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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곽힘찬 기자] 어제(27일)는 판문점에 위치한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된 아주 역사적인 날이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공개된 선언문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점은 남북 간의 문화·체육 교류 활성화다.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릴 예정인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남북 단일팀의 출전이 유력하고 정기적으로 ‘경평축구’ 교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경평축구의 교류에 주목하고 싶다. 경평축구는 남북 각각을 대표하는 도시인 서울과 평양에 위치한 축구팀이 친선경기를 벌이는 것을 뜻한다. 아직은 서로에게 서울과 평양은 쉽게 오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하지만 상상을 해보자. 남과 북의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관중석에 앉아서 카스 맥주 또는 대동강 맥주를 한잔하며 평화롭게 경기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이 될까?

경평축구의 시작

경평축구 교류는 ‘경평더비’라고 불리기도 하며 꽤 역사가 깊은 교류전이다. 조선일보 운동부 기자 이원용과 경성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최정연이 조선 최고의 도시였던 경성과 평양 축구단의 라이벌 경기를 시작해보자는 것이 발단이었다. 이때 경성에서는 여러 차례 전조선 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불교청년회를 주축으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이 선발되어 경성축구단을 창설했고 평양에서는 숭실 전문대학, 평양 대성학교 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평양축구단을 창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최초의 경평축구는 1929년 10월 8일 조선일보의 주최로 경성에 위치한 휘문고등학교에서 열렸다. 당시의 경평 교류전은 현재의 ‘홈-어웨이’로 치러진 꽤나 현대적인 방식의 대회였다. 경평축구는 단순한 축구 경기의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을 단합시키고 조선의 역량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며 반일감정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1935년 4월 13일 당시의 경평축구대항전 ⓒ 서울역사편찬원

남북이 함께했던 민족적인 단합 축구는 1942년 일제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로 구기 종목을 폐지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 3월 25일 마지막 경평축구 교류전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열강에 의해 그어진 38선으로 인해 선수들의 서울-평양 간 통행이 어려워졌고 이내 남과 북에 각각의 독립된 정부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단합을 이루고 한민족이 가진 역량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남과 북이 함께 시작한 교류전이 분단으로 인해 수십 년이 지난 2018년 현재까지 재개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드는 경평축구

경평축구 교류 재개에 대한 논의는 지난 2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과 서울 중국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열린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관람하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지난 4월 중순 한국의 예술단이 공연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도종환 문화체육부 장관이 먼저 북한의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에게 경평축구의 재개를 제안했고 김영철 부장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으면서 급물살을 탔다.

사실 경평축구는 남북 간 고위급 관리들의 논의에 앞서 지난 1990년 ‘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교류전을 벌인 적이 있다. 하지만 경기는 단 두 차례만 열렸고 이 때문에 정기성이 아닌 일회성 이벤트라는 지적이 나왔다. 만약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정기성의 의미를 가진 교류전이 이루어진다면 남북 간 문화·체육 교류 활성화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경평축구는 남과 북의 연결고리

당신이 소개팅에 나갔다고 치자. 만약 상대와 관심사가 동일하거나 비슷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아마 더 얘기하고 싶고 계속 만나보고 싶을 것이다. 남과 북은 축구라는 공통적인 공감대가 존재한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러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경평축구가 문화·체육 활성화의 선봉장 역할을 할 수 있고 서로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으며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정기적 교류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남과 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서울과 평양이다. 양 측의 수도권이 먼저 나서서 주도해 나간다면 파급력은 더욱 크다. 축구를 중심으로 서울과 평양이 더 이상 서로에게 폐쇄된 도시가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곳이 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평축구가 남과 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축구를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동시에 ‘평화의 종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이 준비하고 극복해야할 사항들이 너무 많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결속을 위한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는 축구를 활용한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경평축구를 비롯한 남북 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

남북이 함께 해결해야 할 불균형 현상

경평축구의 활성화가 리그 규모의 확대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긍정적인 부분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리그 규모의 확대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유럽 축구의 시스템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소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남과 북의 경제력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경제력은 축구 리그의 인프라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만약 대책 없이 리그를 통합해서 확대한다면 남한 구단들과 북한 구단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다.

선례로 독일을 들어볼 수 있다. 독일은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리그를 통합했지만 동독 구단들은 서독 구단들의 자금력에 밀려 분데스리가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1991/92 시즌 동독 팀으로는 최초로 디나모 드레스덴과 한자 로스토크가 통합된 리그인 분데스리가에 참가하면서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다가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서독 구단들이 마티아스 잠머, 마코 레머, 세르게이 바바레즈 등의 동독 팀에서 뛰던 뛰어난 선수들을 모조리 영입해버리면서 리그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북한에서 지금 가장 뛰어난 전력을 자랑하고 있는 팀은 1부 리그 격인 최상급축구련맹전의 4.25체육단(평양)이다. 전원이 북한군 장교 계급을 부여받는 이들은 북한 축구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리그가 통합되었을 때 남한의 구단들이 4.25체육단을 비롯해 홰불, 여명 등의 북한 명문 구단에 소속되어 있는 에이스들을 자금력을 앞세워 모두 영입한다면 독일의 절차를 그대로 밟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경평축구는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고 상위 리그는 모두 남한 구단들이 차지할 것이다. 때문에 남북은 머리를 맞대고 ‘K리그 5년룰’과 같은 대책을 통해 선수들의 유출을 막는 방법으로 리그 불균형을 막아야 한다.

89년 전 경평축구가 식민지 시절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민족의 단합과 독립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89년 후 지금의 경평축구는 한겨울의 얼음처럼 꽁꽁 얼었던 남북의 긴장을 풀어주고 민족의 화해와 대동단결을 위한 장이 되어야 한다. 이전까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 왔지만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양 측의 정상을 비롯한 고위급 관리들이 89년 전 경평축구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서울의 FC서울과 평양의 4.25체육단이 정기적으로 친선경기를 펼치고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서울과 평양을 넘나들며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꿈만 같은 날이 올 수 있도록 말이다. 최근 손흥민 선수가 페이스북을 통해 언급한 것처럼 머지않아 성사될지 모르는 경평축구 경기에서 사용될 둥근 축구공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의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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