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감독 세계, ’44년 집권’부터 ‘하프타임 경질’까지

Good Bye Wenger ⓒ 아스날 공식 페이스북

[스포츠니어스 | 곽힘찬 기자] 여느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감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인이 ‘풋볼 매니저’라는 게임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도 어려워하는데 하물며 수많은 팬들이 주목하는 실제 축구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축구에서 감독이란 아무에게나 허락된 자리가 아니다. 명예롭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는 직책이다.

감독은 성적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이듬해에도 계속 팀을 이끌 수 있지만 부진한다면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낙마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매년 시즌이 전환점을 돌때마다 수많은 감독들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렇다면 축구 역사에 남을 만한 장수 감독과 단명 감독은 누가 있을까.

# 장수 감독

① ’22년’ 아르센 벵거 – 아스날FC (1996년 ~ 2018년)
얼마 전 축구 팬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1996년부터 무려 22년 간 아스날을 장기 집권한 벵거가 2017/18시즌을 끝으로 아스날을 떠난다는 속보였다. 최근 벵거는 부임 후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UEFA) 진출 실패, 부진한 리그 성적 등으로 인해 아스날 팬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유로파리그(UEFA)에서 AC밀란을 격파하면서 순항하고 있지만 이 무대가 어색한 팬들은 “벵거 아웃”을 외치며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작 벵거가 사퇴를 발표하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벵거 아웃”은 이전에도 존재한 아스날의 단골 멘트였지만 벵거는 비난을 모두 받아들이며 묵묵히 팀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벵거가 1996년 처음 아스날에 부임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의 능력에 물음표를 던졌다. 일본의 나고야 그램퍼스를 맡으며 구단 첫 일왕배 우승, J리그 준우승, 슈퍼컵 우승 등을 달성했지만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는 아시아 변방의 나라에서 거둔 성적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벵거는 그러한 불신을 모두 불식시켰다. 뛰어난 유망주들을 영입해 육성시키며 아스날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1997/98시즌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어 프리미어리그(EPL) 정상에 올랐다. 이때부터 벵거는 아스날을 ‘벵거의 아스날’로 변화시켰다. 특히 2003/04시즌 아스날이 세운 26승 12무의 EPL 무패 우승은 역사에 남을만한 기록이었다. 이것이 리그 우승의 마지막이었지만 감독 개인 FA컵 최다 우승 7회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비록 최근에는 특별한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감독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팬들은 벵거는 22년 동안 아스날의 ‘혼’이었고 벵거가 곧 아스날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② ’27년’ 알렉스 퍼거슨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FC (1986년 ~ 2013년)

퍼거슨은 현대 맨유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Andrea Sartorati

우리는 아직까지 매 경기 껌을 씹어대던 퍼거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감정의 상태에 따라 껌을 씹는 속도가 달라졌던 퍼거슨은 맨유를 넘어 전 세계 최고의 감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렙은 장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퍼거슨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스쿼드로 다른 EPL 클럽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경기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해 그에 맞는 전술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능했고 선수들의 잠재된 능력을 100% 활용함으로써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퍼거슨 아래에서 박지성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비롯한 수많은 선수들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퍼거슨은 약 27년간 맨유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총 38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유일하게 들지 못했던 트로피가 유로파리그였을 만큼 감독으로서 들 수 있는 트로피는 모두 들었던 셈이다. 특히 1999년 퍼거슨은 맨유의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맨유라는 빅클럽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집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퍼거슨이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 모예스를 시작으로 여러 감독들이 팀을 맡았지만 눈에 뛸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퍼거슨이 이룩한 업적이 컸던 만큼 팬들의 실망 역시 매우 컸다.

에릭 칸토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 2의 칸토나, 호날두, 긱스 스콜스는 나올 수 있지만 제 2의 퍼거슨은 나올 수 없다.” 모두가 믿고 따랐던 퍼거슨은 맨유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이자 선수들의 아버지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쓰고 우리는 이를 ‘퍼거슨’이라고 읽는다.

③ ’24년’ 故 맷 버즈비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FC (1945년 ~ 1969년)

맷 버즈비 경의 동상 ⓒ Geograph’s david dixon

퍼거슨과 함께 맨유의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히는 맷 버즈비. 버즈비가 부임하기 이전 맨유는 주로 하부 리그에서 시즌을 보내던 클럽이었다. 하지만 버즈비가 맨유를 그야말로 환골탈태 시켰다. 그는 먼저 자신의 철학에 따른 스카우팅 시스템을 통해 잉글랜드의 유망주들을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선수들이 보비 찰튼, 故 던컨 에드워즈 등이다.

‘버즈비의 아이들’로 불리는 맨유의 젊은 선수단은 평균 연령이 22세에 불과했지만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1955/56, 1956/57시즌 2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유로피언컵에서도 전설적인 공격수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초호화 군단으로 구성된 레알 마드리드CF에 4강전에 아깝게 패배하는 등 맨유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렸다. 이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버즈비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버즈비는 “맨체스터가 저의 파라다이스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맨유는 1957/58시즌 중 비극적인 뮌헨 비행기 참사를 겪었고 이 사고로 에드워즈를 비롯한 많은 1군 선수들이 사망하면서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버즈비는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를 영입해 기존의 찰튼과 함께 잉글랜드 축구 리그 역사상 최강으로 평가받는 공격 삼각 편대를 구축했고 참사 10년 만에 팀을 유럽 챔피언까지 올렸다. 과거 파산 위기의 맨유를 맡아 세계 최고의 팀으로 변모시킨 버즈비는 선수들을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침착하게 해결하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④ ’44년’ 기 루 – AJ오세르 (1961년 ~ 2005년)

오세르 시절의 기 루 ⓒ Édouard Hue

장수 감독이 잉글랜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도 존재한다. 축구팬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기 루 감독이다. 루는 현재 최장수 감독으로 UEFA 공식기록에 올라있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벵거와 퍼거슨처럼 루 역시 선수로 성공한 감독은 아니었다. 1952년 당시 아마추어 팀이었던 오세르에 입단해 선수로 뛰다가 1961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했다. 이후 오세르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년 만엔 경질되었지만 곧바로 다시 오세르로 돌아와 2005년까지 무려 44년간 팀을 이끌었다.

루는 오랜 시간동안 오세르를 이끌며 1995/96시즌 리그1 우승과 쿠프 드 프랑스 우승으로 더블을 달성했고 1996/97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이라는 팀 역사에 남을만한 성적을 거뒀다. 현재 오세르는 2부 리그를 전전하고 있는 몰락한 팀이 되었지만 루가 이끌던 1990년대의 오세르는 에릭 칸토나, 로랑 블랑, 알랑 고마, 엔조 시포 등이 뛰던 강팀이었다. 지브릴 시세와 필립 멕세 등의 선수들도 루가 발굴했다.

6부 리그의 아마추어 팀에 불과했던 오세르를 위해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인생을 모두 바친 루는 ‘오세르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당분간 루와 같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팀을 맡을 감독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⑤ ’12년’ 이영무 – 고양 자이크로FC (1999년 ~ 2015년)
고양 자이크로FC는 1999년 할렐루야로 처음 창단되어 익산 할렐루야, 김포 할렐루야, 안산 할렐루야, 안산 H FC, 고양 Hi FC의 구단명 변천사를 거친 이름이다. 고양은 지난 2017시즌을 앞두고 충주 험멜과 함께 리그 탈퇴가 승인되어 사실상 해체됐다.

이영무는 이러한 고양에서 무려 16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나병수, 인창수, 이성길, 이낙영 등이 감독대행 내지는 정식 감독으로 잠깐씩 활약한 적이 있지만 실질적인 구단의 지휘권은 이영무에게 있었다. 이 기간을 빼도 이영무 감독이 지도자로 팀을 이끈 기간만 12년이다.

그는 “국가대표는 개신교도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때문에 고양은 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구단이었다. 당시 팬들은 이들을 두고 “골을 넣으면 11명의 박주영이 세레머니를 한다”는 말까지 했다. 프로팀으로 승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무는 고양의 종교적 색채를 오히려 강화시켰다. 구단명의 ‘Hi’는 ‘할렐루야 임마누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전지훈련 기간엔 구단 차원에서 기독교 의식까지 진행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영무의 구단 운영 방식에 팬들 역시 외면했다. 2015년 K리그 21개 구단 중 유일하게 세 자릿수의 평균 관중을 기록했고 개막전에서조차 관중 1,000명을 넘기지 못했다. 또한 구단의 재무이사가 문화체육부의 보조금을 허위 정산하여 횡령하는 등 구단 내부적으로도 그야말로 ‘막장’의 모습을 보여줬다. 윗선에서부터 문제가 많았으니 구단의 성적 역시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해체 직전인 2016시즌 고양은 2승 10무 28패라는 치욕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영무는 고양이 총체적 난국의 상황에 이르자 임직원들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구단의 리그 탈퇴 및 해체를 결정했고 선수들을 아마추어로 전향시켜버리는 무책임한 행보를 보였다.

⑥ ’18년’ 故 브라이언 클러프 – 노팅엄 포레스트FC (1975년 ~ 1993년)

클러프 감독(우)과 테일러 코치(좌)의 동상 ⓒ Russ Hamer

UEFA 선정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 중 한명, 1부 리그 승격과 1부 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2연속 우승을 단 4시즌 만에 이뤄낸 명장. 클러프의 이야기다. 지금의 노팅엄 포레스트는 해외 축구를 막 접한 축구팬이면 아예 모를 수도 있는 잉글랜드 2부 리그 팀이다. 클러프가 노팅엄 포레스트를 맡을 당시에도 그랬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1959년 FA컵 우승 이후 1부 리그 중위권과 하위권을 맴돌다가 1972년을 끝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별 볼일 없는 팀으로 전락해 있었다.

하지만 클러프가 노팅엄 포레스트를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마틴 오닐, 이안 보이어 등을 중심으로 스쿼드를 구성해 전력을 강화시켰고 구단 내에 존재하던 부정적인 인습을 없애며 선수단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는 곧 팀 성적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1976/77시즌 1부 리그 승격을 이뤄낸 노팅엄 포레스트는 이듬해 1부 리그에서 42경기 무패 행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리그와 리그컵 더블을 달성한 노팅엄 포레스트는 순식간에 강팀으로 변모했다. 더욱 놀라는 성과는 1978/79시즌과 1979/80시즌 유로피언컵에서 내로라하는 강팀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유로피언컵 2회 연속 우승이었다.

이는 리버풀FC에 이은 2번째 기록이며 1부 리그로 승격한지 단 3년 만에 거둔 성적이다. 우리는 종종 ‘리즈 시절’이라는 명칭을 전성기를 구가하는 팀이나 선수에 붙이곤 한다. 하지만 노팅엄 포레스트의 업적을 살펴보면 ‘노팅엄 시절’이라는 단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단명 감독

① ’82일’ 기 루 – RC랑스 (2007년 6월 5일 ~ 2007년 8월 25일)

기 루 ⓒ Édouard Hue

AJ오세르에서 무려 44년 동안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장수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기 루는 동시에 ‘단명 감독’이기도 하다. 2005년 6월 오세르의 지휘봉을 자크 산티니에게 넘겨준 루는 2년 후 2007년 6월 5일, 랑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랑스에서의 생활은 성적 부진과 계약 문제가 맞물려 루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결국 루는 지휘봉을 잡은 지 불과 약 2개월 만인 2007년 8월 25일, 단 4경기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4경기 동안 그는 0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② ’17일’ 박성화 – 부산 아이파크 (2007년 7월 18일 ~ 2007년 8월 3일)
부산 아이파크를 매우 좋아하는 팬이라면 ‘박성화’라는 이름 석 자를 쳐다보기도 싫을 것이다. 박성화는 2007년 7월 18일, 앤디 에글리 감독이 성적 부진의 이유로 사퇴한 뒤 공석이었던 부산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감독 부임 후 약 17일 만에 부산 감독직을 사임하고 대한민국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옮겨가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는 부산 감독직을 수행하는 동안 대전과의 FA컵 1경기를 치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당장 최종예선을 치러야했다. 이때 축구협회는 올림픽대표팀 소속 선수를 잘 아는 감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박성화를 적임자로 지목했다. 그리고 박성화를 ‘하이재킹’ 하다시피 데려갔다. 황당한 사실은 부산 직원들조차 이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직원들은 박성화가 올스타전을 보러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자 부산 서포터즈를 비롯한 많은 팬들은 K리그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내용이 포함된 항의 성명을 냈다. 그리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경기에 ‘개념 없는 축구협회!, 사기 치는 박성화!’라는 걸개를 달고 맹렬하게 축구협회와 박성화를 비난했다.

③ ‘715일’ 하랄트 슈마허 – 포르투나 쾰른 (1998년 1월 7일 ~ 1999년 12월 15일)

포르투나 쾰른의 리그 성적 그래프 ⓒ Sviraman

F1의 전설적인 드라이버 슈마허가 아니다. 토니 슈마허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하랄트 슈마허는 1980년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골키퍼로 활약했다. 현재는 1.FC 쾰른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선수 은퇴 후 샬케04, 바이에른 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에서 골키퍼 코치직을 수행했다. 그는 축구 인생 동안 딱 한번 팀을 이끈 적이 있다. 현재 독일 3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포르투나 쾰른의 감독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슈마허는 포르투나 감독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슈마허가 지휘봉을 잡은 1998년 1월, 포르투나 쾰른은 당시 2부 리그에 있었고 분데스리가 승격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고 끊임없이 추락했다. 결국 슈마허는 1999년 발트호프 만하임과의 경기 도중 0-2로 뒤지던 하프타임 때 경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슈마허는 끌려가고 있던 상황에서 락커룸에 앉아 선수들을 독려하려던 순간 구단주로부터 직접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장 뢰링 포르투나 쾰른 구단주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슈마허에게 소리쳤고 “오랫동안 참고 참았지만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선수로서 무척 좋아했지만 당신은 감독감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쫓아내듯 슈마허를 경질한 포르투나 쾰른, 슈마허가 저주를 내렸던 탓일까. 포르투나 쾰른은 이후 5부 리그까지 추락했고 2013/14시즌이 되어서야 3부 리그로 복귀했다.

④ ‘1일’ 故 마놀로 프레시아도 – 비야레알CF (2012년 6월 7일)

마놀로 프레시아도의 동상 ⓒ Hesselin

2008/09시즌부터 2010/11시즌까지 스포르팅 히혼을 이끌고 프리메라리가에 ‘돌풍’을 몰고 왔던 프레시아도는 비야레알의 사령탑을 맡게 된지 하루 만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스페인 언론 ‘마르카’를 비롯한 각종 매체는 발렌시아 지방의 한 해안가에서 휴식을 즐기던 프레시아도의 사망 사실을 속보로 전했다.

당시 비야레알은 프리메라리가에서 강등되어 다음 시즌을 세군다에서 보내야했고 1년 만의 승격을 위해 성공적으로 히혼을 이끌었던 프레시아도를 선임했었다. 비야레알은 프레시아도 감독 선임사실을 이틀 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⑤ ’85일’과 ’77일’ 프랑크 데 부어 – 인테르 (2016년 8월 9일 ~ 2016년 11월 1일), 크리스탈 팰리스FC (2017년 6월 26일 ~ 2017년 9월 11일)

데 부어는 감독으로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 Flickr’s Greg Tee

데 부어는 2010년 12월 중도 사임한 마틴 욜의 후임으로 AFC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으로서의 첫 데뷔 경기였던 챔피언스리그 AC밀란전에서 2-0으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2010/11시즌부터 2013/14시즌까지 에레디비지에 4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감독 커리어는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2016년 8월 9일 인테르 구단 공식 트위터와 홈페이지를 통해 “데 부어가 인테르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다”라며 데 부어 선임을 공식 발표했다. 인테르는 데 부어의 아약스 감독 시절을 높게 평가했고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실망감이 되었다. 데 부어의 지휘 아래 인테르는 리그 12위까지 추락했고 유로파리그에서는 조별 리그 1승 2패로 부진한 끝에 탈락했다. 결국 2016년 11월 1일 데 부어는 경질되고 말았다. 당시 인테르 CEO였던 마이클 볼링브룩은 데 부어를 100% 지지하고 있음을 밝혔지만 데 부어가 경질되자 그도 따라서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데 부어는 약 7개월 만에 EPL 크리스탈 팰리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지휘력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개막 후 무득점 4연패라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팬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취임 77일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는 EPL 역사상 최단 기간 경질 기록이다. 데 부어는 지난 인테르 감독 시절에 이어 연속으로 시즌 중 경질되는 굴욕을 맛봤다.

⑥ ’70일’ 에드가르도 바우사 – 사우디아라비아 (2017년 9월 14일 ~ 2017년 11월 22일)

에드가르도 바우사 ⓒ Notgenias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는 12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판 마르바이크 감독과 재계약 문제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며 결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판 마르바이크의 후임으로 과거 아르헨티나와 UAE를 이끌었던 바우사를 선임했다. 하지만 바우사는 A매치 5경기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라트비아와 자메이카를 상대로 각각 2-0, 5-2 승리를 거두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가나, 포르투갈, 불가리아에 각각 0-3, 0-3, 0-1로 3경기 연속 무득점 패배를 하고 말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는 3경기 연속 패배를 문제로 삼아 바우사 감독을 경질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감독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하기로 유명한 팀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축구협회 간부와 왕실이 직접 감독의 업무에 많은 관여를 하는데 바우사는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장기 집권했던 감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2000년대 초반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선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질된 감독들은 2000년대 후반 이후에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 축구에서 감독의 신분은 한낱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 현재 10년 이상 한 팀을 이끌고 있는 감독은 그다지 많이 없다. 자신만의 축구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길어야 3년 안에 지휘봉을 내려놓는 경우가 빈번하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 축구의 특징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축구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축구의 트렌드가 변화한다. 아무리 명장이라 하더라도 변화하는 트렌드에 자신의 축구 철학을 적절하게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감독의 거취에 대해서 예상하는 것이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감독들 역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 발언하곤 한다. 이처럼 아무리 명성이 높은 감독이라 하더라도 모든 명장들에게 ‘장수 감독’이라는 호칭이 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더라도 언제 그 자리에서 내려올지 모를 일이다. 감독의 세계는 냉정하다.

emrechan1@sport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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