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잘싸’ 일본, 그물망 수비와 20m의 미학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8강 진출은 좌절됐다. ⓒ FIFA World Cup 공식 페이스북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3-2라는 경기 스코어부터 추가 시간 터져 나온 극적인 역전골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 일본까지. 현재까지 러시아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였다. 다 잡았던 승리를 허무하게 놓친 일본은 어느 때보다 짙게 아쉬움이 남겠지만 역시 일본은 이렇게 져줘야 제 맛이다. 비록 벨기에의 전술 선택에 문제를 발생하며 고전했지만 일본의 플레이 스타일 변화와 이누이 타카시, 시바사키 가쿠 등 선수들의 개인 능력은 인상적이었다. 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일본의 포부는 마냥 어불성설이 아니었다.

플레이 스타일의 회귀와 변화로 안정감 되찾은 일본
일본은 월드컵 개막을 불과 50여일 앞두고 감독 교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축구협회와 바히드 할리호지치 전 감독의 첨예한 갈등이 계기가 됐지만 사실상 그의 수비지향 축구가 일본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게 경질의 가장 큰 이유였다. 시간이 촉박한 시점에 단행된 감독 교체라 자칫하면 월드컵을 망칠 수도 있었지만 지휘봉을 새로 잡은 니시노 아키라 감독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니시노는 가장 일본다운 스타일인 볼 점유를 재도입하면서 안정감을 높였다.

동시에 적절한 변화도 시도했다. 기존 일본은 높은 볼 점유율과 아기자기한 패스 플레이로 상대 골문까지 도달했었다. 점유율과 선수 개인의 기술에선 축구 강국을 상대로 동등한 모습을 보였지만 공격이 위협적이지 못했다. 문제는 속도에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니시노 감독은 좌우 측면 풀백의 과감한 전진을 주문했다.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동시에 측면 공격 속도가 살아난 일본은 벨기에를 상대로 측면을 지배하면서 경기를 주도해나갔다.

나가토모의 전진은 일본 측면에 속도감을 제공했다. ⓒ 일본 축구협회

사실 일본의 좌우 풀백 나가토모 유토와 사카이 히로키가 스피드에 경쟁력이 있는 선수들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 페널티 박스 가까이에서 공을 잡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위협적인 모습이 생겨났다. 지공 상황에서 나가토모가 이누이와 다양한 연계, 속도 변화를 통한 과감한 돌파로 벨기에의 왼쪽 측면을 공략했다면 사카이는 역습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일본은 빠른 공수 전환과 측면 지배를 통해 벨기에를 효과적으로 공략해 나갔다. 이러한 일본의 변화는 지능적인 미드필더 이누이와 시바사키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스카우트 눈도장 쾅 찍은 이누이와 시바사키
이누이와 시바사키는 이번 월드컵에서 유럽 구단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특히 벨기에를 16강 탈락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이누이의 중거리 골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누이는 득점 외에도 본인의 장기인 정교한 드리블과 패스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벨기에 수비진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수비 시에는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토마스 뫼니에의 전진을 적극 방해하며 벨기에의 측면 공격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 이누이 영입을 완료한 레알 베티스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큼 훌륭한 활약이었다.

2년 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했던 시바사키는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 FIFA World Cup 공식 페이스북

중원에서는 시바사키의 맹활약이 이어졌다. 시바사키는 수비 시 훌륭한 판단력으로 사이 공간에 투입되는 패스를 수차례 끊어냈다. 공을 차단한 이후에는 과감한 전진 패스와 빠른 측면 전환 패스로 역습의 기점을 담당했다. 중앙과 측면에서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이누이와 시바사키는 일본의 첫 번째 득점 과정에서 크게 관여했다. 후반 3분 케빈 데 브라이너의 패스를 가로챈 이누이는 시바사키에게 공을 전달했다. 이후 시바사키는 벨기에 수비 뒷 공간으로 침투하는 하라구치 겐키를 향해 날카로운 킬러패스를 전달했고 하라구치가 이를 잘 마무리하면서 일본의 월드컵 토너먼트 첫 득점을 기록했다.

그물망 수비 그리고 20m의 미학
일본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수비 전략을 꺼내들어 벨기에의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핵심은 그물망을 연상시키는 촘촘한 수비였다. 벨기에의 빌드업이 후방에서 시도될 때면 일본은 수비 라인을 끌어 올렸다. 최전방 공격수 오사코 유야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벨기에의 빌드업을 한쪽 측면으로 몰았고 2선 미드필더들은 높은 위치에서 벨기에의 사이 공간 패스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나갔다.

일본은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 수비라인의 폭이 채 20m가 되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 벨기에를 압박했다. 4-1-4-1부터 4-2-3-1, 4-4-2를 자유롭게 오가며 촘촘한 그물망 수비를 펼쳤고 좁은 공간에 갇힌 벨기에의 미드필더들은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차단 이후엔 지체 없이 측면으로 공을 전달하며 날카로운 역습을 시도했다.

일본 수비의 핵심 요시다 마야. ⓒ 일본 축구협회

벨기에의 패스가 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경우 공격수 유야를 제외한 모든 인원은 페널티 박스까지 내려와 질식 수비를 펼쳤다. 이번 월드컵에서 3-4-3 포메이션을 선택한 벨기에로선 미드필더의 숫자가 한 명 줄어들면서 공격 작업에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데 브라이너가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에서와 달리 한 칸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로멜루 루카쿠를 지원할 미드필더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중앙 수비 조합인 요시다 마야와 쇼지 겐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루카쿠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비록 마루앙 펠라이니와 나세르 샤들리의 교체 투입 이후 높이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후반 막판 수비보다 공격을 선택하며 극적인 드라마의 희생양이 됐지만 일본은 인상 깊은 실력을 선보였다. 일본이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우리보다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히 메시지가 전달됐다. 다행인건 일본의 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원정 월드컵 8강 업적엔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벨기에가 붉은악마 원조 맞다.

skadbstjdsla@sports-g.com

이 기사의 단축 URL은 https://www.sports-g.com/p6Nj4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