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조성환, 곽희주, 김진규 ⓒ 전북현대, 수원삼성, FC서울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상대 팀 팬들에겐 최악의 선수로 꼽히지만 그 선수가 우리 팀 유니폼을 입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선수들이 있습니다. 우리 팀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더티 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았던 K리그 파이터들은 상대팀 팬들에겐 조롱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죠. 그러나 그 조롱과 비난 속에는 질투와 부러움의 감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상대 선수에게 온갖 욕을 하면서도 '우리 팀에도 저런 선수가 있어야 하는데'라는 속마음을 숨기기는 어려워 보이더군요.

줄어드는 관중, 언론의 한탄 속에 K리그 구성원들이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 같이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물렁물렁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하던데 요즘은 모두가 착하게만 굴고 있지는 않나요? 팀과 팬을 향한 충성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팀의 승리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랄수록 녹색 운동장 위에서는 파이터가 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이 선수들을 운동장 밖에서 만난 선수들은 모두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기장에만 나서면 정말 아슬아슬한 플레이를 펼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선수들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운동장 안에서는 누구보다 거칠지만 승리를 위해서 상대 팀 선수들의 기를 죽일 수 있다면 우리 팀으로서는 꽤 귀한 인력입니다. FC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루이스 수아레스 같은 선수들은 때론 말도 안 되는 승부욕을 불태우지만 어쨌든 경기 흐름을 유리하게 가져오는 신기한 선수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치는 리버풀 시절 이전부터 계속 높게 평가됐습니다. 일부러 싸움을 붙이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그냥 괜스레 그리운 것도 사실입니다. K리그 파이터 삼대장이 그립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조금 위험해 보이는 플레이를 펼쳤던 전북현대 조성환, 수원삼성 곽희주, FC서울 김진규의 '윈 어글리' 정신이 다시 보고 싶습니다.

ⓒ 전북현대

모두와 충돌한다는 그 사람

조성환의 거친 플레이는 K리그 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북 유니폼을 입고 수비를 책임진 그는 상대 팀 공격수들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온몸으로 상대 공격수를 막아내는 플레이에 공격수들은 부상을 먼저 걱정해야 했습니다.

조성환은 작년 8월 인천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김용환의 돌파를 '크로스 라인'으로 막아내며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종혁 심판은 그런 조성환에게 경고만 줬습니다. 인천 팬들은 조성환의 플레이가 매우 위험했으며 퇴장성 파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팬들은 제가 방금 쓴 것보다 더 격렬하게 표현했죠.

그런데 이 논란에 당시 포항스틸러스에서 뛰었던 양동현이 SNS로 일침을 가합니다. 양동현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조성환의 파울 장면을 캡쳐한 사진을 올리며 "모든 선수들이 인정하는 좋은 팀 훌륭한 선수들이 모여 뛰고 있는 팀인데. 부끄러워하는 거 아나"라면서 "잘하는 걸로 착각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해시 태그로는 '페어플레이, 부끄러운 건 동료들'을 첨부했습니다. 양동현은 <스포츠니어스>와의 통화에서 "그 사람은 모두와 충돌한다"라며 "말이나 행동으로 꼭 시비를 건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만큼 상대 팀 팬들뿐만 아니라 상대 선수들에게도 부담을 줬다는 거죠.

하지만 팬들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선수였습니다. 퇴장 명령을 받아도 터치라인을 빠져나갈 때 관중들의 환호를 유도하면 전북 팬들은 그 모습에 더 열렬한 응원을 펼쳤습니다. 그런 조성환도 경기장을 떠나면 누구보다 순한 사람이라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동료 선수들과 경기 얘기를 할 때 거친 표현으로 열을 올려도 구단 직원이 "조성환 파이팅"을 외치면 갑자기 온순한 목소리로 "네.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선수랍니다. 그런 조성환을 바라보는 전북 팬들의 유일한 걱정은 카드관리였다고 합니다. 이미 경고를 받은 상황에서도 거친 플레이를 펼쳐 마음 졸이는 팬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물불을 안가리고 상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다른 팀에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지만 전북으로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전사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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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홀리 다이버'

전주에 조성환이 있다면 수원엔 곽희주가 있습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끈적끈적했습니다. 상대가 FC바르셀로나든 데얀이든 이동국이든 일단 달려들었습니다. 지금은 수원으로 이적한 데얀이 가장 어려워하던 수비수가 곽희주였습니다. 데얀은 곽희주를 향해 "K리그 최고의 수비수"라고 극찬하며 "마치 인생 마지막 경기를 뛰는 것처럼 경기장에서 무서울 정도로 거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데얀이 수원으로 이적하며 염기훈과 웃으며 찍은 사진이 어색했다고 하지만 곽희주와 찍었더라면 더 어색했을 것 같습니다.

곽희주는 여러 걸출한 공격수들을 괴롭히면서 수원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동시에 수원을 증오하는 라이벌 팀 서울 팬들은 그를 향해 온갖 비난과 욕설을 멈추지 않았죠. 그의 투지와 파이터 기질은 특히 서울과의 슈퍼매치에서 더 돋보였습니다. 물론 데얀을 꽁꽁 막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팀의 득점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플레이도 불사하는 그의 플레이에 수원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특히 2016년 슈퍼매치에서 곽희주는 서울 아드리아노를 막는 과정에서 넘어지면서 아드리아노의 발목을 손으로 잡는 파울을 범합니다. 주심은 경고를 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 행동으로 두 경기 출전 정지라는 사후 징계까지 받았죠. 아드리아노는 곽희주의 파울만 없었다면 노동건과의 일대일 기회를 맞아 골을 기록할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이 경기는 1-1로 무승부를 거뒀으니 결과적으로 곽희주가 자신의 출전권을 담보로 팀의 패배를 막은 셈입니다. 서울 팬들은 이 '다이빙' 장면으로 곽희주를 조롱했지만 수원 팬들은 그를 향해 '홀리 다이버'라는 애칭을 선물하며 대형 현수막까지 만들었습니다.

평소에도 경기장에선 거칠게 플레이하는 선수인데 서울만 만나면 유독 더 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곽희주도 경기장 밖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라는 평이 들립니다.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때도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곽희주는 매탄고 저학년 코치로 일하면서도 축구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경기장 밖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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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파이터?

서울 팬들은 '파이터'라고 하면 김한윤과 이청용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청용도 '상암동 미친개'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김한윤은 부천에 있을 때부터 거친 플레이를 펼치곤 했는데 서울에서 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한윤이 팀을 옮기면서 서울 파이터의 계보는 김진규가 이어갔습니다.

서울이라는 팀의 파이터를 맡기란 쉽지 않습니다. 서울 팬들만이 유일한 아군이기 때문입니다. 수원 팬들은 물론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근육 이상으로 쓰러질 때도 상대 팬들에게 험한 말을 했던 선수입니다. 그래서 서울팬들만 그를 더 아꼈습니다. 김한윤과 이청용, 김진규의 플레이를 봐왔던 서울 팬들은 서울 수비가 무력할 때마다 "파이터가 없어서 그렇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심상민이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펼치고 있지만 확실한 파이터 '계보'를 잇기엔 서울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염기훈의 왼쪽 무릎을 향했던 살인 태클은 여전히 화자 됩니다. 서울팬들에게도 염기훈의 존재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현재 서울 선수들의 모습을 본다면 김진규의 파이팅이 그리울 만도 합니다. '쌈닭'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김진규는 염기훈뿐만 아니라 다른 팀 선수들에게도 부담이었습니다. 게다가 골대 부근에서 프리킥 선언이라도 나오면 골대 뒤에 있던 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심지어 서울 팬들도 김진규의 프리킥이 날아올까 봐 잔뜩 긴장할 때도 있었습니다.

발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어 김주영과 아디처럼 커버가 필요한 선수지만 여전히 서울팬들은 김진규를 그리워합니다. 최용수 감독이 백 스리를 선택할 때도 항상 김진규를 선발로 세우고 양옆을 누구로 정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만큼 김진규는 서울을 사랑했고 팬들도 그런 김진규를 사랑했습니다. 현재 김진규는 오산고 코치에 부임하며 학생 선수들에게 애정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2016년 겨울 결혼에 골인하면서 사랑꾼의 모습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성환, 곽희주처럼 운동장 밖에서의 김진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파이터들이 있어서 축구

물론 '파이터 삼대장'이 저지른 파울은 상대 선수의 선수 생명을 끝내버렸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파울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논란과 물의를 일으킨 적도 많습니다. 그 정도의 거친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선수들이 다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그들이 보여준 전투력이 그립습니다. 어차피 한 팀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그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팬들을 위해서만 뛰면 됩니다. 비록 데얀이 아직 서울 상대로 골이 없지만 그래도 푸른 유니폼을 입은 이상 서울 골문을 향해 골을 노릴 겁니다. 파이터형 수비수들은 상대 팀일 때는 분노의 대상이지만 우리 팀일 때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짜릿한 선수입니다.

지난 4월 8일 열렸던 슈퍼매치는 우중충했던 날씨와 함께 '핵노잼'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전반을 마치고 만난 한 미디어 관계자는 "새로 이적한 선수들이 많아 소속감도 없는 것 같고 곽희주, 김진규 같은 파이터도 없어 재미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역시 각 팀에 파이터 한 명씩은 있어야 경기가 흥미진진합니다.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다가도 경기 종료 휘슬이 세 번 울리면 서로 악수하고 유니폼을 교환하는 게 축구 아니겠습니까. 한 공중파 방송사는 난투극 직전까지 갈 뻔했던 서울과 수원의 경기를 '부끄러웠던 슈퍼매치'라고 표현했지만 야구에서 일어나는 벤치클리어링 소식에는 '이래서 야구'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이 표현을 빌려 쓰겠습니다. '파이터들이 있어서 축구'입니다. 스트라이커 계보도 걱정이지만 K리그에 파이터 계보가 쭉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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