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스테르순드는 스웨덴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가야하는 작은 마을이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12년 4월 스웨덴으로 날아갔다. 한 한국인 선수가 스웨덴 3부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나이키에서 주최한 축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입상한 뒤 스웨덴 3부리그로 진출한 이 선수의 이름은 문선민이라고 했다. 그때의 기분을 처음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랬다. ‘스웨덴 3부리그? 그냥 조기축구 팀 아니야?’ 한 무명 선수의 위대한 도전을 응원하는 한 편으로는 해외 변방 무대에서 뛰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선수 중 한 명이 될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문선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스웨덴으로 날아갔다.

세상이 꽁꽁 언 곳에서 외롭게 축구하던 아이

그가 뛰는 외스테르순드라는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치 ‘정글의 법칙’에서 오지를 찾아가는 것처럼 돌고 돌아야 했다. 다른 일정상 영국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으로 이동한 뒤 다시 스웨덴 국내선을 타고 40분을 더 들어가야 외스테르순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추운 스웨덴에서 외스테르순드에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공포감이 몰려왔다. 창밖으로 보니 온 도시는 눈에 덮여 하얀 세상이 돼 있었다. 딱 봐도 추위가 무시무시한 동네 같았다. 북극과 가까운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긴장됐다. 시골 공항이라 비행기에서 내려 활주로를 걸어가야 했다. 처음 겪는 추위에 당황스러웠다.

‘이런 곳에서 한국 선수가 축구를 한다고?’ 처음 드는 생각은 이랬다. 축구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축구장도 없을 것만 같은 동네였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데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찾아간 숙소에서 문선민을 처음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멀죠?” 키가 작아 어딜 가도 의기소침한 나는 나보다도 더 작은 이 어린 친구를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처음 만난 문선민은 21살의 어린 나이에 축구를 위해 이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는 단 한 명도 한국인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 식당이 하나 있어 고향의 맛 비슷한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위안일 정도였다.

문선민은 어떻게 스웨덴 시골 마을에 오게 됐을까. 나이키 ‘더 찬스’ 최종 8인에 뽑혀 나이키 아카데미에서 훈련하던 그는 이 아카데미 코치로부터 외스테르순드 감독을 소개 받았다. 당시 벨기에 2부리그 입단을 조율 중이었던 문선민은 나이키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지도한 코치의 조언을 받아 들였다. “스웨덴으로 가 보다 많은 경기 경험을 쌓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선민은 그를 원하는 팀이 이제 갓 4부리그에서 3부리그로 승격한 팀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도자의 추천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문선민은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스웨덴 시골마을에서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외스테르순드 공항은 규모가 대단히 작다. 마을 자체도 크지 않다. ⓒ스포츠니어스

그는 스웨덴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문선민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 “아직도 여기 온 첫 날을 기억해요. 2012년 1월 28일이었어요. 오자마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추위 때문에 경악했죠. 공항에 도착하니 온도계가 영하 25도를 가리키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이날은 포근한 편이었어요. 영하 36도의 살인적인 추위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어요.” 현지에서 문선민의 훈련 모습도 지켜봤고 경기도 살폈다.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홀로 지내는 집으로 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때 본 문선민은 당장 향수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보냈다. 그는 대단히 열악한 상황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스웨덴 음식이 워낙 입에 맞지 않았고 구단에서 따로 식사도 제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끼니의 대부분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스웨덴어를 몰라 밖에 나가서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어려웠다. 작은 자취방에 가 보니 한국에서 공수한 즉석밥과 통조림이 가득 차 있었다. 음식을 한국에서 스웨덴까지 택배로 보내야 해 김치 등은 먹을 수도 없었다. 훈련 스케줄이 그리 힘든 편은 아니었다. 하루에 짧게 단체 훈련에 임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그만의 외로운 시간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구단에서 제공한 자전거를 타고 훈련장과 자취방을 오갔다. 그의 생활을 본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공기는 좋은데 나는 그냥 공기 안 좋은 서울 강남에 살고 싶어.” 외스테르순드는 저녁 7시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을 정도로 조용했다.

문선민은 이 작은 자취방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냈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한국으로 인터넷 전화를 하기에도 어려웠고 노트북으로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주로 혼자 보내는 시간에는 뭘 하느냐”고 묻자 천진난만한 답변이 돌아왔다. “개인 운동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방 안에서 혼자 천장을 보고 누워 있어요.” 딱 놀기 좋아할 21세의 어린 청년은 꿈을 위해 이름도 어려운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이렇게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솔직히 이때 문선민의 생활을 보면서 구단에 서운한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머나먼 외국에서 온 어린 선수를 너무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라면 잘 먹어야 하는데 즉석밥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게 마음이 아팠다.

외스테르순드 공항은 규모가 대단히 작다. 마을 자체도 크지 않다. ⓒ스포츠니어스

“네가 한국에서 온 문(MOON)이냐”

문선민은 오전에는 시리얼을 먹은 뒤 근력 운동을 하고 구단에서 점심을 먹은 후 축구 영상을 보며 공부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후 5시 반부터 8시까지 팀 훈련에 참가한 뒤 혼자 사는 집에 돌아와 직접 저녁을 해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게 그의 일과였다. 토요일 오전 훈련을 한 뒤 월요일 오후 훈련까지는 자유시간일 정도로 그들의 훈련 스케줄은 여유가 있었다. 차라리 훈련이 많아 문선민이 밖에서 동료들과 보낼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문선민이 스웨덴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줄 알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덩치 큰 스웨덴 선수들 사이에서 작고 왜소한 동양 선수가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을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스웨덴 시골 마을을 며칠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한국에서 온 문(MOON)이냐.” 나를 문선민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문선민의 도전은 그들에게도 대단히 큰 관심사였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4부리그에서 이제 갓 3부리그로 승격한 연고 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그가 역사적인 스웨덴 무대 데뷔전을 치르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건 2012년 4월 14일이었다. 추위에 꼭꼭 숨어 있던 동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4천여 관중석을 채웠다. 당시 날씨는 영하 10도는 됐던 걸로 기억하지만 이 용감한 사람들은 반바지를 입고 갓난 아기를 안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홈팀 외스테르순드 선수들이 한 명씩 호명되자 선수들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관중은 이에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한국에서 온 우리의 문(MOON)입니다.” 문선민이 손을 들어 인사하자 장내는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뛰는 작은 동양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상대팀 서포터스는 문선민이 공을 잡을 때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선수들을 상대로 문선민은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볐다. 자취방에서 즉석밥과 참치 통조림을 먹으며 외롭게 생활하던 문선민은 그라운드에 들어선 뒤 전혀 다른 선수가 돼 있었다.

외스테르순드 공항은 규모가 대단히 작다. 마을 자체도 크지 않다. ⓒ스포츠니어스

K리그 입성, 그리고 대표팀 도전

외스테르순드에서 나흘 간 생활하며 문선민과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원래 말을 잘 놓지 못하는 성격인데 나보다 열 살 어린 문선민과 형, 동생으로 지내게 됐다. 그도 한국에서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온 이들과 살갑게 지냈다. 취재를 마치고 나흘 뒤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문선민과 포옹하며 이렇게 말했다. “꼭 살아남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스웨덴 시골 마을에 있는 3부리그 팀에서 열악한 환경을 딛고 버텨낸 그는 이후 놀라운 행보를 이어갔다. 스웨덴 1부리그 명문팀 유르고르덴에까지 진출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도 늘 그의 소식을 접하며 응원을 보냈다. 이렇게 고생한 선수들은 꼭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문선민은 5년 간의 스웨덴 생활을 접고 지난 시즌 K리그 인천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2012년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봤던 그 소년은 오랜 만에 나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제가 스웨덴에서 고생을 좀 해서 이마가 좀 까졌어요.” 그리고 문선민은 K리그 입단 1년 만에 또 한 번 놀라운 일을 해냈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2018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된 적이 없던 그를 신태용 감독이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아마도 스웨덴 선수들을 잘 아는 그에게 월드컵 스웨덴전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문선민은 외국인 선수들이 장악한 올 시즌 K리그 득점 랭킹에서 이동국과 함께 10위권 안에 있는 유이한 국내선수다. 스웨덴 무대에서 악착같이 버텨온 그는 K리그는 물론 이제 대표팀에서도 다시 한 번 생존 본능을 발휘할 예정이다.

문선민의 이력을 보면 그가 나이키 ‘더 찬스’ 출신이라는 것과 스웨덴에서 5년 간 생활했다는 소개가 짧게 한 줄로 언급된다. 하지만 그의 스웨덴 생활은 단 한 줄만으로 다 소개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이 많았다. 아무도 없는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버텨낸 그때의 일은 단 한 줄로 언급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운동선수 중에 고생 안 한 선수가 없겠지만 나는 문선민이 머나먼 타국에서 고생했던 걸 직접 보며 그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20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벌어진 인천유나이티드와 울산현대의 경기가 끝난 뒤 문선민을 잠깐 만났다. 그는 곧바로 다음 날 대표팀에 처음으로 합류해야 했다. 2012년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뛰던 그는 이날 대표팀 입성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많은 게 변했다.

“이번에도 꼭 살아남아”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답을 마친 문선민과 따로 짧게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다. “형. 저 내일 대표팀 들어가요.” 머리숱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어렸던 그 2012년의 모습이 나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는 플레이 한 번, 말 한 번에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경쟁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외스테르순드에서 생활할 당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끝까지 버텨내 생존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가 또 한 번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을까. 대표팀 입성을 하루 앞둔 그에게 딱 한 마디를 했다. 2012년 외스테르순드에서 작별할 때처럼 그와 포옹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꼭 살아남아. 스웨덴에서처럼.” 스웨덴 시골 마을에 있는 3부리그 팀에서 국가대표까지 발탁된 문선민은 또 한 번 커다란 도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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