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 무궁화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놔도 간다'는 말이 있다.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한 마디다. 군대에 가면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특히 전역이 다가올 수록 더욱 그렇다. 속칭 '말년' 병장들은 종종 "내가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힌 것 같다"라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이는 축구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상주상무나 아산무궁화에 속한 선수들은 21개월을 이 팀에서 보내야 한다. "시간이 안간다"는 푸념 또한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선수들이 있다. "국방부 시계가 요즘 빨리 간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것도 말년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왜 시계가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일까?

떨어지는 낙엽도 신경 안쓰는 이상한 말년들

현재 아산의 최고 선임은 2016년 10월 입대한 다섯 명이다. 박형순, 이으뜸, 이재안, 이창용, 한의권이다. 입대 전 딱히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입대 후 이들은 펄펄 날았다. 아산이 K리그2 강팀의 면모를 유지하는데 이들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즌 아산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이번 시즌 K리그2 2위에 올라서기까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년 대우'를 받을 때가 됐다. 군경 팀에서는 전역을 앞둔 선수들이 경기에서 제외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원소속팀 복귀 전 부상을 당하지 않으려는 선수들의 심리도 있고 새로운 선수들로 조직력을 맞추기 위한 감독의 전략이기도 하다. 일반 부대에서 전역을 앞둔 병장들을 각종 작업과 훈련에서 열외 시키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산은 이상하다. 여전히 말년들이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이들의 전역은 7월 5일이다. 물론 아직도 한 달 가량 남았지만 월드컵 휴식기를 감안한다면 이들은 사실상 전역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심지어 선발인 경우도 많다. 아산 박동혁 감독에게 "말년 대우가 부족한 것 아니냐"고 농담 섞인 질문을 던지니 예상 외의 답변이 날아들었다. "7월 1일 경기에도 내보낼 생각인데요?" 전역 4일 전까지 그들은 경기에 나설 수도 있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이는 단순히 박 감독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말년 선수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이들의 경기 출전에 대한 욕심은 후임들 못지 않다. 한의권은 친형 결혼식 대신 경기 출전을 선택했고 지난 수원FC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이창용은 정지 기간이 한 경기인지 두 경기인지 알아보고 있었다. 경기에 나가고 싶어서다. 골키퍼 박형순은 원소속팀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친정팀 수원FC를 상대로 '영혼을 털어넣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슈퍼 세이브의 연속이었다.

신기한 현상이다. 말년 중 한 명인 이재안에게 물어보니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다. "프로니까요." 맞다. 그들은 프로다. 하지만 그들은 프로이자 의경이다. 국방의 의무를 지는 모든 이들이 한 번 쯤은 받아 본다는 '말년 대우'를 그들은 프로라는 이유로 사양하고 있었다. K리그에 군경 팀이 있다보니 어찌 보면 '말년 대우'가 K리그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정 관념을 깨고 있었다.

소통과 믿음이 만들어 낸 자신감

박동혁 감독의 형님 리더십은 두 가지로 함축할 수 있다. 소통과 믿음이다. 박 감독은 평소 선수들과 서슴 없이 어울린다. 문자메시지로 대화도 많이 한다. 장난도 많이 친다. 한의권은 "내가 좀 못하면 감독님이 '(한)의권아 너는 삐꾸다. 큰일났다. 이제 나가라'는 농담을 많이 한다"라고 말한다. 선수들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웃으면서 대할 수 있는 것은 평소 박 감독과 선수들의 사이가 어떠한지 보여준다.

여기에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경기력이 주춤하더라도 믿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군경 팀의 현실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른 팀의 경우 선수가 부진하다면 밥그릇 걱정을 해야한다. 하지만 군경 팀의 경우 한 번 입단하면 21개월은 미우나 고우나 팀에 머물러야 한다. 제한된 자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이창용은 이렇게 말한다. "아산에 와서 깨달은 게 '나는 어쨌든 여기에서 21개월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적어도 프로 팀에서 겪는 경쟁의 압박감 또는 부담감이 한결 덜했어요. 입대 전에는 한 번 기회가 오면 '내가 무언가를 꼭 보여줘야지'라는 부담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박 감독님이 꾸준하게 믿어주고 '한 번 해보라'고 하세요. 자신감이 붙죠."

결국 선수들을 허물 없이 대하며 믿음을 보여주는 박 감독의 리더십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선수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의권은 말년에 펄펄 날고 있다. 전역 전부터 타 구단 관계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입대 전 프로 통산 3골 넣던 선수가 아산에 있던 21개월 동안 13골을 넣었다. 다른 말년들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런 대접 받아본 적 없었어요"

자신감은 박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만 불어넣은 것이 아니었다. 구단 사무국 직원들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다. 특히 아산 박성관 대표는 그들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경기력이 좋지 않을 때도 질타보다는 격려를 했다. 선수들의 입장을 우선 생각했다. "힘내라고 고기도 많이 사주셨어요. 전역해도 그 고기 맛은 잊지 못할 겁니다."

이는 아산의 구단 분위기가 독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구단에 비교해서 아산은 구단 사무국과 선수단의 친밀도가 높다는 것이 선수들의 증언이다. 사무국 직원들과 코칭 스태프가 어울려 풋살을 즐기는 것은 아산에서 어색한 일이 아니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니 자연스럽게 선수들 또한 사무국 직원들과 스킨십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경기력이 부진해도 "할 수 있다"는 격려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선수들이 외부의 분위기에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산이 군경 팀이지만 환경은 정말 좋아요. 선수들은 그저 축구에 전념하면 됩니다." 프로 데뷔 후 '에이스'가 아니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산에서 자신감을 안고 에이스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물론 너무 '오냐오냐'만 한다면 온실 속 화초가 될 수 있다. 격려하던 사람의 질타는 선수들의 마음에 더 강한 충격으로 온다. 딱 한 번 그랬다. 과거 경기력이 부진할 때 박 대표는 말년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너희들 져도 좋으니까 조금 더 열심히 뛰면 안되겠니?" 평소 선수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던 박 대표의 한 마디는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저희를 잘 챙겨주시던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충격이 컸어요. 솔직히 자존심도 상했고요. '우리는 열심히 뛴다고 뛴 건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동기들끼리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했어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어요. '우리가 더 열심히 뛰자. 말년이라고 '빠졌다' 소리 듣지 않게 더욱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자.'" 그들은 지금까지 그 다짐을 지켜오고 있다.

박동혁 감독이 받은 문자 한 통

그들의 전역이 다가오자 박 감독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팀의 든든한 기둥이다. 하지만 선발 제외를 고민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었다. 말년 선수들이 출전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박 감독 본인도 새로운 팀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남은 선수들을 가지고 미리 조직력을 다져놔야 할 필요도 있었다. 쉽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박 감독은 그들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너희가 뛰고 싶으면 내보낼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뺄게."

그의 고민은 예상 밖으로 빨리 풀렸다. 선수들은 오히려 박 감독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감독님이 저희보고 뛰라고 하면 마지막까지 뛰겠습니다.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아서 빼신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독과 선수들은 서로 믿음이 컸다. 게다가 월드컵 휴식기 덕분에 조직력을 맞출 시간을 벌었다는 것 또한 선택의 폭을 넓게 만들었다. 그래서 박 감독은 "이참에 7월 경기까지 뛰고 보내겠다"는 것이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그리고 얼마 뒤 박 감독은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말년 선수 중 한 명이 보낸 것이었다. "감독님 저희가 1위 선물해드리고 전역할게요." 그의 다짐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1위 성남을 추격하기 어려워 보였던 아산은 어느새 승점 2점 차로 턱 밑까지 쫓아왔다. 그들에게 남은 경기는 두 경기다. 박 감독은 "메시지 보낸 선수를 누군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군경 팀은 '거쳐가는 곳'이 결코 아니다

한 아산 구단 관계자는 이 다섯 명을 향해 "역대급 기수"라고 표현했다. 21개월 동안 생활하고 떠나는 팀에서 열정을 쏟으며 후임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이야기다. 아산 구단의 이들을 향한 애정은 생각보다 크다. 박 대표는 이들에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던졌다. "너희들 전역하고 몸값 너무 올리지 마. 시민구단 창단하면 다시 데려오고 싶어." 이들 또한 화답했다. "저희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창용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한)의권이는 벌써부터 너무 오른 것 같아요."

어찌보면 이들은 군경 팀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다. 개인 기량이나 성장이 정체될 수 있는 시기에 이들은 군경 팀이라는 특성을 활용해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창용은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제 선임이 김은선(수원)과 최보경(전북)입니다. 같은 포지션의 김은선의 모습과 최보경의 경기를 보는 시야를 배우며 성장했어요"라고 말했고 이재안 역시 "여기서 오히려 개인 기량을 갈고 닦았다"라고 말한다.

특히 이재안은 군경 팀을 '거쳐가는 곳'이라는 세간의 시선을 강하게 부정했다. "이곳은 거쳐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는 곳입니다. 저희는 아산에서 정말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해요. 다른 선수들도 이렇게 좋은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이 전역 후에도 좋은 모습을 꾸준히 유지한다면 군경 팀의 역사에서 상당히 모범적인 사례를 완성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도 아산은 충분히 강하다"

어쨌든 그들은 7월이 되면 팀을 떠난다. 아산의 입장에서는 전력의 손실이다. 현재 2위를 달리며 순항하고 있지만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박 감독과 선수들 모두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역을 앞둔 선수들은 "우리가 전역해도 아산은 충분히 강하다. 올 시즌 K리그2에서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이다"라며 후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성남전에서 <스포츠니어스>와 만난 이창용은 관중석을 가리켰다. "이게 바로 아산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관중석에서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이 재밌게 경기를 보고 있었다. 심각하게 경기를 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어가며 즐기고 있었다. "이 선수들은 어찌보면 주전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열심히 응원하고 있어요. 팀이 하나가 됐다는 증거입니다." 그 순간 한의권이 결정적인 헤더 슈팅을 놓쳤다. 지켜보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쉬워했다. 이창용은 파안대소를 하며 말했다. "의권이가 헤더는 약해요." 그리고 몇 분 뒤 한의권은 헤더로 자신의 두 번째 골을 만들었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아산이 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최근 프로 팀의 트렌드와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프로 팀의 추세는 출퇴근이다. 숙소를 폐지하는 곳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산은 군경 팀이다. 미우나 고우나 전원 합숙이다. "다른 팀에서는 팀 동료라 하더라도 친해지는 선수와 친해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희는 무조건 전원 합숙이잖아요. 친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친해질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조직력으로 나오는 것이죠."

이제 그들은 아산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박 감독은 성남전이 끝나고 나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깜짝 구상을 발표했다. "9일 열리는 서울이랜드전에서는 전역하는 다섯 명을 모두 선발로 내보내려고 한다. 그것이 떠나는 그들을 예우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큰 문제가 없다면 다섯 명 모두 선발 출전할 것이다." 마지막 홈 경기에서 팬들의 박수를 받게 하려는 박 감독의 배려다.

"국방부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전역을 앞둔 그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솔직히 말해서 전역하는 것은 너무 좋아요. 빨리 군 생활을 끝냈으면 좋겠어요. 원소속팀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기대되고 설레요. 그런데 아산을 떠나는 것은 싫어요. 제가 축구를 하면서 이렇게 즐겁고 신나게 했던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눈에 밟힐 것 같아요."

"21개월 동안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그저 흘러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아산에서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주셨던 것 같아요. 이제 저희는 곧 떠나지만 전역하고 나서도 아산을 진심으로 응원할 겁니다. 솔직히 전역해서 기뻐요. 하지만 정말 이런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개인적으로 아쉽고 슬픈 마음도 큽니다."

원소속팀 팬들이 원망 아닌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 아산 무궁화 제공

처음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또한 잘 마무리해야 한다. 이제 아산의 말년 다섯 명은 군 생활 마지막 홈 경기를 준비한다. 물론 7월 경기에도 출전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원정 경기라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상 아산 시민들과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면 준비 많이 해야 하는데 요즘 국방부 시계가 참 빨리 가네요." 전역이지만 또다른 이별을 그들은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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