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자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창녕=홍인택 기자] 지난 20일 창녕스포츠파크. 두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그 팀들이다.

익숙한 유니폼이었다. 그런데 울산이나 포항이 아닌 창녕에서 그들을 만날 줄은 몰랐다. 물론 성별과 연령대는 다르다. 그러나 한쪽 팀은 세로로 된 남색과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한 팀은 가로로 된 검은색과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K리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동해안 더비'였다.

제26회 여왕기전국여자축구대회 고등부에서 울산현대고 여자축구팀과 경북포항여전고 축구팀이 맞붙었다. 이날의 맨 마지막 경기였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전 세계인들의 축구 축제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두 감독의 지략 대결이 불꽃 튀고 세계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월드 스타들의 대회를 보다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더운 바람이 부는 창녕에서 여고생들의 경기를 줄곧 보고 있자니 솔직히 체력이 따라주질 않았다. 지쳤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기를 보고 눈을 씻었다. 두 팀의 경기 템포를 보자니 짜릿한 감동마저 느꼈다. 보물 같은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이 선수들이 이틀 연속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이라니.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영리했고 빨랐으며 저돌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에서 뛰고 있던 22명 중 U-20 대표팀 선수들이 7명이었다. 울산현대고에는 U-17 대표팀 선수 한 명이 더 있었으며 양 팀 벤치에도 대표팀 선수들 이름이 보였다. 꼭 포항과 울산이라서가 아니라 여자축구 명문 고등학교라는 두 팀의 자존심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올스타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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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으로 끌려가던 울산의 대역전극

관중석에서는 자녀들을 응원하는 학부모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영남지방 특유의 억양으로 자녀들을 응원했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환호와 아쉬움의 탄식이 공존했다. 양옆으로는 포항항도중학교 학생들과 울산현대청운중학교 학생들이 따로 모여 언니들을 응원했다. 언니들이 훌륭한 플레이로 경기를 풀어갈 때마다 "멋있다"라며 눈빛을 반짝였다.

경기 초반부터 불이 붙었다. 전반 5분 만에 포항여전고의 대표 공격수 문진서가 선제골을 뽑아냈다. 이에 질세라 3분 뒤 울산현대고 강지우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어 전반 26분 하프라인 근처에서 얻어낸 프리킥을 포항 임정은이 높게 띄우려다가 울산 골키퍼 임지윤의 볼 처리 실수로 그대로 골로 기록됐다. 초장거리 골이었고 원더골이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포항이 후반전에도 앞서가며 차이를 벌리는 듯했다. 후반 시작 17분 만에 포항 주장 윤현지가 추가골을 기록하며 포항이 3-1로 앞서갔다. 이때만 해도 울산현대고의 패색이 짙어 보였다. 그러나 울산현대고는 그 이후로 수비 라인을 높게 올리면서 짧은 패스로 포항을 몰아넣었다. 경기 템포를 주도하면서 몰아친 결과 후반 27분 조미진이 골을 넣더니 3분 뒤 이은영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3-3으로 팽팽한 경기가 막바지로 흐를 때 즈음, 울산의 동점골을 기록했던 강지우가 왼쪽 지역에서 공을 잡은 뒤 침착하게 먼 쪽 포스트를 바라보고 감아 찼다. 강지우의 슈팅은 골키퍼를 지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그물을 출렁였다.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두고 터진 두 번째 원더골이었다. 울산현대고는 1-3으로 지고 있던 이 경기를 후반에만 세 골을 몰아 넣으며 4-3 대역전극을 펼쳤다.

동해안 더비다운 경기였다. 포항 수비진들이 아쉬웠다기보다 울산의 공격이 워낙 매서웠다. 특히 포항은 170cm의 임정은이 공격수가 아닌 중앙 수비를 보면서 제공권을 차단했고 긴 패스로 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끊임없이 배급했다. 중원에서는 황아현이 현란한 발재간을 보여주면서 공격을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울산도 만만치 않았다. 강지우는 꾸준히 최전방에서 포항을 괴롭혔다. 울산 수비수 송보람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라와 포항의 공격을 미리 차단했다. 두 팀 모두 짧은 패스로 탈압박을 이어가거나 수비라인에서 시작하는 긴 패스로 서로의 측면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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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기 7득점', 울산 강지우는 득점왕을 노린다

대역전극으로 승리를 거둔 울산 홍주영 감독은 "날씨 더운 건 양 팀이 같은 조건이었다. 선수들이 어제보다 몸이 좀 무거웠다. 결과적으로 안이하게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초반 실점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홍주영 감독은 "춘계 대회 우승으로 조금 나태해졌던 것 같다. 연습 과정에서 그런 면이 있었는데 시합에서도 현실로 나타났다"라며 대역전극에도 크게 기뻐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 팀이 포항이었기에 완벽한 승리를 원했던 것일까? 홍주영 감독은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 홍 감독은 "작년에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예성여고도 강하더라. 여고 상위 클래스라서 이 두 팀을 만날 때마다 긴장하면서 준비하고 있다. 동해안 더비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면서 말을 아꼈다.

이날 팀의 첫 골과 마지막 원더골을 책임졌던 강지우에 대해서는 "대표팀에도 들어가고 성실하면서 자기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니까 결과가 오는 것 같다. 춘계 대회에서도 예선 통과 후 본선에서 6골을 넣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득점왕도 기대 중이다"라면서 기대감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를 마친 강지우는 "상대 팀이 강팀이라 걱정이 많았고 긴장도 많이 했다. 초반에 우리 경기대로 안 풀려서 당황했다. 선수들끼리 말을 맞추고 분위기도 다독여서 다행히 좋은 경기를 펼쳤다"라며 경기를 뒤돌아봤다. 팀의 승리를 이끌었던 마지막 원더골에 대해서는 "좀 새롭고 기분도 좋고 떨떠름하기도 하다"라며 복잡 미묘한 심정을 전했다.

특히 이날 강지우는 대표팀 친구들과 맞붙어야 했다. 같은 포지션에서 골을 노리던 문진서, 그리고 최종 수비와 공격을 넘나드는 임정은을 상대했다. 이날은 임정은이 최종 수비라인에서 제공권을 따내고 긴 패스로 전방 빌드업을 맡았다.

강지우는 수비수 임정은과의 대결에 대해 "키가 큰 선수다. 체격 차이가 나서 공중볼로는 안될 거 같았다. 발밑으로 패스를 주고받았다"라고 말했다. 상대 공격수 문진서에 대해서는 "(문)진서는 잘하는 애다. 같이 대표팀에 들어가면서 봤는데 서로 잘하기로 약속했다. 서로 라이벌 의식도 심어진 것 같다"라면서 동해안 더비 라이벌 공격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속에는 건강한 경쟁자 의식도 숨어 있었다.

지난 춘계 대회에서는 1년 후배 조미진에게 득점왕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대전 한빛고등학교를 상대로 무려 5골을 기록했고 강호 포항여전고를 상대로도 두 골을 기록했다. 강지우는 "이번에는 득점왕 욕심도 난다. 열심히 해서 노려보겠다"며 대회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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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홍주영 감독은 동해안 더비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포항여전고 벤치는 싸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3-1로 이기고 있던 경기가 뒤집혔다. 게다가 역전을 허용한 상대는 울산현대고다. 홍주영 감독과 강지우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난 뒤에도 포항 측의 미팅은 끝나지 않았다.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줬던 만큼 아쉬움이 더 컸으리라.

여고 무대는 K리그와 다르다. 유니폼 색깔만으로 '동해안 더비'를 논하기엔 섣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날 펼쳐진 경기는 영남지방의 자존심, 여자축구 명문이라는 자존심 자리를 두고 펼쳐진 명경기였다. 충분히 박수를 받을만한 경기력이었다. 이들이 너무 일찍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보는 결승전과 같은 경기였다.

현재 두 팀은 모두 8강에 진출했으며 포항여전고는 서울동산정산고를, 울산현대고는 신흥 강호 예성여고를 만난다. 대진이 갈려 두 팀이 다시 만나려면 결승전까지 올라와야 한다. 고등부 무대에서 또 한 번의 동해안 더비가 펼쳐질 수 있을까. 포항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 라이벌들의 스토리가 더 많이 생겼으면 한다.

intaekd@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