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하지만 별로 부러운 생각이 안 든다. ⓒ 일본축구협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어제(28일) 밤 치킨과 맥주를 사 놓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폴란드-일본, 세네갈-콜롬비아전이 동시에 열려 16강 진출 팀을 따지는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두 경기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우는 잔인한 승부가 시작됐다. 치킨 다리를 제대로 뜯은 틈도 없이 경기에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 지나 나는 치킨 무를 우걱우걱 씹으며 혼잣말로 욕을 해댔다. 지금까지 월드컵에서 본 경기 중 최악의 경기였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팀들이 나오는 월드컵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실망스러운 경기가 펼쳐졌다.

폴란드-일본전, 안 본 눈 삽니다

폴란드와 공격을 주고받던 일본은 후반 14분 얀 베드나렉에게 오른발 논스톱 슈팅으로 첫 골을 얻어맞았다. 급해진 일본은 이누이 타카시와 하세베 마코토를 투입하면서 추격에 나섰지만 거기까지였다. 세네갈-콜롬비아전에서 콜롬비아 예리 미나가 후반 29분 코너킥 상황서 헤딩 슈팅으로 세네갈의 골망을 흔들며 다시 콜롬비아가 조 1위, 일본이 2위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공세를 늦추며 의지 없이 수비적인 경기를 진행했다. 자기 진영에서 볼을 돌리기 바빴다. 공격을 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미 2패를 당해 16강 진출이 좌절된 폴란드 역시 한 골을 넣은 상태에서 자기 진영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런 상황이 무려 20분 넘게 지속됐다. 일본은 공을 잡고 수비 진영에서 공을 돌리며 시간을 끌었고 폴란드도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경기장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일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시간만 최대한 끌었다. 지고 있는 팀이 너무 노골적으로 경기를 포기하는 이상한 경기가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포장할 수 없는 경기였다. 내 치킨이 싸늘히 식어가는 동안 의미 없는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폴란드 대표팀과 작별하는 야쿱 브와슈치코프스키의 교체 투입도 무산됐다. 브와슈치코프스키는 후반 막판 몸을 푼 뒤 경기장 바깥에서 대기했지만 결국 일본이 계속 공을 돌리며 시간을 지연해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 나설 수 없게 됐다. 아담 나왈카 감독은 폴란드 선수에게 그라운드에 누워 경기를 끊으라고 지시했지만 심판은 계속 경기를 속개한 뒤 결국 종료 휘슬을 불었다. 브와슈치코프스키는 결국 쓸쓸이 벤치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세네갈-콜롬비아전 결과를 확인한 일본은 서로 하이 파이브를 나누고 포옹하며 패배의 기쁨(?)을 즐겼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야유를 많이 받은 프랑스-덴마크전보다 훨씬 더 실망스러운 경기였다. 폴란드-일본전 안 본 눈을 사고 싶다.

일본은 16강 진출이 자랑스러울까. ⓒ 일본축구협회

전혀 존중받을 수 없는 경기

일본은 세네갈과 승점, 골득실, 다득점, 상대전적에서 동률을 이뤘지만 페어플레이 점수(-4)에서 세네갈(-6)에 앞서며 16강에 진출했다. 페어플레이 점수는 해당 팀이 얼마나 깨끗하고 신사적인 경기를 펼쳤는지 측정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선수들이 경고나 퇴장을 받을 때마다 점수가 깎이는 방식이다. 세 경기에서 넉 장의 경고를 받은 일본은 여섯 장의 경고를 받은 세네갈보다 점수가 낮아서 2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페어플레이 점수를 통해 16강 진출이 결정된 최초의 사례가 됐다. 하지만 이 제도의 맹점을 명확히 보여준 역사적인 경기이기도 했다. 공을 돌리며 의도적으로 시간을 지연한 팀이 페어플레이를 했다는 이유로 살아남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페어플레이 점수 제도 자체에 회의적인 느낌이 든다. 주심마다 성향이 다르고 경고나 퇴장을 주는 기준도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경고와 퇴장 개수에 의해 16강이 결정되는 건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동일한 심판이 동일한 기준으로 판정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뭐 승점과 골득실, 다득점, 상대전적 등으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기준을 두고 생존 팀과 탈락 팀을 가리려는 제도를 도입할 수는 있다. 뭐라도 해보는 건 좋다. 하지만 일본이 경기 도중 축구하기를 포기했는데 이 팀이 페어플레이 팀의 혜택을 입는 건 월드컵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일본이 한 건 축구가 아니었다. 날씨 좋은 잔디밭에서 하는 산책이었다.

수비 축구도 존중한다. 무조건 ‘닥치고 공격’하는 팀만이 찬사를 받아서는 안 된다. 지독하게 수비를 하는 축구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경기 막판 상대팀 코너로 가 등을 지고 시간을 지연하는 플레이도 나는 축구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영리한 발재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이 한 건 수비 축구가 아니다. 오로지 16강이라는 눈 앞의 성적을 위해 경기를 포기했다. 이기고 있는 경기도 아니고 비기고 있는 경기도 아니었다. 0-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예 경기를 할 의지를 보이지 않은 건 이런 팀이 16강에 갈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수비를 탄탄히 해 더 이상 골을 먹지 않는 축구를 했다면 존중할 수 있지만 이번 경기는 전혀 존중할 수 없다.

일본은 16강 진출이 자랑스러울까. ⓒ 일본축구협회

페어플레이? 폐허플레이!

역사에는 결과만이 남는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이번 월드컵 16강 진출은 역사가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6강에 오른 팀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세에는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일본의 16강 진출만을 기억할지 몰라도 적어도 이 경기를 눈으로 본 이 시대 사람들은 이 과정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일본은 두고 두고 까여야 한다.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 당시 한국이 2-1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막판 프리킥을 공격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뒤로 돌린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모든 관중이 야유를 퍼부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이 토고를 이겼다는 사실만이 역사에 남지만 나는 이 장면 자체로는 여전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차라리 독일을 80년 만에 조별예선에서 떨어트린 한국이 역사에 남으면 더 남을 것이다.

이번에 일본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더 심했다. 마지막 프리킥을 뒤로 돌린 수준이 아니라 후반 절반을 전혀 경기에 대한 의지 없이 허비했다. 치킨과 맥주를 사 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나는 그래도 다행이다. 몇 년 동안 돈을 모으고 휴가 계획을 짜 러시아로 날아가 저런 경기를 지켜본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경기였다. 이들에게 사과를 해야 될 판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16강에 갔다고 만족하고 있다. 이렇게 16강에 간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저 월드컵에서 한 경기를 더 치를 뿐이다. 폴란드를 상대로 비겁하고 졸렬하게 경기해 패배하고도 가는 16강이라면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하다. 이런 16강 진출은 별로 부럽지 않다. 일본이어서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 한국이 이렇게 16강에 갔더라도 우리는 비판했을 것이다.

일본이 16강에 진출하면 되게 배가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승리가 아니라 정말 이상하게도 별로 배가 아프지 않다. 오히려 독일을 이기고 장렬히 탈락한 우리가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조별예선 마지막 한 경기 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지막 승부가 더 여운이 남는다. 폴란드를 상대로 꽁무니를 빼고 16강에 진출한 일본과 독일을 격파하고도 16강에 못 간 한국 중 선택하라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다. 정말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진심이다. 일본이 16강에 갔으면 계속해서 그들을 인정하자면서 부러워하는 이들이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전혀 분위기가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페어플레이 없이 페어플레이 제도로 16강에 올랐기 때문이다. 페어플레이가 아니라 폐허플레어였다.

일본은 16강 진출이 자랑스러울까. ⓒ 일본축구협회

페어플레이? 부끄러운 타협일 뿐

폴란드에도 한 마디 하고 싶다. 폴란드는 1번 시드를 받은 팀이다. 일본전을 앞두고 2연패를 당해 일찌감치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됐다. 하지만 1번 시드를 받은 팀이라면 그만한 수준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에 1-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공을 뒤로 돌린다고 자기들도 하프라인 아래에 선수들을 다 배치해 놓고 시간 허비하는 걸 도와줘서는 안 됐다. 하지만 폴란드는 일본이 축구를 포기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1번 시드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갔나. 어차피 2패로 탈락이 확정된 팀이 의미도 없는 1-0 승리를 지키겠다고 설렁설렁 뛰는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폴란드는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1번 시드를 받을 자격도 없다.

최악의 경기였다. 폴란드에도 실망했고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페어플레이를 포기한 팀이 페어플레이 제도에 의해 16강에 갔다는 것 자체로도 아이러니하다. 이 제도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떨어졌고 일본은 16강에 갔음에도 별로 배가 아프지는 않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상했던 폴란드-일본전이 이렇게 끝났다. 앞으로는 정말 페어플레이를 한 팀이 혜택을 받았으면 한다. 과연 일본은 페어플레이를 해서 16강에 올랐을까. 나는 결코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본이 한 건 축구가 아니었다. 부끄러운 타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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