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남고 제공

[스포츠니어스|창녕=조성룡 기자] 제 26회 여왕기 전국여자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경상남도 창녕스포츠파크.

한 고등학교 팀의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자 관중석이 술렁인다. "왜 한 명이 없어?" 실제로 그 팀은 선수가 10명이었다. 퇴장 당한 것도 아니다. 선발 출전 선수가 10명인 것이다. 시작부터 한 명이 없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벤치를 바라봤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벤치에는 조끼를 입거나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교체 선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투지는 대단했다. 한 명의 공백은 뼈아팠다. 게다가 상대는 화천정보산업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화천군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100% 장학생들로 운영되는 학교다. 강팀일 수 밖에 없다. 잘 버티던 이 팀은 화천에 내리 두 골을 내줬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적 열세를 딛고 한 골을 넣었다. 경기는 1-3으로 끝났다. 승패는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화천의 입장에서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그리고 이 팀은 위안 삼을 수 있는 경기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스포츠니어스>가 이 팀의 감독에게 찾아가 물어봤다. "도대체 왜 출전 선수가 10명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자 감독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나왔다. 이 팀의 감독과 선수들은 그야말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이 팀은 광주의 운남고등학교, 감독은 '여자축구 1세대' 이미애 감독이었다.

갑작스러운 감독의 공백, 구원투수가 필요했던 운남고

운남고등학교는 광주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 여자축구부를 보유하고 있다. 광주 지역 여자축구선수들은 대부분 이 학교를 거친다. 주로 광주 광산중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 이곳을 향한다. 2006년 창단한 이 팀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그런데 지난해 문제가 생겼다. 운남고를 책임지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팀을 떠난 것이다.

코치가 아닌 감독이 떠났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일이다. 정신적 지주를 잃은 셈이다. 감독이 떠나자 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수들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축구화를 벗었다. 지도자가 없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선수들은 하나 둘 떠나는데 새로운 선수들을 수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이 팀에는 고작 14명의 선수가 남았다.

누군가 구원 투수가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여자축구 레전드' 이미애 감독이 맡았다.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축구의 산 증인이다. 1990년대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그녀는 2000년 충주 예성여고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에는 U-17 여자대표팀 코치를 맡으며 '대표팀 최초의 여성 지도자'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후 충남일화, 대덕대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꿀 빠는' 팀에 호랑이 선생님 뜨다

이 감독은 다른 성인 팀이나 속칭 '명문 팀'에서 선임해도 이상하지 않을 감독이다. 운남고와 이 감독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다. 이 감독이 1급 전문 스포츠지도자 실습을 위해 운남고에 방문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실습 차원이었다. 이 감독 또한 '재능기부'의 생각으로 왔다. 그녀가 본 운남고는 열악했다. 이 감독이 실습만 마치고 운남고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독은 선수들의 모습을 봤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운남고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 감독은 고민 끝에 "그래, 또 어려운 팀 한 번 맡아보자"며 제의를 수락했다. 그녀에게 맡겨진 선수는 고작 14명이었다. 그 중 신입생은 단 한 명이었다. 그 때가 올해 2월 초였다. 이미 다른 팀은 선수 구성이 완료됐다. 선수를 더 영입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14명의 적은 선수 숫자만 문제였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 감독이 부임 초기 바라본 운남고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애초부터 운남고는 여자축구의 강호가 아니었다. 좋은 선수가 들어오는 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타성에 젖어있는 문화가 팽배했고 감독의 공백으로 인해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팀이 아니었'다. 여자축구계의 호랑이 지도자 이 감독은 이를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다. 팔을 걷어부쳤다. 본격적으로 운남고 재건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회에 광주운남고는 딱 10명의 선수를 내보냈다. ⓒ스포츠니어스

쉼없이 터지는 악재는 혼술을 부른다

이 감독은 정신적인 부분부터 다잡았다. "이 팀이 체계적인 팀은 아니었다. 선수들이 운동이 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운동을 '편하게' 하고 싶어 온 팀이 운남고였다. 그저 쉽게 가려고 하더라." 선수들의 정신이 느슨하면 풀어진 축구화 끈 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이 이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하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얇은 선수층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이 감독은 한탄했다. "지도자 생활을 18년 째 하고 있는데 이런 팀은 또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라도 구성됐다면 한 번 팀을 만들어보겠는데 정말 쉽지 않다." 게다가 지난 4월 구미에서 열린 2018 춘계한국여자축구연맹전이 끝나고 네 명의 선수가 이 감독을 찾아왔다. "감독님, 축구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그리고는 팀을 떠났다. 이제 운남고에는 10명의 선수가 남았다. 베스트 11도 꾸리지 못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동네 조기축구도 학교 체육시간에도 축구를 할 때 별 일이 없다면 11명을 꾸려서 한다. 그런데 어엿한 학교 축구부가 11명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놓인 선택지는 하나였다. 남은 10명과 함께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향대로 쭉 밀고갔다. 조금씩 선수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목표 의식이 생기고 동료들과 끈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임 때부터 쉼없이 몰아치는 악재에 이 감독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열악한 여자축구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던 주인공이지만 운남고는 그녀에게도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혼술'도 해봤다. "내 나이가 48세다. 처음으로 혼술을 해봤다. '도대체 얘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 많이 했다. 사실 지금도 종종 혼술을 한다. 내가 이 팀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10명으로 만드는 변화가 시작됐다

이번 여왕기 대회에서 운남고는 조금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들의 정신적인 부분을 걱정하던 이 감독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날씨도 더운데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정말 잘해줘서 선수들이 이쁘다"라고 만족감을 표했다. 실제로 그랬다. 한 선수는 경기가 끝나고 패배에 눈물을 쏟았다.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징표다.

이 감독은 올해를 "재창단하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명에 불과한 선수를 가지고 열성을 다하고 있다. "습관을 고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상 선수들에게 강조한다.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성장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잘 따라준 것 같다."

11명도 꾸리지 못하는 팀이기에 그저 내년을 기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줘야 운남고가 장기적으로 발전한다. 지금 여자축구 인프라가 좋지 못하다. 당장 다른 팀에서 억지로 선수를 끌어 모으는 것은 부담이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오고 싶어하는 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10명의 선수들이 잘해줘야 한다."

이 감독이 선수들에게 바라는 점은 하나다. 무언가 목표 의식을 가지고 열정을 쏟는 것이다. 축구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 감독이지만 정작 선수들에게는 "축구가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축구선수로 실패하더라도 인생은 실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잡아주려고 한다. 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면서 최선을 다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운남고는 고군분투하고 있다. 올해까지 10명의 선수로 버텨야 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다. 그리고 꽤 잘 해내고 있다. 져도 괜찮을 것 같던 선수들은 이제 패배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골키퍼는 목이 다 쉬어버렸다. 운남고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운남고가 쓰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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