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FC 시절 조광래 감독의 모습. ⓒ경남FC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10년이었다. 당시 경남FC를 이끌던 조광래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몇 번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경기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따로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는 아니라 의아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으니 조광래 감독은 잔뜩 화가 나 있다. “김 기자. 오늘 우리 판정 문제 어떻게 생각해?” 알고 봤더니 이날 경남FC가 애매한 판정의 희생양이 됐다. “애매하죠. 문제가 있는 거 같긴 해요”라고 답하자 조광래 감독은 당장이라도 프로축구연맹에 쳐들어 갈 기세였다. “그치? 김 기자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연맹에 가서 항의할 거야. 아무리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객관적으로 봐도 이건 문제가 있는 판정이야.”

결국 경남 프런트에서 뜯어 말려 조광래 감독이 연맹으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늘 이렇게 불만이 있으면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었다. 꼭 자신이 맡은 팀에 관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국 축구 현안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의 말이 꼭 옳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렇게 할 말은 하는 지도자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한참 어린 사람과도 토론이 가능한 지도자였다. 나는 그래서 조광래 감독을 참 좋아했다. 무조건 윽박지르고 딴죽을 걸라는 게 아니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야기하건 넉살 좋게 돌려 이야기하건 지도자라면 자신의 의견을 흔들림 없이 정확히 이야기해야 한다. 때론 불만이 있으면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과만 하는 감독, 과연 옳은가?

그런데 요즘 K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감독들을 보면 이런 점이 참 아쉽다. 어느 한두 감독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팀의 지도자라고 대입해 놓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 K리그 감독들은 다 ‘착한 지도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구단이 투자를 줄여도 그렇고 판정이 애매해도 그렇고 축구계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도 그렇다. 늘 하는 이야기가 비슷하다. “허허. 우리도 참 힘듭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죠. 상황이 좋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이런 비슷한 말을 한다. 그 누구도 싸우려 들지 않는다. 판정 문제를 언급하면 벌금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싸우는 분위기를 싫어한다.

어느 팀 감독 이야기다. 투자가 확 줄어든 이 팀은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감독이라면 구단 수뇌부를 향해 따끔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우리가 높은 수준을 이어가려면 지금처럼 투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감독은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투자가 줄어들고 팀은 점점 위용을 잃어 가는데 늘 팬들에게 사과만 한다. “이번 경기는 죄송합니다. 이번 경기를 약으로 삼아 다음 경기에서는 팬분들께 꼭 승리를 선사하겠습니다. 부상 선수도 많고 상황이 좋지 않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집중하겠습니다.” 어느 감독 이야기 같은가. 특정해서 한 감독을 꼬집은 게 아니라 대부분의 감독에게 대입해 봐도 통하는 말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만날 때마다 팬들에게 사과하기 바쁘다. 스스로 죄인이 된다.

팬들에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투자하지 않고도 성적만 바라는 구단에 쓴소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감독이 아니라 구단의 대변인이 돼 있다. 당연히 구단에서는 강등이나 당하지 않으면 감독 자리를 보전해 준다. 구단 입장에서는 모든 비난의 방패막이가 돼 주는 감독을 내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목표는 그냥 현상 유지인데 감독을 갈아치울 이유는 없다. 괜히 말 안 듣고 구단 비판하고 축구계 현안에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감독을 데리고 왔다가 문제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수년 째 팬들은 “나가라”고 하는 감독을 구단에서 계속 내치지 않고 데리고 있는 이유는 지도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북 최강희 감독은 할 말은 꼭 하는 지도자다. ⓒ전북현대

‘착한 감독병’에 걸린 사람들

불만이 있으면 때론 넉살 좋게 돌려서 이야기하거나 때론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지도자가 거의 없다. 늘 “없는 살림이지만 열심히 하겠다”가 전부다. 더군다나 이들 중 상당수는 현역 시절 대단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더더욱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들의 말이 전부 옳은 건 아니지만 현역 때 이름을 날렸던 이들은 무명 출신 지도자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 지도자라는 건 이럴 때 더 빛을 발하라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입을 꾹 닫고 있다. 속 시원하게 “우리 구단이 투자를 하건 나를 내치건 선택하라”는 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용기도 없다. 그들에게 ‘없으면 없는 대로’는 이제 입버릇이 됐다.

최근 들어 한국 축구는 많은 발전을 이뤘다. 경기장 시설도 좋아졌고 이제는 어지간한 프로팀도 과거 대표팀 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훈련하고 있다. 선수들의 기량도 높아졌고 팬들의 인식도 개선됐다. 그런데 딱 하나만 문제를 꼽자면 나는 그게 지도자의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축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온 동안 지도자 수준은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뤘는지 되돌아 보자. 프로 무대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 지도자도 몇 없을뿐더러 현역 시절 이름값으로 대단히 높은 단계부터 시작해 계속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로 경력을 이어가는 이들이 상당수다. 감독 돌려막기가 성행하고 이들은 철저히 구단 편에 서 쓴소리도 하지 않는다.

일부 감독은 선수들은 그렇게 다잡으면서 구단의 부족한 투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허허. 남들도 다 어려운데 열심히 해야죠”라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선수 시절 한 성질하던 이들도 프로팀 지도자만 되면 철저히 ‘착한 감독병’에 걸린다. 구단은 투자를 줄여도 이렇게 구단 입장을 대변해 주고 “다 내 탓이오”라며 여론에 사과하는 지도자들 뒤에 숨어 있다. 싸우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단이 지원을 잘 해주지 않으면 작정하고 한 번은 불만을 토로하는 지도자도 없고 연맹이 잘못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비판하는 지도자도 없다. 한국 축구계 시스템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지도자도 없다. 다들 ‘내 자리’가 중요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싸울 용기가 없나?

나는 이런 면에서 조광래 감독을 참 좋아했다. 나뿐 아니라 여러 축구 해설위원들도 그가 경남FC를 지휘할 무렵 조광래 감독으로부터 깊은 분노가 담긴 하소연을 꽤 들었다. 조광래 감독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 지도자가 돼서도 대한축구협회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기술위원회가 대표팀 선임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하자 얼굴을 붉히며 싸운 적도 있다. 적어도 축구 감독이라면 둥글게 살아가는 게 다 좋은 게 아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문제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면 싸울 용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K리그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경기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구단은 계속 투자를 줄이고 있는데 여기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없다.

구단이나 연맹과 꼭 대립해 얼굴을 붉히고 쌍욕을 하라는 게 아니다. 최강희 감독을 보면 진짜 프로팀 감독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것이다. 그는 푸근한 표정과 말투로 넉살 좋게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할 말은 한다. 그는 얼마 전에도 대표팀에서 전북 수비수들을 다 뽑아가자 “그렇게 우리선수들을 다 뽑아가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라고 애써 돌려가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분명히 좋은 지도자다. 그는 적어도 할 말은 한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메시지는 늘 정확하게 전달한다. 최강희 감독이 막강한 권한을 얻고 전북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게 꼭 전북의 대단한 경기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최강희 감독은 그렇게 구단에 지속적으로 요구해 좋은 선수들을 얻어냈고 최신식 클럽하우스도 얻었다. 지도력과 투자를 닭과 달걀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그가 강하게 구단에 요구하지 않았다면 좋은 선수나 좋은 훈련 환경 모두 얻어낼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는 점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꾸준히 주장하고 관철시켜 오래 살아남느냐, 아니면 주장을 내세웠다가 내쳐지느냐는 지도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둥글둥글하게 오래가는 건 좋은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K리그 지도자들은 할 말은 피하고 자신의 자리만 지키려 한다. 그리고 구단은 이렇게 말 잘 듣고 방패가 돼 줄 수 있는 지도자를 고집한다.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지도자들이 먼저 끊어내지 않으면 K리그는 계속 쪼그라들어도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다.

전북 최강희 감독은 할 말은 꼭 하는 지도자다. ⓒ전북현대

선배 축구인으로서 해야 할 일

얼마 전 안산 이흥실 감독을 만나 그동안 생각하지도 못했던 축구계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원래는 안산 구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났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K리그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는 어린 선수들을 위한 K리그 정책이 문제가 있다고 했다. K리그1은 23세 이하 선수 한 명을 의무적으로 출전시켜야 하고 K리그2는 22세 이하 선수를 의무적으로 경기에 내보내야 하는데 이걸 반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K리그1은 22세 이하로, K리그2는 23세 이하로 그 규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돈 없는 K리그2에서도 대학교 4학년 선수들을 뽑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K리그2에서 22세 이하 선수들을 써야하는데 누가 지금 23세가 넘어간 대학교 4학년 선수들을 뽑겠느냐는 것이었다.

이흥실 감독은 이렇게 주장했다. “22세에 프로팀에 왔다는 건 이미 능력이 갖춰져 있다는 거다. 대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프로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잘하고 유망한 선수들은 22세 이전에 K리그1에 간다. 그리고 3~4학년 때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면 K리그2에서 기회를 부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학교에도 활로가 생기고 선수 순환이 된다. 지금 K리그2에서 어떻게 대학교 2학년생 22세 이하 선수를 돈을 주고 데려오겠나. 계약금을 다 주고 데려와야 하는데 그 친구들이 굳이 K리그2를 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22세 선수들이 지금 K리그2에서 경기 못 나가면 얘들은 그냥 축구인생 끝나는 거다. 갈 데가 없다. 정말로 김민재 같은 실력이 아니면 아예 설 기회조차 만들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이흥실 감독은 선수들이 상주나 아산에서 현역 생활의 전성기를 보내는 게 너무 아깝다며 “이제 27살~28살이면 선수로서 꽃 피워야 할 시기인데 그때 군대에 가서 29살이나 30살에 나오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군경팀 입대 기준을 아예 선수들이 한창 뛰어야 하는 23세로 낮춰졌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전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맞는 이야기였다. 지금껏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일선 지도자가 문제 제기를 해 여러 모로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프로팀 감독들은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지적해줘야 한다. 한국 축구 지도자 중 최고 단계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들은 한국 축구계 현안에 대한 문제를 계속 짚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프로팀 감독이기 이전에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전북 최강희 감독은 할 말은 꼭 하는 지도자다. ⓒ전북현대

‘싸우는 감독’이 필요하다

이흥실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릎을 쳤다. ‘나는 왜 이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선배 축구인이라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구단의 방패가 되기 이전에 이런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쳐줘야 한다. 그래야 자꾸 문제가 노출되고 개선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산은 K리그2에서도 하위권으로 분류되는 팀이지만 나는 그래서 이흥실 감독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는 늘 한국 축구 현안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나 같은 별 영향력도 없는 칼럼니스트가 아무리 주장해도 안 들릴 이야기를 이렇게 프로 무대 지도자들은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저 오늘도 “제 탓입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외친다.

자기 주장을 펼칠 줄 아는 감독이 많아져야 한다. 쓴소리는 하나도 못하고 늘 팬들에게 사과만 하는 감독이 넘쳐나서는 아무런 발전이 없다. 더군다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향력 있는 선수들이 지도자가 됐으면 더더욱 눈치 보지 말고 할 말은 해야 한다. 한국 축구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다. 그런데 이 지도자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도 없고 지도자들 스스로 구단 편이 아니라 축구인 쪽에 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전술이 진화하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할 말을 숨긴 채 자리만 보전하는 지도자들이 대부분이라면 현재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K리그에는 지금 구단 대변인 같은 감독이 아니라 ‘싸우는 감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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