박지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프로 형들 훈련이 오전 일찍 이뤄지는 경우는 없어요. 학교에서 4교시까지 수업을 다 받고 오후 훈련에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준프로계약’ 1호로서 학업과 선수 생활을 큰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다. 박지민은 기본급 연 1200만 원을 받는다. 아마추어 신분에서 준프로로 바뀌면서 그에 따른 급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본급은 훗날 선수가 이적할 경우 이적료 발생의 근거가 되는 연봉 수준이다. 비슷한 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장학금 명목의 월급이 주어진다. ‘준프로계약’을 맺고 기본급을 받으면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상 다른 팀에서 영입 제안을 할 때 이적료를 제시해야 한다. 어린 선수를 키워 놓고도 이 선수가 해외 진출을 타진하면 막을 도리가 없던 K리그 구단의 안전 장치가 생긴 셈이다. K리그가 주로 주말에 열리기 때문에 수업 결손에도 큰 문제는 없다. 연맹 측은 “연맹이 제공한 표준계약서 상에 구단의 의무로 선수의 수업 결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어린 선수들의 프로 진출이 막혀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학원 축구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근로 기준법이나 학습권 보장 등은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어린 선수들이 학원 축구를 벗어나 프로 무대로 떠나 버리면 그만큼 학원 축구가 위축된다는 게 학원 축구 지도자들의 주장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연맹은 지난 1월 다각도의 의견을 정리한 끝에 ‘준프로계약’ 제도를 도입했다. ‘준프로계약’을 맺은 선수는 연맹이 주관하는 K리그 공식경기와 프로 산하 18세 이하 경기에 한해 출전할 수 있다. 협회 등록 규정도 바꿔 FA컵에도 나갈 수 있다. 기타 학원대회 출전도 가능하지만 K리그 공식 경기 1회 이상을 출전한 뒤엔 협회 규정 또는 지침에 따라 일반 학교 팀과 경기엔 출전할 수 없다. 아직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까지는 출장이 불가하다.

수원삼성 박지민은 '준프로계약' 1호가 됐다. ⓒ수원삼성

선수와 구단 모두에 ‘윈윈’인 제도

박지민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속된 말로 ‘클래스가 다른’ 형들의 슈팅을 막아내면서 고속 성장 중이다. “슈팅 템포가 지금껏 경험했던 고등학교 무대와는 달라요. 확실히 초반에는 형들의 스피드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는데 몇 주 정도 같이 해보니 조금씩 적응되고 있어요. 프로 형들과 함께 밥을 먹고 같이 훈련하고 휴식도 배우는 중입니다. 형들과 훈련을 하다가 고등학교 리그에 출전하면 템포가 엄청 느리게 느껴져요. 그래서 고등학교 경기는 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동료들의 자세까지도 바꿔 놓았다. “‘준프로계약’ 자체로도 저에게는 큰 경험이죠. 다른 친구들도 제 ‘준프로계약’을 보고는 다들 자극을 받았어요. 자기들도 더 열심히 하고 잘해서 빨리 프로 계약을 맺고 싶다고 해요.” 박지민은 올해 12월 31일까지 ‘준프로계약’이 돼 있고 상호 합의하면 내년 1월 1일부로 프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서정원 감독도 계속 매탄고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박지민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매탄고와 항상 소통하고 있어요. 매탄고 쪽에도 ‘추천할 만한 선수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하고 추천을 받은 선수가 있으면 시간이 날 때 성인팀에서 함께 훈련도 시켜요. 그러다가 R리그에도 내보냅니다. 대학에 진학할 선수들은 빨리 결정을 내려주고 매탄고에서 바로 성인팀으로 올라올 수 있는 선수들은 훈련과 R리그를 반복해야죠. 괜찮다는 판단이 들면 성인 팀으로 올립니다. 지민이가 괜찮은 골키퍼라고 판단해 연맹에 선수 등록을 하고 훈련도 같이 하는 단계죠. 지민이는 계속 유심히 점검 중입니다.”

이제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선수가 K리그 무대에서 골을 넣고 페널티킥을 막아내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됐다. ‘준프로계약’은 한국 축구가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아직은 프로 무대에서 ‘준프로계약’을 맺은 건 박지민이 유일하다. 올 1월부터 시작된 제도라 아직은 완벽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프로팀에서 해당 포지션 선수들이 연이은 부상을 당해 상황이 급박해지거나 시즌 막판 여유 있는 상황이 생기면 유망주를 데려다 쓸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어린 선수들에게는 기회의 장이 열렸고 정식 프로 계약을 맺지 않아 외국 팀이 훈련 보상금만 주고 유망주를 빼가던 시스템 자체도 막을 수 있게 됐다. 연간 유소년 육성에 수십억 원을 투자하는 K리그 구단 입장에서는 이제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사례를 막을 수 있다.

수원삼성 박지민은 '준프로계약' 1호가 됐다. ⓒ수원삼성

‘고등학생 K리거’, 새 시대 열 수 있다

과거 K리그에도 어린 선수들이 뛰던 시기가 있었다. 1986년생인 한동원은 2002년 5월 16세 25일의 나이로 K리그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 울산현대 골키퍼 김승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08년 11월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청용과 고명진, 고요한 등은 학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프로 무대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생 선수가 K리그에 데뷔한 적은 없다. K리그는 지난 2006년 드래프트를 재도입하면서 프로 계약 조건으로 고교 졸업 예정자나 만 18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제한 조건을 신설했다. 그러면서 고교생 프로 선수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세계 축구의 흐름과 역행하는 일이었다. ‘일본 메시’로 불리는 쿠보 다케후사(FC도쿄)는 지난해 16세(5개월22일)의 나이에 J리그에 데뷔했고 모리모토 다카유키(도쿄 베르디)는 15세(10개월6일) 때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아스널 공격수 테오 월콧은 16세(143일)에 잉글랜드 챔피언십에 데뷔했고 아스널 미드필더 아론 람지도 16세 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밟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펄펄 날고 있는 킬리안 음바페 역시 프랑스 AS모나코 시절 16세(347일) 때부터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k리그는 2006년 이후 고등학생이 프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더군다나 한국의 사정을 놓고 보면 어린 나이에 프로 무대에 입성하는 시스템을 아예 차단했던 게 상당한 타격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출했다가 20대 중반이 돼 프로 무대에 입성하면 몇 년 뛰지도 못하고 병역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K리그에서 뭔가 보여주고 이제 막 유럽 무대를 노리려고 할 때는 병역 문제가 딱 눈앞에 가로막혀 있었다. 약 12년간 막혀왔던 고등학생 선수들의 K리그 데뷔 활로가 다시 뚫린 건 대단히 반가운 결정이다.

‘준프로계약’ 제도 도입은 새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 축구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어린 선수와 구단 모두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직은 ‘준프로계약’을 맺은 선수가 박지민 혼자 뿐이지만 K리그가 고등학생들에게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곧 고등학생 선수가 K리그에서 이슈몰이를 하고 2~3년 활약한 뒤 20대 초반의 나이에 능력을 인정 받아 유럽으로 날아갈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열리게 됐다. 18세의 어린 선수가 ‘기훈이 형’과 ‘데얀 형’의 슈팅을 막아보고 2만 관중이 들어찬 ‘전주성’에서 일방적인 상대팀의 응원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선수들이 늘어나면 K리그와 한국 축구는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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