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산 그리너스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한창 성장해야 하는 나이에 군대로 떠난 축구선수가 있다.

축구선수에게 2년의 공백은 상당히 치명적이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은 병역 의무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축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애타게 찾는다. 그런데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싶어서' 군대에 일찍 간 선수가 있다. 그것도 전방 일반 부대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복귀해 얼마 전 K리그 데뷔골까지 넣었다. 안산그리너스 최명희의 이야기다.

무명 실업 선수가 혈혈단신으로 떠난 곳, 군대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최명희는 프로가 아닌 실업 무대로 향했다.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으로 간 것이다. 평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故박말봉 감독이 그를 불렀다. 박 감독은 그를 신뢰했다. 입단 첫 해 24경기 출전이 이를 증명했다. 이대로라면 창원시청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으며 프로 입성을 노릴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최명희는 당시 상당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군대였다.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은 최대한 군 입대를 늦추려고 한다. 그리고 군에서도 축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상주상무나 아산무궁화 입단, 또는 사회복무요원 판정 이후 K3리그 진출을 노린다. 당시 최명희의 나이는 23세였다. 몇 년 더 선수 생활을 하다가 군 입대를 해도 되는 나이였다. 하지만 최명희는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축구를 오래 하려면 군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게다가 당시 제 실력으로는 상주나 아산에 입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현역 판정을 받았는데 사회복무요원으로 가기도 쉽지 않았고요. 제가 좀 더 선수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역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내셔널리그 제공

그래서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현역병으로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특기병을 지원했다. 과거 그는 대형 면허를 취득했다. 그래서 운전병 보직을 신청했다. 한 번 마음을 먹자 군 입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렇게 그는 1년 동안 정들었던 창원시청을 떠나 군대로 떠났다. 2년 뒤에 다시 축구할 날을 꿈꾸면서.

공 차던 발로 페달과 브레이크를 밟다

기초군사훈련과 특기 훈련을 받고 그는 자대에 배치됐다.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한 공병여단이었다. 거기서 그는 본격적으로 운전병 생활을 시작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정신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명희는 축구선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문제는 현역병으로 축구선수의 감각과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현역에 가면 '축구 잘해서 포상휴가 많이 받겠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런 기회도 별로 없었어요. 부대 규모가 워낙 작다보니 축구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족구나 풋살 정도 가끔 했죠. 솔직히 막막했어요. TV로 축구 중계를 보면 '나도 뛰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개인적으로는 마음 고생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싶어 선택한 입대였다.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다짐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축구는 할 수 없지만 부대 안에서 틈틈히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매일매일 줄넘기를 하고 부대 내 체력단련장에서 개인정비 시간 때마다 몸을 만들었다. 공을 만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이었다. 낮에는 차를 닦고 조이고 기름쳤고 밤에는 몸을 닦고 조이고 기름쳤다.

휴가증 모으며 꿈꿨던 복귀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 최명희의 시간도 조금씩 흘러갔다. 군 생활의 절반이 지나가자 그는 선수 생활 복귀를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제약이 있었다. 1년 가까이 공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고 다른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보지도 못했다. 이것은 부대 밖을 나가야 가능했다. 최명희는 이 때를 위해 착실히 준비해둔 것이 있었다. 휴가증이었다.

"전역하고 바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전역 전에 어느 정도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했어요. 하지만 부대 안에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일병 때까지는 휴가를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포상 휴가증을 받으면 쓰지 않고 모아뒀어요. 상병 때부터 본격적으로 휴가를 나갔어요. 훈련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발도 맞춰보고 몸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휴가를 나갈 때마다 축구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당시 창원시청 故박말봉 감독이 어렵게 찾아온 제자를 흔쾌히 받아줬다. 창원시청 훈련에 합류해 몸을 만들 수 있었다. 만일 창원까지 가지 못할 때는 대학교 후배들을 찾아갔다. 음료수 한 병 사들고 동국대에 갔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렇게 최명희는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꿈같은 전역증을 받았다.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2년의 공백이 있는 축구선수를 선뜻 받아줄 팀은 거의 없었다. 그 때 故박말봉 감독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돌아와라." 최명희에게는 그 한 마디가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이다. 그는 2년 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면서도 입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최명희는 창원시청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떠난 인연을 그리며 들어올린 우승컵

병역을 해결한 최명희는 2016시즌부터 2년 간 창원시청에서 뛰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스승이 다시 그를 받아줬지만 그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2년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한창 성장해야 할 2년을 그는 통째로 날렸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성실함을 무기로 차근차근 성장했다. "나름 부대 안에서 열심히 했는데 처음 2개월 가량은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아 정말 많이 고생했어요."

2016년 말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故박말봉 감독이 세상을 떠나고 박항서 감독이 새로 부임했다. 하지만 새로운 감독 역시 최명희에게 변함 없는 신뢰를 보냈다. 그는 최명희에게 주장 완장을 채웠다. 그의 성실함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어려움도 있었다. 시즌 초반 故박재완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최명희는 과거 그의 룸메이트였다. 선수단 전체가 충격을 받았고 최명희 역시 연이은 주변 사람의 사망 소식에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 내셔널리그 제공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일어서야 했다. 시름에 빠진 선수단을 다독이며 일어났다. 그리고 박항서 감독에게 창원시청 부임 이후 첫 우승을 안겨줬다. 최명희는 2017 시즌 내셔널리그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MVP에 선정됐다. 그는 우승컵을 들고 故박말봉 감독과 팀 동료였던 故박재완을 생각하며 눈물을 쏟았다. "감독님이 살아계실 때 우승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28세 최명희의 첫 프로 진출

최명희는 창원시청에서 성공적으로 축구선수 복귀에 성공했다. 비록 그를 다시 일으켜 준 스승은 떠나고 없지만 그는 이제 창원시청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심지어 지난해 9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떠나 감독직이 비어 있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그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꿈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프로에 대한 열망이었다.

하지만 프로에 가고 싶다고 바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창원시청은 2017 시즌 내셔널리그 선수권대회를 우승했지만 정규리그에서는 6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승 팀도 아닌 중하위권 팀 선수에게 눈길을 줄 K리그 팀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감독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안산 이흥실 감독이었다.

안산은 겨울 비시즌에 창원시청과 몇 차례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 때부터 이 감독의 레이더에 최명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성한 활동량과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그가 매력적이었다. 이 감독은 코치진에게 슬쩍 물었다. "최명희 쟤 어때?" 그러자 예상보다 더 적극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감독님, 최명희 진짜 물건입니다. 안산 데려가시면 후회하실 일 없을 겁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입니다."

이 감독은 최명희에게 제안했다. "혹시 우리 팀에 들어와서 뛸 생각 없나?" 최명희는 반색했다. "저도 이제 프로에 가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불과 몇 년 전 입대하며 축구선수의 미래를 꿈꾸지 못할까봐 불안하던 그가 어느새 프로의 꿈을 이루게 됐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었다. 최명희의 첫 프로 진출이었다.

서른 바라보는 나이의 K리그 신인 최명희

올 시즌 최명희는 K리그 신인이었다. 하지만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다. 신인의 패기보다는 경험이 더욱 강조되는 나이다. "팀에 들어와보니 제가 세 번째로 나이 많은 선수였어요. 하지만 저보다 어려도 프로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이 많아요. 제가 나이 먹었다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보다 그저 동생들에게 좋은 말 많이 해주고 격려하는 형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전지훈련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최명희의 도전이 시작됐다. "정말 쉽지 않았어요. 프로는 역시 달랐어요. 내셔널리그보다 템포도 빠르고 뛰는 양도 많아요. 처음에는 '내가 여기에서 잘해야지'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저 열심히 뛰면서 '팀에 피해만 끼치지 말자'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 내셔널리그 제공

"현실적으로 '몇 경기를 뛰겠다'는 목표는 없었어요. 제게도 꾸준히는 아니더라도 몇 번의 기회는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기회를 잡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훈련장에서부터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실제로 한 안산 구단 관계자는 최명희에 대해 이야기하며 혀를 내둘렀다. "선수단 휴가일 때 클럽하우스를 갔더니 웨이트 트레이닝장에서 최명희가 혼자 운동을 하고 있더라. 그 정도로 독하게 했다."

그의 모습은 이 감독 눈에 쉽게 들어왔다. "저 친구 정말 열심히 하는데?" 이 감독은 평소 훈련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준다. 그리고 최명희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를 줬다. 3월 17일 FC안양과의 홈 경기였다. 여기서 최명희는 팀이 2-1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한다. 첫 경기부터 그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주전을 꿰차기 시작했다. 이 감독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골 좀 넣으라"던 친구의 전화 한 통

최명희는 꾸준히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조금씩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지난 5월 21일 성남FC전에서는 이건의 득점을 도우며 K리그 첫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축구는 결국 골을 위한 스포츠다. 그리고 공격 포인트만큼 선수에게 달콤한 기록도 없다. "도움을 하나 기록하고 나니 골을 한 번 넣어보고 싶었어요. 물론 제 포지션이 골을 많이 넣는 포지션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넣어보고 싶었어요."

그는 그렇게 조금씩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대 안에서도, 창원시청에서도 그는 꿈을 꿨다. 그리고 단지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노력했다. 프로 무대에 오고나서 그는 득점이라는 꿈을 다시 새롭게 꾸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한 단계 씩 밟아오던 그는 이제 골이라는 또다른 계단을 마주했다. 게다가 친구의 전화 한 통이 그를 자극하기도 했다.

6월 9일 광주FC전이 열리기 며칠 전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한 고등학교 동창의 생일을 맞아 축하 전화를 걸었다. 그는 "생일 축하한다"라고 말을 건네며 한참을 통화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최명희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봤을 땐 말이야. 너는 과감성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슈팅 좀 때려봐."

"그 친구는 축구선수 출신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의외로 그 한 마디가 저를 독하게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최명희는 광주전이 시작하기 전 몸을 풀면서 슈팅 연습에 집중했다. 골을 넣겠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겼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다. 이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다른 말 다 필요 없다. 오늘 무조건 이긴다"라고 강조했다. 최명희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꿈꿨다.

그리고 후반 25분 최명희에게 기회가 왔다. 측면에서 돌파하던 장혁진이 미끄러지면서 크로스를 했다. 살짝 뒤로 빠진 크로스는 중앙에서 밀고 올라오던 최명희 발 앞에 떨어졌다. 그는 잠시 드리블을 하더니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비가 와서 미끄러웠는데 발 밑에 정확히 컨트롤이 됐어요. 때리는 순간 발에 맞는 느낌이 별로 오지 않았어요. 궤적을 보면서 '들어가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때린 슈팅은 광주의 크로스바를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최명희의 K리그 데뷔골이었다.

ⓒ 내셔널리그 제공

주연보다 조연이 좋다는 최명희

많은 사람들은 최명희라는 새로운 신인이 등장했음에 한 번 놀라고 28세라는 나이에 한 번 더 놀란다. 하지만 최명희는 꾸준히 기다려왔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그는 그 누구보다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안산 이 감독은 그를 표현하면서 '모범생, 답안지'와 같은 단어를 썼다. 그리고는 "감독의 입장에 아니라 축구 선배의 입장에서 정말 훌륭한 후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극찬의 표현이다.

안산 구단도 노력의 결실을 맺은 최명희의 골에 기뻐하는 모습이다. 최명희는 꾸준히 사회공헌활동을 다니면서 지역 내에 인지도를 쌓고 있었다. 특히 준수한 외모로 여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런 가운데 최명희가 데뷔 골을 넣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사회공헌활동도 열심히 한다"는 것이 안산 구단 관계자의 귀띔이다.

하지만 최명희는 겸손했다. 그는 주연보다 조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앞으로도 제가 돋보이는 것은 썩 반길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는 선수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제가 많이 뛰면서 동료들이 빛날 때 저는 제일 뿌듯해요. 동료들이 펄펄 날면 제가 도움이 된 것 같아 좋아요." 이런 마음가짐이 지금의 최명희를 만들지 않았을까.

내셔널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한 무명 선수는 모두가 말리는 가운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2년의 세월을 잃는 악조건에서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섰다. 막막하고 불안했지만 그는 노력으로 이겨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K리그 무대에 섰고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아직 최명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최명희는 어디까지 더 올라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오를 계단은 많이 남아있고 그는 충분히 올라갈 힘이 있다는 것이다.

wisdragon@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